미투 반작용 ‘펜스룰’ 왜 나왔나?

펜스룰 논란

‘미투 운동’의 여파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자 일각에서는 ‘펜스룰(Pence Rule)’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펜스룰이란 과거 미 공화당 출신 정치인 마이크 펜스(Pence)가 의회 전문지 <더힐>에서 밝힌 견해로서 ‘아내 외의 여성과 식사를 하지 않는다’ 등 사생활 논란의 여지를 원천 차단하는 행동준칙을 의미한다. 이에 착안해 직장 내에서의 회식 자리나 여성과의 출장 등 남녀 간의 대면적 접촉의 폭 자체를 줄이는 관행이 퍼질 조짐이라는 보도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 이 펜스룰의 확산이 근거가 없다고만은 볼 수 없다고 본다. 실제 지난 2010년 <머니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정몽구 현대차그룹회장이 사별 후 가사도우미 등 자택 종업원 전부를 ‘남성’으로 교체하는 등의 ‘자기관리’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펜스룰이 문화적 관행으로 정착되기 이전에도 일종의 ‘담론’으로서 퍼질 조짐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이러한 펜스룰에 대한 비판론과 옹호론이 온라인상에서 팽팽히 맞붙고 있다. 그런데 일부 언론들은 일방적인 비판 논조를 나타내고 있다.

조선일보가 펜스룰 확산을 비판하며 넣은 삽화

예를 들어 <조선일보>는 “문제의 본질을 피하는 방법으론 남녀 간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진다”는 전문가 인터뷰를 인용하며 펜스룰 확산 조류를 비판한 바 있다. 외국에서도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을 공고히 한다’면서 펜스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가령 페이스북 경영자인 셰릴 샌드버그는 펜스룰이 직장 내 비공식 네트워크 속에서 경력을 쌓을 기회를 여성에게서 박탈한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여성에 대한 멘토링을 장려하는 ‘멘토허’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펜스룰 담론이 확산된 이유

필자 역시 성별 분리주의가 절대 젠더문제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같은 ‘리버럴한’ 비판들은 사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미투 운동이 일상 속의 권력관계와 위계 속에서 관행처럼 이루어진 성희롱·성추행 등에 대한 반동(reaction)으로서 여론상의 파급력을 갖는다면, 마찬가지로 펜스룰 역시 점차 누적되어 가는 성범죄 무고와 마녀사냥의 사례 그리고 성평등을 빙자한 남성혐오 분위기에 대한 반동으로서 회자하기 때문이다.

가령 미투 운동의 원조인 미국에서도 유명가수 ‘케샤’가 성범죄를 꾸며낸 거짓말로 다른 유명인을 무고한 사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케샤의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면 ‘강간문화(rape culture)를 옹호한다’는 낙인이 따라붙어 문제 제기조차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첨예하게 고착된 구조를 보지 못하면서 내놓는 ‘펜스룰은 여성을 소외시킨다’는 진단은 어찌 보면 하나마나한 말이다.

사실 펜스룰이 제안된 배경 자체는 젠더이슈와는 무관했으며 오히려 기독교 복음주의의 거두 그레이엄 목사의 종교적 경건주의에 감화된 자기 수양의 의미가 강했다. 이를 펜스룰 A라고 부르자. 한편 오늘날 확산된 펜스룰 B는 미투운동과 마찬가지로 남성들의 ‘자기방어 수단’으로 논의되는 측면이 강하다.

출처 SBS

펜스룰 A는 오히려 (여비서와 바람이 날지 모를) 자신의 죄성(罪性)이 발현될 여지를 원천 차단하자는 취지도 섞여 있어 어찌 보면 남성성의 내면 자체에 원죄를 돌리는 일부 급진주의 여성운동 조류와 친화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펜스룰 B는 최근 들어 확산된 ‘분리주의 성향’의 급진 여성운동에 대한 반동의 성격이 강하다.

이처럼 현실에서 확산될 조짐을 보이는 펜스룰에는 A와 B 두 가지 성격 모두가 뒤섞여 있다. 최근의 뉴스에 대한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분위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방 안에 여직원과 단둘이 있는 상황 자체를 꺼리는 이 미묘한 분위기까지 어떤 의미에서 ‘나 스스로 부지불식간에 잘못할 수 있다’와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양쪽의 태도가 뒤섞여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 그것은 분리주의 성향의 급진 여성운동의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

미투 운동 본질 흐리는 성대결 프레임

한편 앞서 언급한 ‘분리주의 성향의 여성운동’은 비록 엄격한 의미에서 (여성이슈 외의 그 어떤 사회이슈도 거부하는) ‘분리주의 페미니즘’ 조류와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광의의 ‘성대결 프레임’을 수용했다고 보인다.

