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만남 속에서만 꽃피우는 씨앗

[서평]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성장 소설은 세대를 불문하고 사랑 받는 장르가 아닐까 싶은데요, 존재는 살아있는 한 늘 자신을 찾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은 이유 없는 반항, 비트 운동, 샐린저 현상, 콜필드 신드롬을 일으킨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민음사 출판)

작품은 이렇게 대중들 사이에 파급적인 영향력을 준 동시에 사회 공공기관들의 비난, 비판을 샀는데요, 그 이유는 1950년대 미국의 사회적 배경을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종전의 폐허는 존재의 허무로 이어졌고 기성세대의 위선과 기만은 과거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낙담하는 태도로 연결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 콜필드를 통해 희망 아닌 절망에 기대는 젊은이들의 심리, 존재의 뿌리마저 흔드는 혼란과 방황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당대뿐만 아니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세대에게도 통하게 되는 것이죠. 아주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그대로라는 것을, 그래서 근원적인 문제에 가 닿는 수많은 노력들은 상대적으로 얼마나 힘겹고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콜필드는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를 대변하는 명문사립학교에서 낙제, 퇴학을 당하고 2박 3일간 있었던 일을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들려주는데요. 그 장소가 정신병원이었다는 것과 그의 나이가 막 정체성을 형성할 시기였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꽤 임팩트있게 다가왔습니다.

 

먼저 그의 눈에 비친 사회는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소위 속물들의 집단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는 학교 친구들과 겉으로는 어울릴지언정 깊게 교제하지 않습니다. 지저분하고 인성마저 한심한 친구들로 가득 찬 학교라는 제도를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학교란 이런 곳이다. 언제나 누군가가 발톱을 깎는 모습이나, 여드름을 짜는 모습 같은 것을 봐야 하는 그런 곳.

그러나 학교를 나와 대면하게 되는 사회 역시 그리 안전한 곳이 못됩니다. 기댈 곳 없는 그의 마음에 유일한 안식처는 죽은 동생 앨리와 살아있는 동생 피비인데요, 앨리의 참되고 선한 인성이 더는 그의 곁에 없다는 것, 그리고 피비의 예쁜 순수성이 결국에는 성장함에 따라 변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그는 외로운 상실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는 바라는 이상향에 닿을 수 없다는 절망을 이미 알고 있는 그로서는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이 미친 세상을 버티기 위해서는 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호밀밭의 파수꾼

또 하나는 혼란으로 가득 찬 자아의 감정을 누군가로부터 긍정 받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 시기에 그는 가족들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애착 없이 거리감을 둔 관계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잘 형성되지 못한 정체성은 성인이 되어서의 삶에도 큰 혼란을 불러오게 마련인데요,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민도 건강한 자아를 찾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심리적 문제입니다. 주로 애착관계에서 오는 결핍감이 원인으로 회피형 인간, 불안형 인간을 만들어 온 것이죠.

그러나 회피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습니다. 열쇠는 분명 내 손에 있지만 그 열쇠를 꽂을 구멍은 세상을 향해 열릴 문에 있습니다. 결국 콜필드가 서부로 도망가는 계획 대신에 동생 피비의 간곡한 부탁으로 집으로 돌아온다는 설정은 비록 정신병원이긴 하지만 세상 속에서 그 대답을 찾겠다는 의지로 보이거든요.

제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줬던, 존경하는 빅터 프랭클 박사는 시련을 극복하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을 삶의 의미와 의미에의 의지로 꼽습니다. 콜필드에게도 기댈 기억이 있다는 것은 -죽은 앨비든, 변할 피비든, 겨울이면 사라지는 오리들의 연못가이든– 이 세상을 살아낼 의미와 의지를 부여해주는 것이죠. 그것은 기억 속의 한 장면, 과거의 것들이지만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죠. 그의 마음 속에 영원히 저장, 각인된 것이죠.

그렇지만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중략)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떠밀려 온 것이고 미래로부터 이끌림을 받는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미래를 향한 절망적 시선은 완전한 절망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체된 현재의 허무와 불안에 과거의 추억을, 미래의 목표의식을 심어만 준다면 잃었던 생명력을 되찾고 무엇보다도 멀리 날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콜필드는 소설 말미에 이렇게 말하거든요.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중략)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그러니까 해답은 관계 속에 있다는 겁니다. 정체성이란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만 꽃피우는 씨앗이거든요. 그 열매는 사랑이라는 것이고요. 그는 십대의 청소년들이 쉽게 그러하듯 싫어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상업주의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크리스마스 쇼를 선보이는 교회,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 인사치레의 ‘멋지다’와 같은 빈말을 하게 되는 것. 가식적인 사람들, 성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의 타락까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싫어하는 것들 속에서도 일종의 매력을 느낍니다. 아직은 스스로에 대해 정의 내릴 수 없는 어린 학생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보다 인간의 모순 속에 발견되는 가능성의 빛에 저는 한 표 던져주고 싶은데요.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거나 그 순간만 미워했을 뿐이라는 콜필드의 변덕스럽고 찰나 같은 마음의 변화, 그것이야말로 부정이 긍정으로 변할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르니까요.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민음사 출판)

그는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가 이런 말을 듣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디서도 아늑하고 평화로운 장소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 곳은 없는 것이다. (중략) 일단 가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어떤 자식이 바로 코밑에다 <이런 씹할>이라고 써놓고는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을 경멸하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콜필드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피비가 타고 있던 회전 목마, 황금의 링을 잡으려 할 때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는 그는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피비가 씌워준 모자와 건넨 키스에도 불구하고 비는 엄청나게 퍼붓고 온몸은 흠뻑 젖어버렸지만 그 순간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걸로 된 것입니다. 그 기억에 기대 우리는 또 다음 단계로 힘겹고 소중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일 테니까요. 근원적 문제에 가 닿는 노력으로의 한 걸음을요.

그 한 걸음에 절망 대신 희망을 걸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라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