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에 쏟아지는 저주의 굿판

그야말로 역대급이다. 한 드라마가 시작 전부터 욕을 먹기 시작해, 시작한 직후 마치 방영이 끝난 듯 비난 세례를 받는 경우가 또 있었나 싶다. 친일파 옹호를 하면 비슷하게 욕을 먹으려나? 연일 쏟아지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비난은 저주라는 말이 모자라지 않는 수준이다.

tvN ‘나의 아저씨’

작품의 설정이나 특정 장면에 대한 불호로 인해 발생하는 불특정 대중의 비토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지한 평론을 업으로 삼는다는 평론가들이 그 분위기에 올라타 이렇게까지 저주를 퍼부어 대는 것은 광기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들의 비판을 요약하자면 대강 이렇다. 아저씨라는 단어가 표상하는 중년 남성의 입장을 옹호하며 합리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단 중년남성의 입장이 대변되거나 합리화되면 안되나?라는 점이 의문이지만 이 부분은 패스하자.

<나의 아저씨>는 중년 남성들의 행태를 합리화한다기보다는 주구장창 그들의 한심함과 부조리를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 안에서 주체적으로 상황을 대하고 일관성을 지켜나가는 사람은 여자주인공 이지안(아이유)뿐이다.

그에 반해 남자 캐릭터들은 남성성을 상실했거나 권력을 알량한 정치질에 휘두르는 비호감 남성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 안에서 도대체 어디에 한남-기득권 옹호가 존재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중년 남자 시청자들이 작품을 통해 위로받는다고 해보자. 그런다 한들 뭐가 문제인가? 대중 매체를 통해 받는 위안에서 중년 남성이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모두 기득권-한남이라서?

이 비판이 성립하려면 이 남자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기득권-한남에 대한 대표성을 띄어야 할 것이다. 50살이 넘어 비리 혐의로 해고당한 큰형, 회사 내 권력 투쟁에서 배제된 작은형,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막내, 이 셋이 기득권-한남을 대표한다고?

작품 내에서 실제 세계의 한남-기득권에 부합하는 캐릭터들은 작품 내에서 악역을 차지하고 있다.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는 회사의 간부들, 극악한 폭력을 휘두르는 사채업자가 그들이다. 설마 <나의 아저씨>가 그 악역들을 위무하고 합리화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선균과 삼형제로 대표되는 찌질한 중년들과 김영민(도대표)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중년의 캐릭터에 대해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공통점은 나이와 성별만 남는다. 나이와 성별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캐릭터를 한데 뭉뚱그려 배척해야 한다면 그건 인종차별의 논리와 도대체 뭐가 다른가? 좋은 한남은 죽은 한남밖에 없다고 말할 텐가?

그래놓고 나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마흔 넘어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아저씨 마을을 꿈꾼다’며 비난한다. 그 장면들은 해당 캐릭터의 망상을 통해 그들이 상실한 남성성과 자기연민에 빠진 한심함을 묘사하는 장면이지, 작품 자체가 어떤 당위를 주장하는 장면이 아니다.(이런 소리까지 해야 하는 게 정말 참담하다.) 삼형제를 통해 보이는 것은 (황진미의 표현대로) 돌봄 노동에 의존해 사는 한남들의 한심함일 뿐이다.

tvN ‘나의 아저씨’

한심한 인물의 한심함을 보여주는 것이 한심함과 인물에 대한 옹호이자 합리화라는 해괴한 논리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악역의 악행을 보여주는 게 악행에 대한 옹호라고 할 사람들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어떻게’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꽃미남 배우를 캐스팅해 재벌로 설정하고 폭력적인 연애 행각을 묘사하는 수많은 ‘여성향’ 드라마들의 한남-주인공들이야말로 ‘합리화와 옹호’라는 주장에 부합할 것이다. 설마 <나의 아저씨>를 통해 박호산 같은 캐릭터가 공유처럼 인기를 끌게 될 거라 믿는 건가?

남성이 찌질하니 여성을 더 비참하게 만들어 로맨스를 합리화하려 한다는 주장은 더 어이가 없다. 여자 주인공보다 나은 조건의 남성 캐릭터를 로맨스의 대상으로 소구하는 것은 남성의 욕망일까, 여성의 욕망일까라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해진다. 상황이 비참해도 어린 여성이니까 그만한 값을 한다는 막말을 하진 않겠지? 로맨스를 등가교환의 원리로 해명하려는 저 속물적인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이선균-아이유 사이의 로맨스가 없다는 제작진의 읍소에 가까운 해명에도 불구하고 하는 소리다.)

황진미를 위시한 반대자들은 이런 식으로 (지극히 자의적인 기준의) 현실과 픽션의 구분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내용과 의도를 의도적으로 오독한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지적 퇴행이다.

더 가관인 것은 지적 퇴행의 와중에 작품의 유해 여부를 따지며 도덕적 심판관을 자처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런 유치함에 부끄러움도 못 느끼는 것은 아마 본인들이 도덕적 당위를 대변한다. 믿기 때문일 것이다. 완장질 중독에는 약도 없다.

