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형의 시사잡상] ‘먹고 사는 문제’와 ‘생명’의 괴리

박근혜 정부 들어서 여러 사람이 생각하게 된 문제는 “한국 사회는 생명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결정적으로 그 문제를 환기한 이후에도 정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찾아보면 절망이 느껴질 정도다.

고 백남기 농민
고 백남기 농민

이쯤에서 “한국 사회는 생명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참조점으로 ‘개돼지’ 발언으로 파면된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발언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

통치세력의 내면을 고백하는 이렇게 솔직한 발언이 경향신문과 같은 언론의 틀을 거쳐 공개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7월 9일 자 2면 기사)

먹고 살게만 하면 되지만, 죽어도 상관없다?

우리의 논의의 맥락에서, 나 전 기획관 발언의 핵심적인 문제는 널리 회람되어 공분을 일으킨 자극적인 발언, “민중은 개돼지”가 아니라 그 뒷부분이었을 것이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공무원 정책실명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신분제’ 얘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아마도 그는 이런 사안에 대한 대중의 지지 여부는 일관성 없고 예측할 수 없으니, 평소에 먹고 살게만 해주면 정권의 소신대로 해도 결과적으로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정치철학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통치술로는 아주 틀린 말도 아닐 수 있다. 그가 마키아벨리나 한비자가 아니라 공무원이었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러나 나 전 기획관의 자신만만한 ‘신분제’ 발언은 죽음에 관한 얘기에서 요동치게 된다. 경향신문 기자는 ‘신분제’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간극을 유지하면 죽음도 불평등해진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기획관은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가슴 아프지도 않은가. 사회가 안 변하면 내 자식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거다. 그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봐라”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구의역 참사란 사건이 끌려 나오자 나 전 기획관은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그게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그게 자기 자식 일처럼 생각이 되나. (…)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다.”

여기서 소박한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아까 ‘먹고 살게’는 해준다면서? 이건 사람 죽은 문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렇게 적으면 한국 사회에선 말꼬투리 잡기에 불과할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 사회에선 누구나 ‘먹고 사는 문제’는 생명과는 별도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지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먹고 사는 행위’와 ‘삶’과 ‘생명’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준공이라는 원체험

한국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무척이나 민감하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고 있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은 이 사실을 예리하게 언어화해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이념은 ‘먹고사니즘’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박권일, 프레시안 2007년 12월 18일 자 88만원 세대와 ‘먹고사니즘’>)

그런데 우리는 이제 이 ‘먹고 사는 문제’에 ‘생명’의 문제는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나는 역사학자 전우용과 같은 이들이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이 민중을 대하는 태도가 조선시대만도 못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역설적으로 전근대사회에선 체제가 기술과 능력이 없었을 뿐 저런 식의 정교한(?!) 구분을 통치전략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엔 ‘먹게’ 해주지 못하면 금방 ‘굶어 죽는’ 꼴을 봐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이것은 근대 이후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데, 해방 직후 이념이나 전쟁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을 별론으로 한다면, 결국 그 기원은 박정희 시대로 소급될 것이다. 어쩌면 ‘먹고 사는 문제’와 ‘생명’이 분리되고 대립 항이 된 상징적인 사건을 경부고속도로 준공에서부터 시작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경부고속도로 준공은 그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개발독재 시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당대에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야당 정치인들이 그 준공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독재정권의 경제적 유능함과 민주세력의 경제적 무능함’의 대비를 보여주는 사례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경부고속도로 준공을 위해 죽어야 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상당했다고 한다.

통치권력은 준공비에서 77명의 희생자를 기렸다. 그런데 비공식적으로는 수백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77명은 ‘예쁘게 짜 맞춘’ 숫자였단 것이다. 부족한 기술과 무리한 속도전을 위해 죽었던 그들은 죽어서도 상징적인 숫자로 편집 당해야 했다.

1970년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어쩌면 우리의 원체험이 된 듯도 싶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먹고 사는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속도를 높여야 했다.

그리고 그 가속의 결과 일부의 생명이 유실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선진공업국이 되었다고 자랑하는 21세기에도 산업재해와 안전사고로 죽어가는 이가 다른 선진국보다 월등히 많은 나라가 되었다.

