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찬의 리얼한 대한민국] 고려의 대몽 외교로 배우는 동북아 외교

고려와 몽골의 외교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

지난 9월 11일, KBS <역사저널 그날>은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을 방영했다. 대몽항쟁 끝에 불리한 조건을 딛고 고려가 세계 제국 몽골에 어떤 식으로 외교를 진행했는지를 그려낸 회였다.

출처 KBS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에서는 ‘우연’을 많이 언급했지만 사실 고려는 당시 최적의 타이밍에 국가의 존망을 걸었다.

몽케칸 즉위 후, 남송은 패퇴하고 있었고, 이전까지는 남송과의 연합으로 몽골을 견제할 수 있었지만 몽케칸이 남송 원정을 떠났을 때는 고려는 고립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던 시기였다.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진 후 당시의 집권자인 ‘김준’도 강화를 감히 반대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남송 정권이 풍전등화라는 것을 고려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송까지 정벌 당하면 과거 거란-북송-고려나 금-남송-고려의 삼각 구도가 아닌 몽골 중심의 일방적 패권이 형성될 위기였다. 당시에 일본은 군사적으로나 무역적으로 고려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중세 고려인들이 판단했던 국제 정세의 줄기

방송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고려가 빛나는 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동아시아 패권 구도 때문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동서 무역은 세 가지 루트가 있었다. 하나는 준가르 평원으로 오는 초원길이었고, 하나는 돈황과 사막을 거쳐서 오는 비단길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안남과 대리를 거쳐 송나라의 임안으로 오는 바닷길이었다.

돈황
돈황

동아시아의 역학 구도는 언제나 이 무역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세 가지 루트를 모두 장악하는 중화 제국은 그야말로 ‘종주국’으로서 사대정책을 펼칠 수 있었고, 루트가 분산되면 중화 제국의 위상은 약해지고 주변국이 성장했다.

고려가 조선보다 외교력이 뛰어났던 것은 다름 아닌 초원길은 거란족의 요나라가 장악했고, 비단길과 바닷길을 송나라가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비단길의 중간 지역은 서하와 위구르가 있어서 중화제국은 당나라 시절만큼 주변국에 패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었다.

이러한 기반을 토대로 고려는 언제나 ‘동북아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했고, 때로는 황제국으로서 주변국에 조공을 받았으며, 주변 지역의 왕조교체기에 꾸준히 변수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려가 다급해진 이유

몽골 제국이 패권을 확장하며, 화북을 장악할 때까지는 고려는 버틸 수 있었다. 남송이 몽골 제국으로부터 버티기만 한다면 바닷길 루트는 여전히 국제 무역의 대상이었고, 언제든 반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고타이칸 재위 시절까지는 대몽항쟁을 통해 국토가 유린당하더라도 그러한 믿음이 있었지만 몽케칸이 즉위한 후에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남송의 전략적 요충지인 사천 지방이 뚫리고, 형주 지역이 돌파당하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이었다.

고려에서도 28년간의 대몽항쟁에 지친 백성들이 몽골에 투항했고, 쌍성총관부가 만들어짐에 따라 고려 조정은 남송의 멸망 시나리오를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장용을 비롯한 문관들은 ‘강화 시도’를 했고, 무신 집권자인 김준도 이러한 국제 질서를 알았기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대몽항쟁 이야기

사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가 하나 있다. 28년간의 대몽항쟁 동안 고려를 침범한 세력은 몽골의 중앙 울루스, 즉 대칸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 말은 칭기즈칸 이후 오고타이칸, 그유크칸, 몽케칸에 이르기까지 몽골 제국의 중앙 울루스의 군대는 고려에 들어온 일이 없었다.

고려가 처음 몽골과 전쟁을 했을 때는 오고타이칸 재위 시절이었고, 이때 고려 침공을 담당했던 울루스는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인 옷치긴(Otchigin) 가문이었다.

몽골 제국도 칭기즈칸의 원정 이후 제국으로서 대칸(Qa’an)의 직속 울루스와 제후국에 해당하는 칸들의 울루스로 분봉 된 상태였다.

여기서 만주 서북부를 비롯한 몽골고원의 동쪽 지역들은 옷치긴을 비롯한 칭기즈칸 동생들의 분봉지로 나눠줬다.

이곳을 당대 몽골 사람들은 동방 3왕가(울루스)로 칭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고려를 침공한 주요 세력이었다.

즉, 고려 원정은 몽골 제국 중앙 쿠릴타이의 결정으로 내린 대외 원정이 아니었다.

대몽항쟁전승기념탑
대몽항쟁전승기념탑

몽골 제국 전체 울루스의 대외 원정은 쿠릴타이를 통해 결정되는데, 쿠릴타이를 통해서만 주요 몽골 귀족과 황금 씨족 및 소 울루스의 군사를 징발해 동원할 수 있었다.

