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국어 교과서가 아이들 망친다

국어 선생의 넋두리

중학교 국어교사로서 27년을 살고, 정년퇴직했다. 선생 노릇 하면서 품었던, 국어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소회를 여기 조금만 풀어놓는다. “누구는 저런 생각도 했구나” 하고, 독자 여러분의 ‘학교공부 기억’과 견줘 보시라는 뜻이다.

필자가 어려서 머릿속에 품었던 ‘국어 선생의 상’은 좀 낭만적이었다. 중학 1년 때 국어 선생은 시조가 얼마나 훌륭한 문학양식인지, 침을 튀기며 강의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1한테는 멋진 모습으로 비쳤다. 고등학교 가서는 주시경 선생의 손자분께 고문을 배웠다. 한복을 입고 늘 교단에 서신 그분 뒤로 할아버지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대학에 들어가 그 무렵 막 싹트기 시작한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고서는 ‘교육자의 길’에 대해 윤곽이 잡혔다. 왜 교사가 주입식 교육을 거부해야 하는지, 파올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에서 우리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치열한 사회운동가로서 교단에 서야만 ‘인간해방 교육’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현실과 이상 사이는 까마득히 멀었다. 프레이리가 브라질 농민과 만났듯이 그렇게 사회정치적 대화를 나이 어린 학생들과 나눌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이라면 또 모를까, 더 어린 중학생만 줄곧 상대해온 선생한테는.

 

주어진 교과서를 갖고서, 딴 선생들이 출제하는 (판에 박은) 시험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가르쳐야 했으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해방교육’은 그럴 틈이 날 때, 게릴라가 튀어나오듯이 잠깐 선보일 수 있을 뿐이다.

국립한글박물관

두 시절을 구분해서 말해 보자. 21세기 들어 교육과정이 크게 바뀌기 전과 뒤. 그 전의 국어교과서는 ‘주먹구구’로 만든 것이었다. 이를테면 (책에 수록된) 글마다 끝에 ‘낱말 익힘’ 문제를 달아놨는데 무슨 기준에서 그 낱말들을 익힘문제로 뽑아 놓았는지 알 수 없다.

전 교과의 어휘력 함양이라는 체계적 문제의식 같은 것이 그때 정부에 있었을 리 없다. 아마 교사들 대부분이 수업에서 그 대목을 건너뛰었을 것이다. 시험에 출제 안 되므로 그래도 됐다.

필자가 교과서 구상의 전권을 갖는다면 (지금은 비중이 축소돼 중학교에서 한 학년만 배우는) 한문교과를 국어교과로 통합하고 ‘(한자 익히기와 결합해) 낱말공부 부교재’를 수업 일부로 배치하고 싶다. 학생들 어휘력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므로(생물, 역사 교사들이 많이 체감함), 교과들 전체에서 배울 낱말들을 체계적으로 익히게 해줄 부교재가 몹시 긴요하고 도구 과목으로서 국어교과가 그 문제를 떠맡아야 한다.

딴 교과서들도 ‘기본 낱말’들에 대한 풀이를 교과서에 싣는 게 좋다. 가령 사회 교과서는 ‘사회(society)’나 ‘경제(economy)’의 어원을 소개한다. ‘어원 알기’는 근대주류 경제학 비판의 실마리가 된다.

옛날 국어책은 재미없는 글이 너무 많아서 가르치기가 힘들었다. 이를테면

무궁화꽃이 우리 나라꽃이므로 그 특징을 잘 알아두라.
한국의 정자는 이런저런 멋이 있다.

선생도 흥미 못 느끼는 얘기를 아이들한테 억지로 쏟아붓는 격이다.

‘설명문·논설문 읽기 공부’를 하기에 알맞은 글감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어떤 글을 읽힐지, 선생들한테 맡겨 놓으면 안 됐을까. 상상해 본다.

‘일베’와 ‘메갈리아·워마드’를 둘러싼 온갖 논평들을 잘 추려서 중딩이 고딩이들한테 읽히는 경우를. 아이들은 대번에 흥미를 느끼고 갑론을박의 마당에 뛰어들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혐오와 차별이 뭔지, 그 낱말 뜻과 실상을 하나씩 알아가지 않을까.

옛 교과서에는 어법에 어긋나는 오문도 더러 있었다. 오문은 아니라도, 글을 간결하게 서술했더라면 훨씬 쉽게 읽혔을 대목도 많았다. 그랬더라면 공부에 취미를 못 붙인 학생들의 ‘학업 실패’도 줄였으리라. 교과서 제작진들한테 이오덕 선생을 비롯해 ‘우리말 바로쓰기’ 실천을 해온 분들의 노력이 가닿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영혼 없는 국어책

21세기 들어, 새로 개정된 국어책은 민주화와 학문발달의 성과를 반영해 좀 나아졌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이 실리고, 김수영의 시 ‘풀’, ‘폭포’가 대학입시에 출제됐다.

