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성은 왜 ‘페미니스트 최지혜’를 연기했을까

여성 페미니스트를 연기한 운동권 남성

‘최지혜’라는 자칭 페미니스트의 정체가 탄로 났다. 넷상의 래디컬 여성 페미니스트로 알려졌던 그가 실은 진보성향 매체 <참세상>에 다수 기고한 (운동권 출신) 남성이었다. 실수로 자신의 실명이 적힌 다른 숨겨진 인스타그램 계정을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과 연동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독 군대 문제에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남성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박병학이 <참세상>에 쓴 기사 리스트

우선 최지혜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자. 그는 평소 남성 중심사회를 비판하며 페미니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을 싸잡아 비난하는 화법으로 페이스북에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또한 그는 <슬로우뉴스>에 ‘여성을 살해하는 남성사회 구조가 존재한다’와 같은 자극적인 내용의 글을 기고했으며, 페이스북에 ‘가랑이 사이에 방울과 육봉이 달렸다’는 남성 비하 발언을 게재한 적도 있다. 물론 그의 정체가 드러난 마당에 그의 이러한 발언들은 일종의 블랙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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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의 글은 평소에도 (과연 일상에서 여성과 제대로 마주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성성을 극단적으로 숭배하면서 반대로 남성성을 폄하하는 화법을 구사하곤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남성에 대해 잠재적인 가해자 내지는 범죄 공모자 등의 혐의를 씌웠으며, 특히 남성은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할 줄 모르는 결함투성이의 존재로 묘사하는 식의 화법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병적인 자기혐오 혹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선망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자아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평소 젠더문제에 대해 ‘남성의 발언권’을 부정하는 입장을 자주 내비쳤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남녀의 “몸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남성 페미니스트는 존재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흔한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장이긴 하지만 최지혜라는 가면 뒤에 연기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전면부정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출처 최지혜 페이스북

그가 명백한 ‘자기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위태로운 연기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운동권의 소외감과 위기의식

첫 번째는 운동권 출신의 소외감이다. 운동권 출신이 주류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물로 취급받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을 넘어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치닫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서도 일군의 독일 청년 좌파들이 68혁명의 열기가 식은 이후 점점 테러리즘에 경도된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박병학=최지혜의 ‘자아분열’에는 단지 흔한 운동권의 몰락으로만 정리할 수 없는 또 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의 대중화라는 현상이다. 최근의 대중적 페미니즘 신드롬은 역설적으로 진보진영의 사회 운동적인 개입 역량이 완전히 파탄 났다는 신호를 연달아 보내고 있다. 사실 메갈리아를 열심히 옹호해온 페미니즘 성향 지식인조차도 최근 난민 이슈를 둘러싼 넷페미니즘의 격렬한 난민혐오 정서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이에 윤김지영과 같은 ‘워마드 부역자’들은 아예 그들과 같은 난민혐오 노선으로 돌아선 바 있다.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68운동

또한 최근 몰카범죄와 관련 2차가해를 일삼는 워마드와 같은 극단적인 남성혐오주의자들의 준동에서 볼 수 있듯이, 진보진영은 막장으로 치달은 페미니즘 담론의 양상에 개입할 ‘힘’을 잃었다. 그러한 개입의 서툰 시도조차 워마드 유저로부터 ‘꿘충’이라는 욕설로 돌아올 뿐이다. 특히 남성 운동권의 경우에는 ‘진보한남’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위치이다.

박병학이 이러한 상황의 괴로운 모순으로부터 눈을 돌리면서도 동시에 손쉽게 대중적 페미니즘 담론에 편승하며 마치 그들과 같은 정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려는 방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최지혜’라는, 뭇 여성으로부터 ‘걸크러쉬’를 자아내는 또 다른 여성-자아를 연기하는 것 아니었을까. 물론 이미 이전에도 그의 정체를 눈치챈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연기에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성별 분리 프레임에 아부해온 진보담론

한편 성별 분리 프레임에 대해 무비판적인 진보의 담론적 지형도 박병학이 최지혜라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진보진영은 젠더문제에서 위선적이고 날조된 자기고백 외의 남성 측의 발언권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남성이 부당한 공격에 대해서마저 침묵을 강요당하는 게 ‘정의’인 양 처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특히 이러한 경직된 태도는 이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이 공통의 문제의식과 경험지평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회적 상상력 자체를 심각하게 제약하고 말았다.

