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이 된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의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 - <촉·감> 한국 문단과 여혐> 기사를 보자.
먼저 인터넷에서 널리 비난받았던 맥심코리아 표지가 이미지로 뜬다. ‘여성살해’를 희화화했단 취지로 비난받았다는 이 이미지는 글에서 비난하는 현상과 어느 정도 상관이 있을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이다. 글 내용을 모두 분석하고 보면 과한 유비로 보인다. 막상 읽어보면 글 내용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 익명의 청탁권력(?)에 대한 고발
- 그 익명 시인의 시의 ‘여성 혐오적’ 성격에 대한 고발
- 김현 시인의 문단 내 성차별 고발에 대한 소개(‘개새끼’ 비난에서 ‘여성혐오 범죄 기록물’ 제안까지)
류근 시인이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이에 대해 류근 시인이 이 익명의 시인이 자신임을 드러내고, 자신이 청탁을 한 건 아니라는 의견을 페이스북에 표명했다고 한다.
류 시인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 부적절했다는 비판은 오직 처세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류 시인의 억울함에 일리가 있다면, 그 기사를 방치하란 요구는 1) (익명 시인이 류근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때엔) 자신의 이름에 먹칠이 가는 것을 방관하라거나 2) (익명 시인이 류근임을 쉽게 유추할 수 없을 때엔) 익명으로밖에 쓰일 수밖에 없었던 장난질을 묵과하라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류 시인의 ‘본인 인증’ 자체엔 탓할 바가 없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론 다른 맥락이 있다. 류 시인의 ‘본인 인증’이 그의 약소한 팬덤을 움직여 황 기자를 공격했다는 정황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죽이니 살리니 하는 원색적인 용어가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류 시인이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거나, 적어도 자제를 요청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황 기자가 자신의 기사의 인터넷 파장을 모두 예측할 수 없었듯 이는 류 시인에게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나는 이와 같은 예상하지 못한 일의 파장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류 시인은 슈퍼스타가 아닌 데도 그 약소한 팬덤으로 황기자 개인을 충분히 괴롭힐 수 있었다.
가령 메갈리아 등에 온정적인 이들은 그들이 사회적 약자라고 반박하기 이전에 그 사회적 약자들의 집합이 충분히 일개인들을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숙고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혹자는 팬덤 반응의 부적절함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들이 황 기자를 비난하는 내용에 도를 넘은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거야 그렇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의견은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널리 통용되는 논점이탈이다. 어떠한 글이 논쟁적인 사안에서 한쪽 편을 들면 악플은 달리기 마련이다.
그 글이 얼마나 완성도가 있는지 혹은 얼마나 부실한지 아닌지와는 상관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악플의 부적절함을 쳐다보며 글쓰기를 옹호한다면 우리는 논쟁적인 글쓰기의 완성도에 대해서 할 말을 잃게 된다.
다만 “‘내가 싫어하는 그들’을 자극한 글은 언제나 옳다”란 식의 도그마에 빠지게 된다.
다시 위에 정리한 글의 구조를 보자. 이 글의 구조는 어째서 이러한가. 설명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한국 문단의 여성혐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므로, 황수현의 기사는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뭉뚱그리기 어렵다.
논점 2)는 (익명으로 처리한) 류근의 시의 ‘여성 혐오적’ 성격을 비평하는 내용이다. 정당하다. 그러나 이걸 논점으로 삼으려면 여러 사람의 시를 실명으로 언급했어야 했다.
행여 이번 주에 류근이 특히 미울 이유(그게 아마도 1)일 테지만)가 있었다고 해도 류근 한 명이라도 실명으로 했어야 했다. 그래야 반론도 가능하고 논의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평’의 영역이다.
‘고발’인지 ‘비평’인지 도통 의도를 모르겠다
그런데 이 글은 이상하게도(!) ‘고발’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리고 이 ‘고발’이 정당하려면 1)의 상황이 심각한 것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류근의 항변을 들어볼 것도 없이 이 글만 봐도 1)의 상황은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해당 논점을 반영한 글의 도입부를 보자.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
지방에 출장 가 있는 동안 한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최근 시집을 낸 시인은 한국일보에서 자신의 시집 기사를 쓰지 않은 것에 서운함을 토로했다고 했다. 읽은 시집이다.
