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후의 하여가, ‘소소한 부정’의 정당화 문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何如歌): 고려말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지은 시조. 이에 대한 정몽주의 답가가 단심가(丹心歌)라고 한다.

명절 연휴 친척 어른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나로서는 단박에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얘기를 듣게 된다.

그는 자신이 속한 작은 조직에서 회원을 챙기기 위해 소소한 부정을 저질렀던 얘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정말로 소소한 일들이다. 내가 듣기에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셨느냐고 대략 맞장구를 칠 수 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절대 소소하지 않은 세상사 부정들을 같은 원리로 승인한다.

가령 “이런 걸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아는 사람만 중용하려고 애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야···”와 같은 말들이 나온다. 갑자기 뒷맛이 쓰다.

작은 것을 승인하니 큰 것도 승인한다

생각해보면 이런 풍경은 우리 사회에 흔하다. 이를테면 조직생활을 군대에서만 경험한 예비역 병장이라도, 자기가 겪은 방식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는 단지 비웃으면 되는 문제일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자신이 행한 ‘소소한 부정’을 정당화하다가 ‘거악’을 승인하는 것은 인간인지의 차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십만원’과 ‘오십조원’의 차이를 이해한다. 그러나 그 엄청난 크기의 차이를 우리의 머릿속에서 정확하게 헤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오천만원’이 내 눈앞에서 새는 것과 ‘오십조원’이 어딘가에서 새는 것을 보았을 경우, 우리의 분노는 전자에 집적되기도 한다.

후자는 너무 추상적이지만, 전자는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리학의 영역에서 사회학의 차원으로 넘어가 볼 수도 있다.

단지 인간인지의 문제를 넘어, 지금의 우리 사회에선 더는 ‘소소한 부정’과 ‘거악’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더 문제의 본질을 직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공의 적
공공의 적

가령 강우석 감독이 <투캅스>(1993)에서 <공공의 적>(2001)을 찍던 시절엔 ‘소소한 부정’과 ‘거악’의 구별이 더 간편해 보였다.

<투캅스>에 나오는 강력계 형사(안성기)는 적당히 뇌물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타락시킨 후배 형사(박중훈)가 마약범과 결탁했음을 확인했을 때 수갑을 채우면서 “자네는 인정 못 하겠지만, 나는 그때도 형사였고 지금도 형사야”라고 얘기한다.

<공공의 적>의 주인공 강철중(설경구)은 동네 건달들에게서 물건을 살 때 값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형사지만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는 ‘절대 악’인 펀드매니저(이성재)를 만났을 때 윤리적으로 각성할 수 있었다(그는 마지막 순간에 마약범들에게 뺏어서 헤쳐 먹으려던 그 마약을 자신이 완력으로 쓰러뜨린 그 ‘절대 악’의 배때지 위에 뿌린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본인은 ‘오십만원’ 정도를 받으면서도 노태우의 ‘4천억’ 비자금을 비난할 수 있는 자기 편의적인 윤리의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관하는 세상은 그와 사뭇 다르다.

김성훈 감독의 <끝까지 간다>(2013)의 경우 타락한 강력계 형사가 더 타락한 위인을 만나며 그 사람이 하필 같은 형사란 점에서 일견 <투캅스>나 <공공의 적>과 비슷한 얘기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선균)은 더는 마약범과 대립하지 않는다. 이야기 초반에서 그가 저지르는 부정들은 더는 ‘소소한 부정’이라 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그가 파탄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고, 영화는 그가 악역(조진웅)이 모아 둔 마약상의 이득을 별다른 위험부담 없이 취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소소한 부정’과 ‘거악’이 얽혀 있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이제 그와 같은 종류의 판타지뿐이다. 하지만 판타지의 가능성은 희박해졌고 파국의 느낌만이 임박했다.

<부산행>

<부산행>(2016)에 펀드매니저(공유 분)가 등장할 때 그 직업은 더는 <공공의 적>의 악역처럼 대중에게 생소하지 않다.

또한, 그 펀드매니저는 <공공의 적>의 그 사람처럼 인격파탄자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소소한 부정을 통해 ‘좀비대란’이라는 세상의 파탄을 불러왔다고 암시된다.

세월호 참사가 바꿔버린 한국 사회의 무의식

몇 년 안 되는 시차의 두 영화가 해피엔딩에서 파국으로 변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사건은 물론 세월호다.