중학교 국어책에는 어떤 글을 읽기 전에 제 ‘배경지식’을 먼저 떠올리고, 글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라고 일러주는 ‘길잡이 글’이 실렸다. 교과서가 ‘주먹구구’에서 좀 벗어난 셈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지음 / 이성과 힘 출판)

새 커리큘럼(7차 교육과정)이 안고 있는 문제가 가볍지 않다. 새 책은 “학생들의 언어 기능,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실력을 제대로 키워 주겠다”고 선포했는데 과연 그 책이 명실상부한지, 유명무실한지 따져볼 구석이 많다.

한때 ‘듣기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경청하며 듣기’ 단원까지 집어넣은 적 있다. ‘왜 남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지’ 깨치는 것이야 정말 중요한 인문학 공부다. 그 깨우침을 주려면 그 지혜를 더 자상하게 전해주는 명문을 실어야 한다.

그런데 그 깨우침을 얻는 것이 ‘듣기 연습’은 아니다. 세상에, 그런 듣기 연습은 저마다 스스로 할 일이지 누가 시켜줄 일일까. ‘접영·배영 동작’을 설명해 놓은 체육책을 읽는 것이 ‘수영 연습’은 아니지 않은가.

교과서는 이런 초보적인 사실마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단원은 ‘너무 나간’ 것이다 싶었는지 나중에 빠졌지만 ‘듣기 단원’ 전체는 여전히 있는데 그 교육학적 타당성을 누구도 따진 것 같지 않다(외국인의 한국어 시험도 아니고, ‘수능’에 국어 듣기 문제를 집어넣어야 할까).

“기능을 익혀라” 이것이 무슨 주의일까. 기능주의다. 교과서가 이것을 기조로 삼다 보니, 문학 공부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뿐 아니라 ‘수능 대비’가 학교수업의 주종을 이루다 보니, 그것마저도 ‘문제풀이’ 위주가 됐다. 시인들이 너나없이 혀를 차는 것이 시를 ‘문제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 아닌가.

곰곰이 따져 보자. 국어 수업이 사실상 베풀 수 있는 것은 읽기 공부와 약간의 쓰기 연습 아닐까. ‘말하기·듣기’는 학교 커리큘럼과 활동 모두를 통틀어 ‘그 능력의 함양’을 조금 배려할 수는 있어도(가령 동아리 활동이나 토론대회의 개최), ‘국어 수업’을 통해 따로 길러질 공부가 못 된다.

삼척동자도 직관으로 헤아릴 이 판단이 ‘기능 쟁취(!)’에 눈먼(!) 전문 학자들 머리에는 안 생기는 모양이다. 자기 학문의 상표(브랜드) 가치를 고수하려면 저희 허점을 외면해야겠지.

이 브랜드, 미국에서 수입해 왔다. ‘경쟁에서 살아남을 능력’을 귀 따갑게 부르짖는,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시대에 그 조바심으로 고안해낸 것이 이 브랜드다. 필자는 ‘원조 기능주의’인 미국 초중고 국어교과서가 어찌 구성돼 있는지 좀 궁금한데, 필자의 짐작으로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재미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문장형식’별로 글쓰기를 시킨다는 얘길 흘낏 들은 적 있는데 그것, 정말 무미건조한 학습이 아닌가. 그것, ‘인간 해방을 북돋는 글쓰기’와는 한참 동떨어진 것 아닌가. 실용적 기능을 익히는 데는 얼마간 도움이 될지 몰라도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중략)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도종환의 <어릴 적 내 꿈은>

그런 시간과는 한참 동떨어진 국어 수업! 거기서 ‘인문학의 눈’은 틔워지기 어렵다.

교과서를 크게 바꾸는 것이 진짜 교육개혁이다

세상일은 무릇 숲을 볼 줄 알아야 나무도 보인다. ‘진보 교육감’의 시대라지만 왜 학교 교육이 여전히 답답한가. 필자는 심호택 시집 <하늘밥 도둑>을 읽다가 번개처럼 눈앞을 밝히는 시를 하나 만났다. 70년 전(곧 해방 직후), 시인이 제 어릴 적 이야기를 떠올린 시다.

