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농담 같은, 익숙한 고통 같은 ‘사랑’

[리뷰] 영화 <위크엔드 인 파리>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요즈음 필자의 조카는 학교에서 가족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어요. 얼마 전 카톡으로 사진이 한 장 전송됐는데 조카의 삐뚤빼뚤한 그림체와 글씨체에 집중할 때면 늘 그렇듯 빛이 오른 눈동자, 앙다문 입술, 이마에 맺힌 땀방울, 주먹 쥔 손아귀의 안간힘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던 색종이 카드였어요. 한참 바라보다가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란 이름 뒤에 “숨겨둔” 역할, 책임, 감정 등을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은 나와 동행할 그것들에 대해.

오늘 나눌 영화는 그렇게 오랫동안 동행해온 이름에 걸맞은, 노부부의 사랑이 담긴 영화 <위크엔드 인 파리>입니다.

영화 <위크엔드 인 파리> 포스터

두 사람은 영국 버밍엄에서 프랑스 파리로 결혼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데요, 일단 두 사람의 관계는 훈훈해 보여요. 남편 닉의 자주 잃어버리는 습관을 아내 멕이 잘 도와주고, 닉은 그런 멕에게 의지하죠.

호텔에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투덜대는 멕이나 같은 공간을 두 시간 가까이 돌고 있는 택시의 요금을 걱정하는 닉에게는 여느 부부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흔한 다툼 외에 별다른 큰 문제는 보이지 않아요. 다투지만 곧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이나 함께 터뜨리는 웃음소리, 뺨을 어르는 키스, 가벼운 농담 같은 것들이 뒤따라 오거든요.

 

카메라는 물론 파리로 여행 온 두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는데요, 그러다 보니 그들이 안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닉은 외로움, 남 같지 않은 진지함, 해고당함, 배짱 없음, 아내가 바람피웠다는 의심을 안고 있는 반면 멕은 권태(지겨움), 불만, 분노, 흘러가 버리는 매정한 시간에 대해 안타까움을 안고 있어요.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마리화나에 찌들어 아직 앞가림하지 못하는 아들과 여유롭지 못한 자금 상황, 격변의 시기였을지언정 청춘이었던 60~70년대를 향한 그리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가 들어서 있습니다.

어느 밤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데 느닷없이 멕은 새로 시작하겠다는 말을 해요. 학교도 지겹고 이탈리아어, 피아노, 탱고나 배우겠다고요.

그게 그렇게 끔찍한 거야? 애들 다 떠나고 나면 우리 둘 사이에 뭐가 남겠어?

이에 대해 닉은 심각하지만 제법 쿨한 농담으로 반응합니다.

최소한 마지막 만찬은 당신이 사.

그런데 닉이 먼저 레스토랑을 나간 후에 멕은 음식값을 치르지 않고 레스토랑 구석구석을 헤매다 찾은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가려고 해요. 닉은 그런 그녀를 힘껏 끌어내다 뒤로 자빠집니다. 그렇게 노년의 부부가 파리의 밤거리를 달려 도망치고 있는 모습에서 마치 어린아이들 같은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언젠가 사랑에 빠져있던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과 있으면 완벽하게 어린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잴 것도 없고 척할 것도 없어. 그냥 내 안에 어떤 나를 꺼내놓아도 안심이 돼.

두 사람은 그렇게 어린아이들처럼 마냥 즐거워 보였어요. 그 모든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리고는 닉은 이미 반지가 끼워진 맥의 약지 손가락에 캔 따개를 덧끼워줘요. 정열적인 키스와 함께. 그때 닉의 후배 모건을 만나게 되는데요. 자신의 저서 출판 기념을 위한 작은 모임에 두 사람을 초대합니다.

돌아온 호텔에서 자꾸 자신의 칫솔을 쓰는 닉을 말리려다 멕은 캔 따개 반지로 또 한 번 그를 다치게 해요. 피는 났지만, 곧 괜찮아져요. 그녀는 그 대가인지 몰라도 가슴을 보여달라는 그의 청에 응하고 반대로 간밤 사라진 그를 찾아 안아달라고 청하거든요.