세월호 참사(2014)를 겪은 이후 우리는 더는 우리가 눈감은 소소한 부정들이 세상의 파탄과 관련이 없다는 말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소소한 부정’과 ‘거악’의 연결고리를 인정한 채 판타지로 주인공을 구원했던 <끝까지 간다>의 그 김성훈 감독이 세월호 참사 이후 찍은 영화를 보라.

대놓고 그 사건의 충격을 오마쥬한 <터널>(2016)이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며, 세월호 참사가 한국 사회에 남긴 각인을 증명하고 있다.

<터널>

무엇보다 김영란법이란 물건의 탄생은, 이제는 우리 사회의 제도를 입안하는 이들도 ‘소소한 부정’의 총합이 한국 사회의 ‘거악’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인간인지의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본인의 ‘소소한 부정’을 더는 ‘거악’과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나는 한국 사회의 소시민들이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았든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진실을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2014년 10월 <시사in> 369호의 <바로 그 ‘남들처럼’이 문제라니까>란 글에 실린 정신분석가 이승욱의 증언이 그 추론을 뒷받침해준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고향 친구들과 모임을 하는데, “우리가 공범이다”라는 얘기들을 해서 놀란 일이 있다. 대구에 사는 평범한 50대 가장들이었는데, “우리라고 선장이랑 달랐겠냐” “우리라고 배에 과적하는 것 막고 불법 증축하는 걸 막을 수 있었겠냐”라고 너나없이 한탄하는 거다. 이걸 보면서 세월호가 엄마들한테는 ‘굉장한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아빠들한테는 ‘굉장한 죄책감’으로 다가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부정과 비리에 눈감은 게 자기 한 몸 때문이었나? 아니다. 다 자식들을 위해 참은 거로 생각하며 살았을 텐데 그 자식이 죽어버렸으니, 가장 핵심적인 알리바이가 처참하게 사라져버렸으니…(중략)

<시사in> 369호, <바로 그 ‘남들처럼’이 문제라니까> 중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양적인 문제를 도외시한다면 사회개혁은 더욱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한 행위가 얼마나 나쁜 일인가를 논할 때 예상되는 폐해의 크기를 빠뜨릴 수는 없다.

교통법규를 어기는 것보다 세월호 화물량 적재를 속이는 것이 더 나쁜 행위다. 그리고 후자가 상당히 나쁜 행위라 하더라도, 세월호 참사 구조 상황에서의 관계 당국의 우물쭈물 만큼 나쁘지는 않다. 이런 문제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에 강우석의 영화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는 자신의 부정이 거악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본인이 저지른 부정을 고백하고, 반성하고, 적절한 수준의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낼 때야 부정이 거악과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 시대 ‘하여가’를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세월호

소소한 부정을 대하는 태도에 미래가 있다?

이는 오늘날 사회개혁을 누구보다 힘주어 말하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은 오히려 이제 ‘부정’의 상대적 크기를 평가하는 것을 포기한 것 같다. 이는 소소한 부정과 거악을 함께 정당화하는 냉소주의자의 정반대 편에 선 역편향이다.

사실 그들은 모든 부정을 단죄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노력한 결과 상대적으로 소소한 부정만을 단죄한다.

가령 그들은 우연히 부정이 드러나거나 고발당한 이들에게 앞다투어 사과를 요구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오직 그 사과의 요구에 응한 이들에게만 무제한의 단죄를 내리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본인들이 ‘부정’과 ‘거악’의 뿌리를 끊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본인들이 운동 과정에서 범하게 되는 ‘소소한 부정’에 대해선 ‘대의’란 핑계로 다른 교묘한 이름을 붙여 ‘운동’이나 ‘저항’의 방식으로 간단히 승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소한 부정’을 대하는 보수와 진보의 태도가 이러한 사회에서, 생활인들은 보수의 태도를 ‘일관성 있고 인간적인 것’으로, 진보의 태도는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는 자신들의 ‘소소한 부정’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통의 진보주의자들의 문화비평 내용과는 정반대로) 다만 사람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파국을 향해 돌진한다.

하여가를 지은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백 년을 약속했다. 그 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사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제 남은 시간은 삼십여 년밖에 없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운명은 어떤 종류의 굵직굵직한 개혁 과제의 실천이 아니라, 우리 시민 사회가 ‘소소한 부정’의 문제를 대처해낼 방법을 찾아내느냐 여부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한윤형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안티조선 운동사’(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함께 쓴 책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3년(2012~2014) 간 정치·신문비평 등을 담당했다.
a_hrima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