이 말은 고려 원정은 몽골 대칸이 특정 제후국에 내린 명령이었고, 제후국인 울루스는 자신들이 가진 군사적 자율권으로 고려를 임의로 침공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몽골은 소규모 군사 편제로 고려를 여러 번 침략하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고려는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몽골 제국의 군사 동원력과 비교하면 소규모 편제로 침략을 당했지만, 남송이 멸망했을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다음에는 이러한 항쟁의 보복으로 완전히 왕조가 사라질 걱정까지 했던 것이었다.

원종과 몽골 사신단이 파악했던 몽골 대권에 대한 정보

몽케칸이 급사하고 중앙 울루스의 귀족과 황금씨족들이 이미 쿠릴타이를 통해 아리크 부케를 지지할 것이라는 대세론을 퍼트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고려 태자였던 원종이 쿠빌라이칸을 만난 것은 사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정황상으로는 매우 전략적 행보였다.

바로 중앙 몽골 귀족과 황금씨족의 군사력을 압도할 수 있는 거대한 또 다른 군사 집단의 존재를 고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옷치긴 울루스 등 동방 3왕가(테무게, 카사르, 카치운계 왕가)들의 군사력이다.

몽케칸 사후 카라코룸의 쿠릴타이는 아리크 부케를 위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한 군사력은 ‘쿠빌라이’ 휘하에 편재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는 만주 일대에서 징발된 옷치긴 가문의 군사들이 편제되어 있었다.

옷치긴 울루스 지역은 과거 ‘지두우’라고 불리는 넓은 초원 지역과 더불어 농경이 가능한 혼합 경제 지역으로 초기 몽골 제국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곳이기도 했다.

과거 요나라는 이 지역을 근거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방의 패자로 자리매김했다.

옷치긴은 칭기스칸의 가장 신임을 받는 말제로서 형제 중에서는 어머니 호엘룬과 동등한 규모의 분봉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알짜배기 지역을 분봉 받았기 때문에 옷치긴 가문은 중앙 울루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원로 가문 역할을 했다.

출처: 윤은숙 저 몽골 풍습은 말자 상속제이다. 그래서 부친의 핵심 재산은 말자에게 계승되어 전통적으로 말자계 분파들이 강력했고, 이러한 풍습은 훗날 몽골의 소(小)울루스 출신인 이자춘과 이성계의 판단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출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윤은숙 저
몽골 풍습은 말자 상속제이다. 그래서 부친의 핵심 재산은 말자에게 계승되어 전통적으로 말자계 분파들이 강력했고, 이러한 풍습은 훗날 몽골의 소(小)울루스 출신인 이자춘과 이성계의 판단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옷치긴 가문은 몽케칸 사후에도 귀환하지 않았다. 즉, 쿠빌라이칸을 수행하며, 북상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다수의 귀족과 황금씨족이 아리크 부케를 지지하더라도 실제 군사력과 경제력은 쿠빌라이가 우세했다. 그 와중에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한 것이 바로 고려의 사신단이었다.

고려가 쿠빌라이칸에게 쥐여준 작은 나라 고려의 쓰임새

쿠빌라이에게 고려 태자의 귀부는 ‘정치적 명분’이었다. 고려 태자였던 원종과 그 일행이 아리크 부케의 대세론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를 선택한 것은 이런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8년간의 항쟁과 강화, 귀부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우호적인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쿠빌라이칸
쿠빌라이칸

먼저 대칸 계승권 분쟁에서 고려는 중요한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자신이 대칸 승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옷치긴 가문을 비롯한 동방 3왕가의 후방 강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이 말은 옷치긴 울루스가 후방 걱정 없이 내전에서 총력으로 몽골 울루스로 진격할 수 있음을 뜻했다. 이것은 지극히 전략적인 상황이었다.

세 번째에는 대칸 승계 이후 고려가 옷치긴 울루스를 비롯한 만주의 동방 3왕가를 견제할 세력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대칸의 부마국이 되고, 원나라의 황금씨족 출신 왕후 사이에서 낳은 고려 왕족들은 고려의 왕족이기 전에 원나라의 황금씨족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심지어 고려는 아무런 군사적 공헌도 하지 않았지만 쿠빌라이칸이 스스로 고려 왕족으로 하여금 요동 울루스를 관장하는 심양왕으로 봉했던 이유는 강력했던 옷치긴 울루스에 대한 내부 견제였기도 했다.

고려와 조선의 차이

이러한 고려와 달리 조선은 외교 분야에서 유능함을 발휘한 사례가 적었는데, 이유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국제 정세의 대세를 변화시킬 근본적인 상황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조선도 외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북원이 존재하고, 여진이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또한 조선이 필요한 시기였다.

명나라가 비록 비단길과 바닷길을 장악했지만, 북원의 초원길은 여진까지 뚫려있었다.

다만 명나라는 북송과 달리 초원길 세력도 위협할 수 있는 오늘날의 베이징에 도읍을 정하고, 요동을 장악했기에 조선은 고려시대와 달리 지성 사대라는 것을 해야 했다.

그러나 평화를 얻는 댓가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조선은 개국 이후 임진왜란까지 국지적 침입은 받았지만, 전면전 없는 평화의 시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공 무역으로도 꽤 짭짤했던 시점이 바로 이 시기였다.