아이유라는 어그로

지금 반대자들이 내보이는 극단적인 반감에는 아이유라는 스타가 지니는 이미지 또한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다. 아이유의 음악은 이전 세대에 대한 적극적인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고, 어려 보이는 외모로 인해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비판에 단골 소재로 소환된다. 그는 동 세대-여성 중 최고의 우상이자 넷페미들 진영에게 최고의 빌런이다.

그의 개인사와 (영악함이라 비난받는) 정신적 조숙함은 <나의 아저씨>의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궁핍함, 할머니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장기하와의 연애, 김창완을 비롯한 중장년 가수들과의 협업으로 인해 형성된 이미지까지 그의 개인사 탓에 나이 차 많은 남성과의 대화나 갈등은 물론 연애까지 어색하지 않다. 이런 이미지 탓에 아이유는 작품과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으며, 작가와 감독은 그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하고 비틀기도 하며 캐릭터를 형성해 나간다.

제작진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아이유는 보는 이에게 중장년 남성과의 연애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반대자들의 상상력 안에서 20대의 매력적인 여성과 찌질한 중년 남성과의 연애는 (황진미의 말처럼) 꽃미남이거나 재벌을 제외하면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그런데 아이유는 불가능해 보이는 로맨스를 말이 되게 만들어주는 빌런이다.

tvN ‘나의 아저씨’

아직은 두고 봐야겠지만 해명대로 내용이 진행된다면, 제작진이 말하는 ‘힐링’이라는 것은 캐릭터 간의 ‘이해와 화해’를 통한 위안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자들에게 ’한남개저씨-일반에 대한 이해와 화해’라는 옵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상상력 안에서 (비이성적인 정념에 의한) 연애 외의 호혜적인 관계 성립은 넌센스이며, 이 넌센스가 아이유라는 빌런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 반대자들의 인식이다.

이런 기이한 사고과정을 통해 아이유는 한남-개저씨-기득권에 부역하며 구체제를 강화하는 반동분자로 규정된다. 아이유는 빌런이어야만 하니 없다는 로맨스를 끝까지 찾아내려 하고, 이에 실패하자 극 중 캐릭터 간의 이해와 정서적 교류마저 비난하는 해괴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지안이 요구하는 2000만원

지안은 도대표에게 동훈과 박상무를 해고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두 당 1000만원씩, 총 2000만원을 요구한다. 이 장면에서 많은 시청자가 지안이가 통이 작다며 어린 티가 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게 단순히 어린 탓에 통이 작아서라고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안은 자신의 처지를 연민하지도 않고 구걸하지도 않으며 법에 호소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타인과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자력구제만을 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이 나에게 폭리를 취하지 않아야 하고, 지불한 만큼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 때문에 거래가 정당하지 않다고 느껴지면 과감하게 폐기해 버린다. 그 태도는 상대가 회사든 사채업자이든 같다.

이 ‘가성비’에 예민한 가격정책은 자신이 소비자일 때 뿐만 아니라 공급자가 되어도 지켜진다. 그게 IMF 이후 태어나 세월호 사건을 목격하고 성장한 98년생 이지안의 윤리이며, 이 윤리를 지키는 것이 자존을 지켜내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일에 대한 지안의 가격정책은 시장 논리에 의한 폭리가 아니라 자신이 정당하다고 느끼는 만큼이다.

반면 경제적 궁핍함에 몰린 삼형제의 큰형 상훈은 가족과 주변인들의 호의에 기대어 적당히 묻어가며 살아가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지안의 입장에서 이 삼형제는 배부른 투정을 하는 자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 지안이 동훈을 바라보는 표정이 항상 그렇다.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도 지루한 표정으로 우울해하는 동훈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젊은 세대가 부동산을 가지고 고민하는 중장년, 훈계를 일삼는 386세대를 바라보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지안이 처한 가혹한 부양의 책임은 인구절벽과 급속한 노령화에 처한 그 세대의 미래를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황진미의 글에 달린 리플 중 ‘해먹을 만큼 해먹어놓고 뭐가 아쉬워서 징징대냐’는 말과 극 중 지안의 태도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삼형제와 지안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넷페미와 한남-개저씨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와중에 동훈(이선균)만이 여러 사건을 거친 후 자신이 결과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순간 지안이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다. 캐릭터를 묘사하는 이런 방식이 도대체 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그런 아저씨는 현실에 없고, 한남-개저씨는 모두 성추행범이거나 성추행 예비군이기 때문인가?

<나의 아저씨>는 반목하고 있는 다른 세대, 성별의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리려 한다는 의도를 1~2화를 통해 충분히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대단한 ‘젠더관점’에 의한 비난이 빗발친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그토록 외치던 ‘남성이나 타인에 대한 의존성 없고, 주체적이며 강인한 여성 주인공’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이 중년남성과 정서적 교류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중년 남자는 이해나 로맨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들에 대한 연민은 곧 한남-권력에 대한 옹호라는 극단적인 배제의 논리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제 2회를 했을 뿐이다. 다 보고 얘기해도 늦지 않는다. 제발 지금 보이는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말만 하자. 주장만 남은 평론(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만)은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과 동의할 준비가 된 이들 사이의 반목만 불러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