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찬의 리얼한 대한민국] 건국절 논쟁이 지속되는 진짜 이유

참으로 끈질기다. 건국절 논쟁 말이다. 사실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주제였기도 했다. 하지만 뉴라이트와 정부 측은 끊임없이 8.15를 건국절로 삼자는 주장을 한다.

일견으로는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움직임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관보 제1호를 통해 대한민국은 1919년 3.1 운동을 통해 건국했음을 밝힌 바가 있다.

이승만
이승만

먼저 뉴라이트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던 일파들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이념적 근원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이다.

그리고 이 유물사관에 따르면 전근대 조선 왕조는 자본주의 이행이 불가능한 체제로서 식민지 전락은 필연적이라는 입장에서 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식민지 경험’을 통해 한국은 근대화를 이룩했으며,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박정희 군사 독재의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완성했다는 입장을 취한다.

재미있게도 그들의 역사관은 지극히 좌파적이다. 바로 안병직 명예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역사관 대부분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았다. 이유는 1930년대 일본 역사학계는 랑케의 문헌실증주의와 유물사관이 주류였기 때문이었고, 그 당시 교육을 받은 1세대들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이어오고 있다.

뉴라이트적 세계관에서 우리 역사란 ‘식민지 시대’와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즉, 타율성의 시기와 독립 이후 새로운 자유주의 이념을 통한 건국의 시기가 구분되어야 ‘친일’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상해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이렇게 시기적 분절이 존재하고, 건국을 후퇴시켜야 당시 건국의 주체들에게 면죄부와 함께 명예를 제공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 ‘임시정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뉴라이트의 바람과는 달리 ‘이승만’은 스스로 임시정부의 적통성을 인정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만 봤을 때 건국절 논쟁은 지극히 명분론의 싸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건국절 논쟁은 ‘외교적 실리’가 걸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독재자로 기억하는 이승만이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한일협정)”을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국가의 기산일’에 대한 이견 차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조약의 부속협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배상금’과 ‘청구권’ 문제였다. 이러한 배상과 청구는 대한민국 측의 권리를 입증해야 하는 문제였고, 이승만 정부는 1910년 강제병합과 이전의 모든 조약 무효를 주장하고 있었다.

국익 차원에서 일제의 인신 지배와 물적 수탈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일제는 한반도와 그 인민을 불법 강점하는 위치에 놓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구체적 근거는 임시정부의 성립에서 찾을 수 있었으며, 을사보호조약의 불법성 및 강화도 조약 이후의 불평등 조약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을사보호조약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출처 KBS
출처 KBS

그렇기 때문에 1951년 미국의 주도하에 논의가 시작된 이래 이승만 정부에서는 쉽게 타결할 수 없었다. 한국 측은 강제병합의 무효와 이후의 모든 수탈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청구권을 확보하려고 했던 반면, 일본 측은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 수립 이전의 대한제국과의 조약은 합법적임을 주장했다.

한일협정 초기 협상 대표였던 유진오(제헌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법학자이자 정치인)는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한일협정을 타결하고 정식 수교를 해야 한다는 정치적 상황과 이승만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국익이라는 입장의 타협점으로 ‘이미 무효’라는 단어를 모색하게 된다.

‘already null and void’(이미 무효)로 알려진 한일협정 영문본의 문구는 청구권에 대한 모호한 해석을 낳았고, 이러한 모호한 해석을 채택한 결과로 경제원조금 액수가 정해졌다. 즉, 한국으로서는 불행한 결과였다.

이 해석은 여전히 논란이 크다. 위안부 및 강제징용, B·C급 전범 배상 등 일본의 원호법 대상이 되지 못 하는 타국 국적의 피해 당사자에 대한 배상 근거를 이 문장에 의해 결정할 수 있었다.

출처 jtbc
출처 jtbc

만약 이승만 정부의 초기 주장에 따르면 1910년 이후 한반도 내 인적·물적 징발은 모두 불법이며, 청구권 대상이 되지만 1948년을 기준으로 건국절을 삼으면, 일제강점기 당시에 청구권의 당사자인 대한민국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고, 조약 무효로서 청구권을 가질 대상국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뉴라이트의 건국절 논쟁은 국내에서 ‘명분론’ 싸움인 것처럼 보여도, 외교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강제병합은 합법성에 있어서 논란이 크다. 을사조약의 절차도 불법성이 있으며, 이 불법성이 입증되면 이를 통해 탄생된 결과인 강제병합은 자연 무효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기미독립선언을 통해 합법적 주권을 선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불법적 침탈에 대한 청구권을 가지게 된다. 사실 건국절 논쟁은 이러한 이면을 봐야 하는 중대한 논쟁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대통령이 건국절의 기산일을 1948년으로 주장하는 것은 국익에 반하고 타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지극히 위험한 발언이기도 하다.

임형찬

'정치하지마라' 저자
bucurest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