그러나 나는 시집에 대한 기사를 쓰지 않았을뿐더러 토요일자 신문 맨 뒤에 시 한 편씩을 소개하는 ‘주말의 시’란 에도 싣지 않았다.
여기 어디에서 기자가 느낀 ‘압력’이 전달되는가? 그저 ‘불쾌감’만 전달될 뿐이다. 직접 통화를 한 것도 아니니 글에 쓰지 않은 여타의 맥락을 짐작할 여지도 없다. 녹취록 따위도 없을 것이다.
사실 위 서술만 본다면 기자 스스로가 이 익명의 시인에 대해 ‘권력’의 이미지를 전달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찌질함’의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노력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도출된다. 대체 이 얘기는 왜 하는가? 이게 공적인 가치가 있는 얘기인가? 만약 한국 문단의 모종의 현실에 대해 꼬집는 취지라면, 왜 한 사람을 특정해서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굳이 한 사람을 특정하려고 기사 본문에서 그렇게 애썼다면, 왜 이름은 굳이 가렸는가?
논점 1)은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란 제목을 구성한다. 물론 제목이야 편집부에서 뽑았을 것이다. 아마도 기자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쪽은 부제인 ‘한국 문단과 여혐’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 하더라도, 논점 1)은 ‘한국 문단과 여혐’이란 주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저게 심각한 청탁의 문제도 아니었다면, 왜 이 글의 도입에 등장하는지 알 수가 없다.
논점 3) 역시 비슷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황 기자가 소개한 김현의 분개 중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그가 거기서 본 것은 여자 시인들 이름을 열거하며 “따먹고 싶은 순으로” 점수를 매기는 남자 시인들, 동료 여자 시인에게 “걸레 같은 년”이라고 욕하며 스스로 ‘명예 남성’을 자처하는 여자 시인들이다.
“아 저 개새끼가 말로만 듣던 그 개새끼구나. 술에 취하면 여자 시인들 아무한테나 걸레 같은 년이니, 남자들한테 몸 팔아서 시 쓰는 년이니 하는 바로 그 개새끼로구나. ‘술이 죄지, 술에서 깨면 사람은 착해’라는 말을 들으며 점점 개새끼가 된 그 개새끼구나.”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가) ‘여성 혐오적 문학작품’과 나) ‘여성 혐오적 삶의 행태’는 논리적으로 별개다. 그게 어떻게 별개냐 ‘광광 우럭’하기 전에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첫째, 여성 혐오적 시를 쓰는 시인이 술자리에선 조용한 인물이란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는가?
둘째, 술자리에서 온갖 진상질을 부리는 이가 문학작품이나 기고문에선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광경을 상상할 수 없는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가)와 나)는 어떤 문맥에서, 큰 틀에서 묶어서 비평할 수 있을지언정 논리적으론 별개다.
어떻게 해석해봐도 논점이 정리가 되지가 않는다
심지어 윗글에서조차 그렇다. 다시 논점 세 개를 고발하려는 대상을 따라 정렬해보자.
- 청탁권력 류근
- 여성 혐오적인 류근의 시
- 김현이 고발한 ‘술자리 개새끼’
여기서 1)과 3)은 실제의 류근과 상관없다. 적어도 윗글에서는 그 상관 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1)에 대해선 본문만 봐도 류근이 서운함을 토로했을 뿐 딱히 권력적 처신을 했다고 보기 어렵고, 3)에 대해선 일단 글로 봐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그냥 갖다 붙여놓았다.
하지만 글을 저렇게 쓰면 사람들은 대체로 저 익명의 시인이 ‘엄청난 청탁권력’이며, ‘술자리 개새끼’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어서 저렇게 칼럼을 쓴 것으로 여기게 된다. 글을 이렇게 써도 되나?
