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 실패와 한국 진보정당의 미래

[리뷰] 마크 릴라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마크 릴라가 쓴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의 핵심은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어떻게 미국 민주당을 갉아먹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정체성 진보주의’가 미국 민주당의 민주주의적 연대와 시민이 가지는 공통의 과제를 허물고, 정체성 교육과 정체성 이데올로기에 함몰됐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힐러리 클린턴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CHARLOTTE, NC, USA – JULY 5, 2016 Hillary Clinton makes a pointing gesture as she delivers a speech at a campaign event with US president Barack Obama. © shutterstock

힐러리는 대선후보 선거기간 줄곧 ‘유리천장 깨기’를 강조하며, 본선 승리로 최후의 유리창을 깬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고 장담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대선후보 수락 연설 당시 유리가 산산이 깨지는 홍보 영상을 배경으로 등장했는데, 필자는 이때 힐러리의 패배를 직감했다. 힐러리의 전형적인 정체성 정치의 충실함은 불길했다.

마크 릴라는 탁월한 인문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이다. 마크 릴라는 이 책에서 민주당에 똬리를 튼 정체성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정체성은 좌파의 미래가 아니다”고 단언한다. 1960년대 말 68혁명을 시작으로 신좌파 물결은 전통적 민주당의 진보주의적 비전에 균열을 내며 사안마다 정체성을 드러내며 페미니즘·동성애·소수민족·흑인민권운동 등 사회운동을 내세워 파벌과 분열로 나아갔다.

예컨대 페미니즘과 동성애 사안마다 강박적으로 매달리며 민주당의 초점을 흐리게 했다. 민주당의 정체성 중심 운동이 광범위한 시민의 공통 관심사를 밀어낸 셈이다.

그들은 개인주의가 강한 이 시대에 이미 분리되어있는 우리를 더욱 분리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정체성 진보주의자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유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진정으로 동감한다.

현재 한국 사회를 보자. 젊은 여성층, 특히 여자 대학생들은 페미니즘 사상에 깊이 몰입된 나머지 남녀분리주의가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급진적 페미니즘을 강도 높게 비판해왔고, 현재 정치상황은 정체성 정치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말해왔다. 현 집권여당은 정체성 정치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휘말리고 있는 형국이라 판단한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2017년 11월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52회 전국여성대회’에 참석해 이낙연 국무총리, 남인순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등과 함께 ‘정의로운 사회, 여성참여 50%’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 사안에 대해 심각성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정체성 정치의 대표선수 격인 급진적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을 영향력 있는 유권자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마크 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이 책은 현 집권여당을 비롯한 전체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꼭 읽고 깊이 성찰해야 하는 필독서로, 다행히 시의적절한 시기에 출판됐다. 책도 전체 158페이지로 비교적 얇으니 지적으로 게으른 진보정당의 정치인들이 읽기에 부담도 없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 주는 의미는 평범한 미국인, 블루칼라 백인노동자들이 정체성 정치 만연, 자신들의 관점이 옳다는 자만에 찬 민주당을 외면했다는 데 있다.

저자 마크 릴라는 민주당의 문제점은 수십 년 동안 민주당에 스며든 한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 정치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법이다. 정체성 정치는 미국 민주당 집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위력을 발휘한다. 미국의 수많은 인종 집단, LGBTQ(성소수자) 세력은 각기 정체성으로 이익집단화 됐다.

힐러리를 보라. 유리창 깨기 전문가 아닌가. 1970년대 초 급진적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인물 힐러리는 페미니즘 정체성 의식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광범위한 대중들의 시민적 비전, 연대, 공동체 등 공통의 관심사로 향하지 못했다는 인식을 미 국민에게 심어줬다.

저자는 민주당 루스벨트 통치 체제와 레이건 통치 체제의 간추린 역사를 관통해서 오늘날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했다. 레이건 체제 이후 진보정치는 정체성 정치의 덤불 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러한 사회운동에 빠져들며 민중을 도외시했다고 질타한다.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는 실패했다. 트럼프 이후 민주당이 새로운 진보의 시대를 열어갈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

지난 2017년 4월 25일 여성단체협희회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후보 초청 성평등정책 간담회에 참석한 심상정 정의당 전 대표

한국의 진보정당들 역시 이미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정체성 정치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인종, 성소수자, 여성의 이익과 관점이 복잡한 미국 민주당과는 차이가 크다는 점 인정하더라도 미국 민주당 정체성 정치의 실패를 현 시기 국내 정치권은 진지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