천자문 첫머리 거기 벌써
하늘 따의 이치 두렷하거늘
눈 있거든 보아라 국정교과서라는 물건
바둑아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이게 공부더냐
쥐소리 새소리 가르치고 돈 받는 곳
학교라는 곳
이래도 도적놈의 소굴이 아니더냐
내 자손은 거기 아니 보낸다
어림없다 내 밑에 두고 글 읽혀
공맹노장 주역팔괘
호풍환우 하는 법까지 가르칠란다
냉중에 보아라
대학에서 모셔 간다
선생으로 모셔 간다
할아버지 눈에 흙 들어가기 전
도적놈의 소굴에 자식 한번 넣어 보겠다고
독한 마음 먹고
어머니는 그 쇠고집 앞에 감히 나아가
굽어살펴주세유 아버님
그러시다가 손자 하나 있는 것
병신 맨들면 어쩌시려구 그러십니까
아버님 아버님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린지
나는 생판 알다가도 모르겠는데
– 심호택의 <도둑놈 소굴>

학교 공부가 청소년의 배움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수학·(자연)과학 공부는 요긴할 수도 있겠지만 딴 교과 공부는 말짱 작파해 버리고 독학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교과서들을 밀쳐버리고 벗들과 함께 좋은 책, 스스로 찾아 읽는 쪽이 더 나은 공부법 아닐까.

‘교육개혁’을 말하려거든 (특수목적고를 없앨까, 말까 제도 개혁에만 골몰할 일이 아니라) 교과서가 과연 제대로 돼먹었는지, 널리 비판의 소리를 모아 공론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 ‘국가 교육과정위원회’를 대대적으로 열어서 한 달이고 1년이고 대중토론을 벌여야 한다.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진보교육’은 머지않아 퇴보교육으로 둔갑해 버린다.

하나고는 2010년 하나금융그룹의 학교 법인인 하나학원이 설립한 자율형 사립고다

필자의 어릴 적은 시조 가락이, 산수를 읊은 박목월의 <순수시>가 참 감미롭게 다가왔지만 요즘 국어 시간에 시조와 청록파의 시를 자세히 가르칠 까닭은 없다. 그거, 문화적 감수성을 뚜렷이 일깨우지 못하는 흘러간 옛 문학임이 사실이다.

19~20세기 문학을 자세히 소개해줄 가치도 크지 않다. 요즘 현대 사회가 얼마나 어두운 전조를 띠고 있는지 잘 아는 우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이광수의 <무정> 같은 얄팍한 근대 예찬에 귀 기울일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필자가 젊어서 심취했고 자세히 알았던 문학이 모조리 세월의 격류에 휩쓸려 가고 ‘수업 현장’에서는 그 공부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쓸쓸하기 그지없다.

학생들은 문학을 그저 ‘수능 점수따기’에 필요한 만큼만 억지로 주워섬기고, 문화생활은 ‘빅뱅’과 ‘방탄소년단’과 ‘트와이스’ 또는 웹툰, 웹 연애소설에만 오로지 꽂힌다면 ‘국어(문학) 선생’의 설 자리가 어디란 말인가.

물론 교사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시의성 있는 공부 거리를 학생들과 나눌 수도 있다.

방탄소년단이 왜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을까? 칼군무 뿐 아니라 ‘인생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 비결이겠지. 결국 좋은 문학은 널리 공감을 얻거든. 아이유의 ‘제제’를 둘러싼 소아성애 비판은 과연 근거가 있는 얘길까?

하지만 학교교육이 기존의 ‘문학 유산’들을 제대로 학생들한테 전달하지 못한다는 잘못(무능력)은 그대로 남는다. 옛 문학은 다 잊혀도 좋은가. 빅데이타 시대의 젊은이들은 SNS에 떠도는 엄청난 정보를 흡입하는 것만도 바쁘기 때문에? 그것은 위험천만한 야만이다. <해리 포터>는 옛 유럽 문학의 유산 위에서 비로소 꽃핀 것인데? 빅데이타가 실은 허접쓰레기투성이라면 어쩔 셈인가.

(고교) 교과서는 <박씨부인전> 같은 케케묵은 소설을 실어서 사태를 악화시킨다. 잘못된 한가로운 접근법이다. 그 이야기에 담긴 그 시절 대중의 욕망(=병자호란의 치욕을 상상적으로 해소하기)을 아이들더러 공감하라 하면 정말 번지수를 잘못 찾은 소환장이 아닐까.

차라리 <홍길동전>과 <전우치전>과 <수호지>를 두루 묶어서 ‘무협 소설에 담긴 세상 읽기’를 해보라. 중딩이 초딩이도 재미있어한다. 그 공부가 웹툰 만화작가도 더 많이 키워낼 것이다.