이같은 성별 분리 프레임에 굴복해가는 과정은 점차 각자 자신의 사적인 피해의식과 원한 감정에 탐닉하는 이른바 ‘정체성 정치’에 진보가 굴복해온 과정과 다르지 않다. 특히 이것은 사회운동 자체의 이론적·실천적 오류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논쟁 그리고 반성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앞서 설명했듯이 메갈·워마드 류의 남성혐오 및 인종주의 성향에 제동을 가할 역량마저 상실하게 했다.

일례로 혜화역에서 난무한 워마드 몰카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 구호와 피켓들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제기하지 않는 페미니즘 운동은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능을 이미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워마드의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

시민적 공동성이 부재한 선민의식

이처럼 정체성 정치에 매몰되며 계층 간의 상호분리를 강화하는 경향은 남성·여성, 장애인·비장애인, 청년·중장년층 등 서로 다른 계층 사이의 시민으로서 공통의 정체성을 환기하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해외에서도 성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등의 특정 정체성의 경험과 지엽적인 생태이슈에 매몰된 정체성 정치가 유행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진보정치의 대중적 외연이 축소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시대성’을 공유하는 것과 별개로 한국의 경우에는 나름의 담론적 후진성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체성 정치는 말로만 ‘시민적 공공성’을 외치지만 실은 ‘지사적 선각자’의 위치에 담론적 특권을 부여하는 전근대적 후진성과도 기묘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동료 시민들을 공통의 대의에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깨어 있음’을 더욱 강조하고 ‘훈계하는’ 어조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담론지형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실제 박병학의 언행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선민의식이 엿보인다. 그러한 선민의식은 남성 대상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무한도전 시청자, 평범한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군복무자 등 그 누구라도 페미니즘 사상에 입각한 가차 없는 비평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다수를 일방적으로 한심한 인간들로 규정하고 낙인찍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의 추구만 존재하지 도대체 이것이 어떠한 어젠다로 이어지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근대시민의 태도라기보다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도덕주의적인 태도 혹은 종말론적 복음주의(evangelism)를 설파하는 보수 기독교계의 태도와 대단히 유사하다.

무한도전 종영 감상평(출처 최지혜 페이스북)

병증을 키운 책임의 팔할은 진보언론

문제는 아무런 검증 없이 래디컬 여성 페미니스트의 목소리인 양 지면에 박병학=최지혜의 발언을 지면에 실었던 언론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슬로우뉴스>는 물론이고 <허핑턴포스트>에도 장기간 연재했다. 이뿐만 아니라 박병학=최지혜가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의 운영자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상황에서 그와의 무려 ‘페이스북 메시지’ 인터뷰를 진행한 <한겨레>도 비판의 논외가 될 수 없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이 실린 <한겨레> 토요판

박병학의 최지혜 연기는 단순한 해프닝 이상의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자아분열은 성별 분리 프레임, 시민적 공동성의 상실, 사회운동의 무기력화, 남성혐오 경향에 대한 아부 등 진보진영이 만든 왜곡된 담론 프레임과 지형을 반영한다.

박병학이라는 인물 자신이 병적이라기보다는 남성 페미니스트조차도 자신을 여성으로 ‘상상’해야만 비로소 여성의 대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 지금의 상황이 병적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 진보진영 내 시민적 공동성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징후이다.

이처럼 언뜻 보면 희귀한 해프닝처럼 보이는 현상 배후에는 대중적 정치의 실패, 상처 입은 자아에의 우울증적 몰입, 자기모순과 혼란 등등 진보진영에 만연한 현실적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누가 이러한 병증을 키웠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