급진 여성운동의 이러한 분리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5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성명이다. “너희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비장한 선언으로 운을 띄운 성명은 “우리는 달라졌다. 달라진 우리는 너희들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중략)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달라진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성명 ‘너희들의 시대는 끝났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들”은 해당 성명을 보도한 각종 기사에서 명시되어 있듯이 “남성사회”를 전반을 의미한다. 성폭력 가해 구조를 남녀 분리주의 프레임 아래 표상하는 전형적인 언행이다. 여기서는 이미 남성집단 전체가 잠재적 가해자이자 적으로 상정되어 있다. 지난날 메갈리아 이슈 때 여성계가 취한 태도와 판박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분리주의적 프레임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한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에서 여성 피해자는 34.4%, 남성은 25%로 나왔다. 또한, 노동자 한 명이 6개월간 겪은 평균 성희롱 횟수는 6.36회였는데 이 중 남성의 평균 피해횟수는 6.79회로서 여성(5.79회)보다 더 높았다. 피해 경험 비율에서도 생각과 달리 큰 차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희롱 피해자 중에서도 남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빈도로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분리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이러한 발표 중에서 남성 피해자 비율이나 빈도보다는 남성 가해자 비율과 그 이면의 높은 남성임원 및 남성 경영자 비율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위치의 소수의 특권 남성들이 남성사회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더군다나 이미 많은 전문가는 성폭력의 문제가 본질에서 남녀의 문제가 아닌 권력남용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성별분리 프레임 안에서 이같은 사실은 거의 인식되거나 전달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분리주의 성향의 여성운동과 이들의 확성기가 되어주는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 성별분리 프레임이 미투 운동의 당사자가 되어야 할 남성 자신들조차 수동적이고 자기폐쇄적인 태도로 내몰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작 이러한 사태를 만든 데 일조한 언론들마저 이러한 자폐적인 행동 양식의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기보다는 비난하거나 비웃기 바쁘다.

미투 운동 속에서 소외되는 계층에도 주목해야

한편 미투 운동이 포괄하지 못하는 계층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투 운동이 여론의 장에 소환할 수 있는 계층은 어디까지나 문화적·정치적 상징자본을 소유한 유명인사들이다. 현재의 미투 운동은 이들의 과거 성폭력 의혹을 환기해 여론으로 응징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운동의 작동방식 속에서 소외되는 계층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이 계층에 허위·과장 폭로 피해자도 당연히 들어가지만 폭로하기 힘들거나 폭로의 메리트가 적은 일상의 피해자들도 소외되어 있긴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지적했듯이 인터넷 설치기사나 택시기사로부터 받은 성희롱에 대해 폭로하는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그다지 효과도 없다. 이들이 미투 운동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결국 ‘대리만족’의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미투 운동’

결론적으로 미투 운동은 하나의 거대한 극장식 구조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연이어 폭로되는 유명인 대상의 ‘미투(#Me Too)’는 일상 속에서 누적된 여성들의 피해가 낳은 거대한 열망을 담아 그 가해지목자를 일벌백계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이 폭로의 구조 속에서 역으로 ‘많은 여성의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설사 허위 내지는 과장 폭로피해를 당한 이들도 진위야 어떻든 반드시 가해자의 전형이 되어야만 한다’는 논리적 전도 내지는 심리적 강박 또한 발생한다. 대리만족의 방식이 발생시키는 역설이다. 이 때문에 이미 무고의 정황이 드러난 박진성, 박성준, 이진우 시인 역시도 일각에서는 여전히 지난날 문단 내 성폭력의 전형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분명 유명인이 아닌 이들에 의해 같은 권력형·일상형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여성과 남성들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미투 운동의 취지를 부정할 수 없는 많은 보통 남성조차 미투 운동의 양상을 보면서 무고하거나 억울한 경우 자신을 보호할 어떠한 장치도 없다는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미투 운동과 그 여론양상 속에서 성별 분리주의 프레임이 이미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펜스룰이라는 나름의 자구책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여성이 미투라는 자구책에 호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자구책에 의존하는 보통의 남성들과 보통의 여성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사적인 자구책이 필요하지 않는 해법을 모색하는 데 사회적 지혜와 노력을 기울일 때다.

경제학 석사. 프리랜서 작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