이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가 있다. 사실 글을 꼼꼼히 읽는다면 논점 2)와 3)이 따로 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논점 1)과 2)는 ‘여성혐오’로 묶이진 않지만 한 사람의 에피소드다. 논점 2)와 3)은 ‘여성혐오’로 묶이긴 하지만 각각 한 사람의 에피소드와 한국 문단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적한 것이다.
더구나 ‘한 사람’과 ‘문단 전체’라는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앞서 지적했듯 ‘작품의 여성혐오’와 ‘삶의 여성혐오’란 별도의 범주에 대한 지적이다. 글 자체로는 류근과 ‘술자리 개새끼’를 연결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독자가 오해하면 무조건 필자의 잘못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통용되는 요즘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 이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선의적으로 봐준다면, 이 글은 한 마디로, 다만 문제의식만 인정될 뿐 너무 성긴 글이다. 그런데도 문제의식만 올바르면 옹호할 수 있을까. “한국 문단의 여성혐오 조류를 비판한 글로 보면 되지 왜 광광 우럭하냐?”라고 반응해도 될까.
류근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어떤지와 상관없이 황 기자조차도 류근의 술자리 사생활을 폭로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건 너무 위험하고, 대체로 공적인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논란을 일으킨 <한국일보>의 기사는 비평이 위치해야 할 곳에 고발을 놓았다.
그리곤 그 고발이 사실이 아니라는 당사자의 항변을 듣자 ‘여성혐오’에 문제의식을 느꼈다는 다른 이들이 그저 비평으로 들어달라고 변명을 한다.
그리고 류근이 억울한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는 그저 논점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래도 될까.
매체가 매체답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이 글을 공적인 문제의식을 살려서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글이 그중 어떠한 길도 가지 않은 것이 참으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 제기가 ‘여성혐오’ 비판이나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그 쉽지 않은 문제를 다루는 언론의 역할에 대해 상기해보는 기회가 되기만을 참으로 바랄 뿐이다.
생각해보자. 이렇게 지면 기사가 고발인지 비평인지 모를 글을 올리고 논란이 되니 SNS에서 류근의 시의 구절구절을 올리면서 ‘여성 혐오적’이라고 난도질하고 있다. 매체가 해야 할 비평을 대신하고 있다고 믿을지 모르나, 역시 일종이 조리돌림이다.
SNS란 매체의 성격상 어쩔 수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지면은 ‘고발’과 ‘비평’을 더욱 구별하고, ‘고발’할 일이 아니라면 ‘비평’의 자세로 문학작품을 대했어야 한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여성혐오’란 단어가 다른 나라에서 그런 방식으로 형성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마치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것마냥, 언론의 영역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SNS의 분노한 대중의 아가리에 밀어 넣을 땔감들을 골라내느라 바쁘다.
SNS가 주인이고 언론이 하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럴 거면 페이스북과 트위터만 있으면 되지 매체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간 한국 페미니즘 진영은 한국 진보 담론의 마초성 내지 꼰대성을 ‘자신들의 대의에 충실하면서 우리의 문제 제기를 억압하는 이들’이란 모습으로 정리해왔다. 그렇게 볼 소지가 있었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는다’란 문구가 보여주는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저 ‘대의’의 위치에 들어가는 것이 바뀔 때 페미니즘과 진보 담론이 어떻게 처신하게 되는지가 흥미진진하다.
진보 담론의 사건 대처는 적절할까
내가 보기에, 진보 담론은 ‘하던 대로’ 하고 있다. 그들은 ‘대의’의 영역에 ‘페미니즘’이 들어오고 심지어 그것이 대세가 되자, 역시 ‘하던 대로’ ‘자신들의 대의에 충실하면서 다른 모든 종류의 문제 제기를 억압하는 이들’이 됐다.
그리고 그 진보 담론의 방식을 맹비난하던 페미니스트들은 과거와는 다르게(사실 자신들의 영역 내에선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자) 자신들의 대의만 충족하면 무슨 종류의 문제가 발생하든 그건 별 게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광어·우럭 철도 지나고 전어·방어 철이 왔는데, 이놈의 논란은 언제까지나 이 모양 이 꼴일지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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