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세라비의 인문학 내러티브] 르네상스 인문학 아이콘 ‘에라스무스’

슈테판 츠바이크 전기문학 제1편 <에라스무스 평전>

르네상스 절정기 한복판에 에라스무스가 있었다. 르네상스는 일반적으로 14~16세기 유럽의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난 변화와 개혁의 시기를 말한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라고도 불리는 에라스무스(1466~1536년)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화 작품

르네상스인 하면 흔히 다빈치·미켈란젤로·단테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르네상스기도 초기·중기·후기로 나뉘어서 평가해야 하고,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에서 전개된 르네상스 문화도 엄밀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에라스무스는 유럽 대륙을 무대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강의·토론·집필을 한 당대 인문학 사상의 상징이었다. 유럽의 왕족·귀족·학자·대중적 문필가 등은 계층 불문하고 에라스무스를 초청해 학문을 논했던, 요즘으로 치면 스타 인문학자라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를 지칭하는 단어는 많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인물이다. 당시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여 있어 일반 대중들은 읽을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최초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대중도 성서를 읽게 했다. 또한 신학자였지만 르네상스의 핵심인 가톨릭의 부패와 교황의 권위를 비판한 인물이었다. 풍자문학 <우신예찬>을 발표해 가톨릭을 비판했으나 자신은 끝까지 중립의 균형을 지켰다.

에라스무스가 단초를 제공한 종교개혁, 아니 종교전쟁에서 맞닥뜨린 운명적인 인물 마르틴 루터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던 에라스무스의 온건함은 말년의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종교개혁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종교전쟁은 유럽 전역에서 약 400만명이라는 참혹한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서막이 올랐던 시대를 살았던 에라스무스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 평전>을 독일 히틀러 나치의 광기가 휘몰아치던 시기, 오스트리아를 떠나기 전에 집필한 작품이다. 히틀러를 보며 16세기 중엽 에라스무스가 살았던 종교개혁 시대의 광기를 떠올렸을까.

중세 로마 가톨릭의 절대 권위 시대는 악습과 부패, 타락의 길을 걸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피바람을 불러오며 종교개혁으로 폭발했다. 이 자리에 에라스무스가 있었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라는 인물에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다고 평한다.

하나는 위대한 인문주의자였으며, 인문주의의 위대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점, 또 하나는 종교개혁의 시초를 제공하며, 종교개혁에 길을 연 인물이다.

테첼(Tetzel)이 작성한 불경한 면죄부 사본

에라스무스의 일생을 이야기할 때, 이 사람을 빼서는 안 된다. 바로 위대한 독일 깡패, 그것도 대단한 학문적 실력을 갖춘 불굴의 투사, 당대 황제·왕·귀족들이 앞 다투어 존경을 표했던 동경의 대상 에라스무스를 사정없는 독설로 초라하게 만든 자, 에라스무스를 1000년 동안 그리스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큰소리 쳤던 자, 바로 마르틴 루터다. 지난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를 평가할 때 따라붙는 중립주의자, 회의론자, 겁이 많고 소심한 자, 온건한 평화주의자, 그러나 광신 속에서 끝까지 이성의 법칙을 고수한 자 등이다. 하지만 에라스무스가 빛을 발하는 ‘인문주의’는 500여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는 인문주의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14세기부터 발현한 르네상스기 인문주의, 그전의 고대 인문주의의 흐름 가운데 에라스무스 인문주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 평전>에서 그의 출생의 비밀을 밝힌다.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신부의 자식, 사생아 에라스무스. 이를 보더라도 그만큼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의 성적문란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수도원으로 보내진 에라스무스는 최고의 고전 도서관이 있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서 라틴어를 완벽히 익히고 학문을 섭렵한다. 에라스무스의 탁월한 학문적 명성이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럽 각국의 왕족, 고위 귀족들의 속물적 인문주의 경향은 에라스무스의 온건하고 섬세한 문필을 필요로 했고, 그들의 인문학 허영심을 채워주는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의 인문주의적 문화의 기수로 에라스무스를 선택했다.

요즘 말로 인문학 스타였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영국·스위스·이탈리아·독일 등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종교사상, 문학, 고대 언어학을 설파하며, 그리스어로 쓰여 읽기 어려웠던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대중적인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며 이를 가능케 했다.

에라스무스가 1515년에 쓴 <우신예찬>은 가톨릭의 케케묵은 악습을 해학과 풍자를 빌어 비판을 한 글이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황, 추기경들의 부도덕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모르는 이들이 누가 있으랴. 에라스무스의 노련한 풍자는 인문학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에라스무스의 명성은 최고봉에 도달했다. 에라스무스 나이 쉰다섯이 되었다. 그때 그의 일생의 숙적, 완벽히 반대되는 인물이 등장했다. 무명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종교개혁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 횃불을 들고 나타난 두려움 모르는 마르틴 루터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폐단은 극에 달해 각종 성물 강매, 돈을 받고 죄를 사해주는 카드 ‘면죄부’ 판매는 루터로 하여금 더는 좌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루터는 “교황은 어떠한 죄도 사할 수 없다”를 포함한 95개 항목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못으로 박으며 전 유럽을 경악시켰다. 이로써 유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라져서 피의 종교개혁의 막이 올랐다.

95개조 논제를 성문에 게시하는 마르틴 루터. 벨기에 작가 페르디난드 파웰(Ferdinand Pauwels)의 그림 ⓒ 위키피디아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가 절정을 이룸과 동시에 저 밑바닥 민중은 달리 꿈틀거렸던 것이다. 츠바이크는 이것이 바로 에라스무스를 정점으로 한 인문주의의 한계였다고 말한다. 민중이 없었던 인문주의, 귀족층의 전유물로 여기고 민중을 천시했던 인문주의, 민중에 대한 이해부족은 종교개혁을 중심에 두고 민중세력을 등에 업은 루터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가톨릭을 비판하고 신학자와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비판했으나 끝까지 이성의 법칙에 따라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종교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고독한 투쟁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에라스무스와 달리 루터·츠빙글리·칼뱅은 가톨릭의 모순은 일거에 쓸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에라스무스 평전>의 백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박문 주고받음이다. 이들의 근본적인 종교관은 완전히 달랐다. 루터는 ‘예정설’을 믿었다. 신이 인간의 구원과 벌을 미리 정해놓고 있다는 설이다. 에라스무스의 유명한 ‘자유의지론’은 이성과 의지 속에서만 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론이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그 시대를 비추어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대논쟁이었다.

세상은 에라스무스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루터의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사태가 벌어졌다. 모든 이들은 에라스무스가 교황에게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중립이 아닌 Yes냐, No냐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의 대답은

나는 평화를 원한다. 나는 나의 평온을 원한다.

는 말을 남기며 끝까지 중립을 고수했고 스위스 바젤로 가서 학문에 묻혔다.

종교전쟁의 피바람은 프로테스탄트의 종파 분열로 이어졌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변했다. 에라스무스는 말년에 고독하게 임종했다. 광기의 시대, 이성은 침묵한다. 에라스무스는 침묵했다.

현 시기 인문학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삼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필자는 “에라스무스부터”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의 위대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전기문학 제2편은 인식의 꼭대기에서 영원히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