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과 이성을 잃은 진보언론

최근 잇따른 진보언론의 추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진보언론이 연달아 정신줄을 놓고 있다. ‘미투 운동’의 여파가 사회를 휩쓰는 와중에 이를 이용해 대중의 주목을 받고자 하는 진보언론의 파행적인 보도행태가 정도에서 한참 벗어났다.

문제는 주목을 받으려는 방식이 언론답지 못하고 인터넷상의 어글러(도발을 통해 주목을 끌려는 사람)와 관심병자(관심을 받기 위해 위악을 일삼는 사람)와 다를 바 없다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진보언론이 본래 견지했던 가치(진실에 대한 열망, 인간에 대한 존중, 사회에 대한 성찰, 대중을 향한 실천 등)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던진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얼마 전 <프레시안>은 제대로 된 팩트 체크 없이 기자 지인의 진술에만 의존한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인지 성희롱인지 무고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폭로 기사를 쓰다가 치명적인 사실관계 상의 허점들이 노출되고 대중의 비웃음거리가 됐다.

취재가 아닌 취조를 한 프레시안 서어리 기자

<한겨레21>은 최근 박진성·이진우 시인 등에 대해 무고를 일삼다가 민형사상 허위사실 명예훼손죄의 책임을 지게 된 탁수정을 인터뷰에 등장시켜 ‘무고죄로 처벌받은 것은 아니니 무고한 적은 없다’는 말장난이나 일삼고 있다. 또한, 미투 운동에서 폭로된 가해자 중에 정봉주 전 의원의 얼굴 사진을 표지(사진)에 실었다가 인터넷판에서 황급히 삭제하는 소동을 벌였다.

한겨레21 표지
 

박권일의 한심한 칼럼과 이를 실은 <한겨레>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한겨레에 기고한 박권일은 한국사회에도 이른바 ‘강간문화(?!)’라는 것이 만연해 있다고 진단하며 이 강간문화라는 것이 여성을 혐오하고 대상화하는 언어·태도 등으로 유지되는 문화의 총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그는 더 나아가 과거 나꼼수 팟캐스트 방송 중에 일어난 ‘가슴응원 사진’ 사건과 최근의 ‘미투 음모론’을 예로 들며 김어준 등의 인물이 강간 문화를 확산시킨 주범이라는 논리의 비약을 펼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과거’ 자신의 외설적인 성적 망상을 책에 실은 이력이 있는 탁현민 행정관과 그를 청와대에서 자르지 않는 임종석 실장 모두 강간문화를 옹호하는 인물쯤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무리 온갖 흠집을 내려 시도해도 요지부동인 정부의 지지율과 지지집단에 바짝 약이 올랐다지만 해도 될 말이 따로 있다. 더군다나 보통 사람들은 김어준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을 해도 그를 강간문화의 확산 주범이라는 욕설까지 무리해서 지면에 담지 않는다. 한 마디로 박권일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이를 승인한 데스크도 정신줄을 놓았긴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저주’는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만일 탁현민 행정관이 과거에 출판한 글로 강간문화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면 박권일의 글을 실은 <한겨레>는 최근 기자 간의 폭행치사 사건과 성추행 가해자(찜질방에서 성추행을 저지른 간부)를 배출했다는 점에서 역시나 마찬가지로 언론계의 강간문화와 살인문화의 주도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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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신조어에 대한 집착

한 가지만 더 지적해 보자. 박권일처럼 ‘강간문화’라는 허구적인 개념을 전가의 보도 마냥 휘두르는 행위는 요사이 진보진영이 얼마나 페미니즘 신조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미국의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유행한 강간문화라는 신조어는 팝스타인 케샤(Kesha) 등의 무고사건을 통해 그 허구성이 드러난 바 있다. 지난 2014년경 케샤는 자신의 프로듀서인 닥터 루크(Dr. Luke)를 성폭행 혐의로 고발했고, 이를 기점으로 다소 석연치 않았던 이 주장에 회의를 품었던 이들을 싸잡아 ‘강간문화의 옹호자’로 모는 유행이 번져 나갔다.

강간문화라는 용어의 옹호자들은 성폭행이 실제 사실인지를 묻는 절차뿐만 아니라 피해호소 여성에게 증거나 진술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모든 일체의 행위들이 강간문화의 일부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하지만 닥터 루크가 자신을 성폭행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는 케샤의 과거 영상이 발견되자 분위기는 반전됐고 결국 캘리포니아 법원은 그가 고발한 사건의 소송을 기각했다.

이처럼 강간문화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오용되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단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 않는다.

대중을 상대로 서툰 도발이나 일삼는 활동가들

진보언론만이 문제는 아니다. ‘진보는 불편해야 한다’는 의미를 잘못 해석한 나머지 미투 운동을 기해 자신의 주장을 위악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펼치는 데 급급한 진보성향의 필진과 활동가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자기의제를 보다 선정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미투 운동을 대중이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대한 일말의 성찰이나 주의 깊은 관찰 따위는 과감하게 생략해 버리는데, 설상가상으로 상당수 언론은 이러한 수준 낮은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곤 한다.

가령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을 피하는 펜스룰은 스스로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인정하는 셈”이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타인의 의도를 곡해하는 주장은 “남성의 펜스룰을 비난하는 여성계는 여성 스스로 잠재적 꽃뱀임을 인정하는 셈”이라는 주장만큼이나 유치하고 하나마나한 소리다.

또한, 르포 작가 이선옥이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종류의 비아냥은 적어도 얼마 전까지 부장급 남성들의 ‘탈꼰대’, ‘셀프배제’ 주장에 호응하고, 잠재적 가해자 선언을 인증하는 남성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던 이들이 할 말은 아니다.

이선옥 작가 페이스북 캡처

실제로 펜스룰은 대개 ‘사무실이나 룸 등 폐쇄된 공간에서 남녀가 단둘이 있지 않는다’는 수준에서 수용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수용자의 의도는 ‘괜한 오해를 피하고 싶다’는 방어심리에서부터 ‘내가 하는 행위가 위협적으로 전달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배려까지 여러 층위에 걸쳐 있다.

이처럼 펜스룰에 대한 남성 대중의 수용에도 여러 양상이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평소 공감능력이 중요하다고 침을 튀기곤 했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소 내세운 공감 능력은 실제 공감능력이 아니라 일방적인 나르시즘적 공격성향에 불과하다.

언제부터 진보와 페미니즘이 자신의 심리적 콤플렉스와 나르시즘적 공격 충동을 발산하기 위한 소재가 되었는가? 정신줄을 다시 다잡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