또 다음날에는 그의 콜라주 작업에 필요한 책들을 사주고 모건의 초대에 참석하기 전 젊은 시절에 즐겨보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춤을 따라 추고 그를 멋지게 단장시켜 주기도 합니다. 그가 그녀의 바람을 의심하기 전까진 모든 게 그렇게 괜찮았어요. 닉이 멕의 바람을 의심하던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습니다.

사랑도 죽어.

그렇게 불안한 상태의 관계는 모건의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되는데요. 그곳에서 멕은 다른 남자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아요. 제발 그러지 말라는 닉을 멕은 단호하게 단념시킵니다.

<위크엔드 인 파리> 한 장면

모건은 모임에 참석해준 지인들에게 간단하게 인사말을 전하는데요, 그 끝에 자신의 훌륭한 친구 닉에게서 젊은 시절 받았던 영향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며 공을 돌려요.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숨길 수 없는, 남 같지 않은 진지한 성격의 닉은 진실을 바로 잡아요. 자신은 해고를 당했으며 온종일 TV 보는 것을 낙으로 삼는 아들이 있고, 몸은 여기저기가 쑤시고, 늘 불안하며 특히 오늘 밤 아내는 자신을 따돌리고 다른 남자와 있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전 지금 창밖으로 떨어지는 상태입니다. 영원히요. 제 인생은 확실하게 족친 인생입니다.

닉으로부터 발언권을 넘겨받은 멕의 다음 말은 두 사람의 결혼 기념 파리 여행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습니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요. 친구랑 있었는데 제 폰이 울렸죠. 전 전화 건 사람과 통화를 했고 끊고 나자 친구가 묻더군요. ‘누구야? 숨겨둔 애인이라도 돼? 전화 받는데 너무 반가워하고 웃음이 끊이질 않던데.’ 전 놀라서 ‘무슨 말이야? 남편이었는데’ 했죠. 남편이었어요.

다시 돌아온 호텔에서 그들은 체크아웃 당해요. 한도 초과의 카드, 객실 기물 파손 및 부과된 세금이 그 이유죠. 레스토랑에서처럼 도망치던 그들을 막아 세운 직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합니다만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예요.

둘은 또 그대로 나가버려요. 그 심각한 상황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그럼에도 값어치 있는 경험이었다는 것, 생애 최고의 여행이었다는 것이에요. 서로에게 어깨와 머리에 기댄 채 모건을 기다리던 그들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춤을 추며 함께 했던 청춘의 시절로 돌아가는 장면이 영화의 엔딩씬입니다. 하이라이트 장면일 텐데요.

제게 있어 하이라이트 대사를 꼽자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찾고 싶다던 멕이 간밤에 사라진 닉을 찾아 안아달라고 했을 때 닉이 답한 대사

그래, 나 여기 있어.

와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던 멕에게 데이트 신청한 남자가 답한 대사에요.

얼마나 멋져요? 자신의 불행이 그토록 익숙하단 거요.

바로 여기 있다는 것, 그토록 익숙하다는 것. 고통은 행복이나 성공과 달리 늘 우리 편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내게 꼭 붙어있는 그 약점들마저 안고 가겠다는 의지이죠. 심각한 상황도 농담처럼 만들고 아픈 고통도 익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져 강한 그것, 사랑은 그런 것이죠. 닉의 영웅이었던 베케트가 말했듯 단순히 주고받는 것, 그 이상의 것이죠.

조카의 서투른 글씨가 반듯해지는 날이 올 때까지, 어쩌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날이 올 때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이름 뒤에 “숨겨둔” 가치들을 일부러 모른 척하지 않는, 그것들과 동행해야 할 삶 속에서 심각한 고통에 엄살로 호소하는 대신 익숙한 농담으로 웃어넘기는, 언제나 강한 사랑의 힘에 기대는 어른이자 사랑하는 조카들의 이모가 되길 바라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