명나라도 조선과의 사대 관계가 안보적으로 유익했기 때문에 회사품으로 손해를 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누르하치의 후금이 들어섰을 무렵 잠시 잠깐 ‘북송과 고려’의 외교 관계를 떠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그때까지도 명나라는 건재했기에 상황이 더 심각해져도 금나라와 남송의 구도를 상상했을 것이다.

홍타이지
홍타이지

주전론과 북벌론이 이해가 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청나라 황제가 몽골의 대칸까지 승계되는 시점에서는 조선이 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까지도 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군사력 증강에도 눈치를 봐야 했던 시점은 바로 이 순간부터였다.

조선의 경제력이 투명하면 투명할수록 사대-조공 관계에서의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양전 사업이나 호구조사 사업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국가 재정 상황의 불투명성에는 의도적인 이유도 있었다.(그 부작용은 결국 백성들이 짊어지게 된다)

또한 이미 청나라와 일본 이외의 교역 상대는 없으므로 청나라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조선의 외교적 카드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여기서부터 조선이 일본과 달리 대항해시대에 바닷길로 들어오는 서구와 적극적으로 대면할 수 없었던 제약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었다.

현재 대한민국 외교에 주는 시사점

최근 중국은 북핵과 관련하여 랴오닝(요동) 훙샹그룹을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훙샹그룹은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산화알루미늄 등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여러 물자를 북한에 수출하여 큰 이익을 남긴 중국 그룹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유엔 안보리 제제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에 불과하다. 최근 중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8월 북중 무역액은 6억2000만 달러로 2015년 8월 같은 기간보다 30%나 증가했다.

게다가 중국은 유엔 안보리 제제 대상이 아닌 북한의 광물 자원을 대대적으로 수입하고, 북한이 필요로 하는 석탄을 집중적으로 수출하고 있다. 지난 8월 석탄 수출로 벌어들인 수입만 1억1000만 달러였다.

즉, 유엔 안보리 제제가 인도적 차원의 제제까지 퍼지지 않는다면 북·중 무역을 국제 사회가 막을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엔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핵에 대한 실효적 제재 방안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인도적 차원의 물자까지도 틀어막을 경우 북한은 붕괴하겠지만 뒷수습에 대해서 미국이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미국이 온전히 감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미국에 대한 대한민국의 쓸모라는 것이 나온다.

매우 충격적이게도 미국에 대한민국이란 외교적 수단으로서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국가로 봐도 무방하다. 즉,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줄곧 해온 대북 외교는 스스로 ‘카드’를 버리는 행보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 내부에서 나오는 ‘북핵 해법’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북한 방문이거나 국제사회의 초강경 대응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원치 않고, 미국은 부담스러워하며, 우리에게는 강대국을 움직일 카드가 없다.

미국은 북한 문제에 대해서 대화 파트너를 대한민국이 아닌 중국과 일본으로 옮겨가는 추세이다. 대북 제재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대한민국’보다는 중국이나 일본과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보수파들은 ‘핵무기 보유’를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어리석은 상황판단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NPT 서명 국가이고, 미국-중국-일본은 공통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국무부 장관 시절 위안부 문제에 꽤 공을 들여왔다. 바로 일본을 압박하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여성 정치인이었고, 여성 인권으로 어필해야 하는 과제 앞에서 위안부 문제는 좋은 명분도 제공했다.

그래서 스스로 ‘위안부(comfort women)’가 아닌 ‘성 노예(sex slave)’라는 표현까지 하면서 반인권 전쟁 범죄를 이야기했었다.

박근혜 대통령(출처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출처 청와대)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졸속으로 위안부 협상을 함으로써 다음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는 힐러리의 카드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개성 공단을 섣불리 폐쇄함으로써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북 카드를 스스로 폐기했다.

결국, 우리나라의 정치권과 외교가가 펼쳐야 할 노력은 미국-중국-일본의 목표에 부합하는 우리의 쓰임새를 개발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쓰임새’라고 하니 뭔가 불편할 것 같지만 본디 외교란 상대에게 ‘이득’을 주는 쓰임새가 있어야 대우를 받게 되어 있다.

이웃 국가 일본의 아베 총리는 매우 영민하게도 향후 동아시아 정세에서 미국의 수단으로서의 일본의 매력을 지속해서 어필하고 있다.

미국은 대권 결정을 앞두고 있다. 우리의 현 상황을 보자면 ‘아리크 부케’와 ‘쿠빌라이’의 대권 가도 앞에 놓인 고려의 원종과 같은 처지이다.

여기서 상대방이 원하는 ‘비핵화’에 응답하는 카드를 제공하는 국가가 될 것이냐 아니면 멍청한 ‘핵무기 보유론’을 주창할 것인지는 사실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내년이면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가진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똥을 싸더라도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는 것이 숙명이라면 말이다.

임형찬

임형찬

헬조선 개청년
'정치하지마라' 저자
bucuresti@naver.com
임형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