심청이가 과연 효녀였을까? 혹시 불효녀 아닐까?

중딩이 초딩이한테 질문을 던져 보라. 그거, 지적 호기심을 물씬 자아내는 커다란 공부거리다.

시조와 옛 한시들도 케케묵은 것으로만 여기지 마라. 생태계의 위기를 짚고 문명의 전환을 꾀할 필요성을 찾는 공부와 연결해서 감상한다면 아이들한테 생생한 일깨움으로 다가갈 수 있다. 시조는 참 느려터진 가락이지만 ‘느리게 걷자!’는 구호는 초현대적인 구호가 아닐까.

세계화된 시대에 ‘문학’의 범주는 한국문학에 가둘 일도 아니다. 노신의 작품<아큐정전>이나 그리스 비극, 카프카의 문학도 다룰 수 있을 만큼 다뤄야 (학생들의) 세상 보는 눈이 뜨인다. (고교) 윤리 교과서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을 소개하고 있는데(이것, 난민의 시대에 요긴해졌다), 문학도 걸음걸이를 그 수준으로 맞춰야 하지 않을까.

발본의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필자는 제자들한테 별다른 감명을 주지 못한 무기력한(또는 ‘경쟁력’ 없는) 교사였다. 이따금 퍼포먼스를 벌이거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호감을 샀을지는 모르지만 ‘수업’이 감명을 주기는 참 어려웠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수행평가’가 생겨난 것이 수업에 다소 ‘숨구멍’을 틔워주기는 했지만, 공부의 새로운 방향을 (학생들한테) 일관되게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전에 쿠바에 다녀와서 ‘진짜 교육개혁’의 힌트를 얻었다. 거기 중고교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교사가 (초등학교처럼)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는 쪽”으로 학교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다수 나라처럼 1교시는 어느 반, 2교시는 어느 반. 보따리장수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반만 맡아서 온종일 그들과 씨름한다.

엄두를 못 낼 일일까. 쿠바는 실행하고 있었다. 다만 ‘전 교과 떠맡기’는 부담스러웠는지 한 반 30명의 수업을 두 명의 담임교사가 절반씩 나눠 맡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단다.

학생들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또 ‘윤리적인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고 치자. 1주일에 두서너 시간 들어와 ‘주어진 내용’만 요령껏 가르치는 교사가 학생들한테 그런 지적·도덕적 격려를 넉넉히 베풀 수 있을까.

소설을 가르치면서 ‘역사’를 끌어오거나 ‘과학’을 인용하면 아이들은 “선생님, 진도 나가요!”하고 조른다. 왜 선생이 역사와 과학을 말하면 안 되고, 문학만 말해야 하는가. 학교체제가 그렇게 기계적으로 구획을 지어주고, 학생들한테 (시험 성적을 따내라는) 급박한 성취과제를 떠안겼기 때문이다.

분업화된 학습공장 안에서 쪼가리 임무만 떠맡은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 분업을 걷어치우고, 교사가 학생과 전면적인 (배움의) 관계를 맺을 때라야 ‘교육의 실패’를 근본적으로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개혁안을 사회적 의제로 내놓기는 아직 까마득한 일이겠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자로서 위대한 신학자 바울이 권고했듯이 치열하게 살 수는 있다.

이곳에 이미 하늘나라가 찾아온 것처럼 살아라!

학생들과 1주일에 두서너 시간밖에 못 만나는 사이이지만, 필자는 그들과 종일 얼굴을 맞대는 것처럼 (그런 발본의 교육개혁이 이뤄진 것처럼) 살 수 있다.

수업시간에 주로 국어 공부를 시키지만, 필요하면 ‘진화론’과 ‘엔트로피 법칙’을 설명하고 학생들과 ‘빅데이터의 쓸모와 위험’, ‘메이커운동의 절실함’, ‘남녀 혐오문화 극복’, ‘한반도 평화실현의 과제’를 언제든 토론할 수 있다. 물론 피교육자들한테 늘 배울 태세를 갖추고서 말이다.

자기 성찰이 간절한 시절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저도 몰래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될 생각은 않고 정치인 문아무개의 ‘팬’으로 살아간다. 문화의 주체가 될 생각도 없고 방탄소년단의 팬 노릇에 만족한다.

여성이 겪는 사회적 어려움을 통해 딴 사회적 약자들을 공감하는 눈을 틔울 생각은 않고, 오로지 여성을 홀대하는 현실을 원망하기 바쁘다. 우리는 지금, 이 시절에 무엇을 서로 배워야 할까. 김수영 시인을 불러오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중략)
–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