‘과도기적 필요악’이 ‘표준적 통치전략’으로

그렇기에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여타 선진공업국이라도 산업혁명 과정에선 많은 이들의 죽음을 감수했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심화하며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시민들의 안전 문제에 민감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선진국 수준의 민감성을 바라는 시민과 거기에 눈감은 통치권력의 불협화음으로 가득하다.

그나마 가습기 살균제나 시위대 사망자처럼 ‘소비자’나 ‘정치의식’의 영역에선 문제 제기가 활발히 이루어지지만, 산업재해처럼 ‘노동’의 영역에 있는 문제에 대해선 시민들조차 아직 인지가 희박하다.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옥시 대표에게 항의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옥시 대표에게 항의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처음에 경제개발이 시작되었을 때, ‘먹고 사는 문제’와 ‘생명’의 구분은 통치전략이라기보단 필요악이었을 것이다. 우리 세대에선 그것이 분리되어 있지만 나라가 발전하고 정상화되는 자녀세대에선 그 분리가 사라지고 ‘먹고 사는 문제’와 ‘생명’이 포개지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생각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나 전 기획관의 발언은 그 포개짐을 거부한다. 구의역 참사로 상징되는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 그러한 배려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산업화세대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자녀세대의 삶은 정상화되지 않았다. 혹은 계층적으로, 신분-분리적으로 정상화되었다. 과도기적 필요악이 표준적 통치전략이 되었다.

그렇다면 ‘정상화’의 과정이 역전된 순간은 언제일까? 민주정부 십 년의 지지자라면 2007년 즈음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아무래도 ‘위험의 외주화’라는 문제로 접근한다면 1990년대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좌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IMF 이후 좌파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지적할 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과도하게 썼다. 좌파를 비꼬는 사람들은 ‘기승전신자유주의’란 말을 쓸 정도였다.

그래서 요즘 리버럴 일각에선 한국 사회 비평에 ‘신자유주의’란 단어를 쓰는 것을 ‘좌파 꼴통’의 증표로 취급하기도 한다. 국가권력과 재벌이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이니, 신자유주의 운운은 ‘허수아비 치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의 문제?

최근 최병천 전 보좌관이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 박근혜 정부의 ‘사회과학적’ 공헌>이란 글 역시 이와 같은 인식을 가진 이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이 통찰력 있는 글에서 최 전 보좌관은 “나는 박근혜 정부가 한국의 ‘사회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대한민국의 사회과학적 본질은 <관료주도 계획경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국가주도 시장경제>라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큰 틀에서 동의한다. 그러나 단지 이렇게만 본다면 재벌 문제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 큰 틀에서 그렇더라도, 어떤 영역에선 다른 질서가 작동하고 있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출처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출처 청와대)

과거 독자적인 경영전략을 가진 적이 없던 재벌은 90년대 이후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이제 와선 이건희의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전자가 거둔 몇 번의 국제적인 성공을 지적하지 않고선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신자유주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이념은 한때 세계적 대세였고, 수용방식이 제각각이었을 뿐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거의 모든 나라가 영향을 받았다. 다만 한국에서는 ‘가장 힘이 센 국가’와 ‘그 국가의 아래에서 자율성을 누리는 몇몇 재벌’의 외곽에서 수용되며 영향을 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한국적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재벌이 비용과 위험을 그 바깥에 전가하는 시스템으로 고착되었다.

과거엔 국가가 주도한 경제개발이 재벌이란 도구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사회가 튼튼해졌다면, 이제는 여전히 비대한 국가와 재벌이 그 바깥 영역을 황폐화하면서 자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 권력이 강한지 약한지조차도 아리송하게 되었다. 국가든 재벌이든 그 바깥을 ‘수탈하는 권력’은 여전히 강대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권력’을 논한다면 그것은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들은 생명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마치 ‘우리도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권력의 이중고를 잘 지적한 칼럼으론 (방금 인용한 ‘손에 쥔 모래’의 비유를 사용한) “한국은 권력 집중의 부정적 현상과 권력 쇠퇴의 부정적 현상이라는 이중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간파한 이대근 경향신문의 논설주간의 글이 있다. (경향신문 2015년 10월 14일 자, <[이대근 칼럼] 한국 정치가 나빠지는 이유>)

삶과 생명의 일치를 위해

과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종종 신자유주의 개혁노선을 관료주의나 재벌체제에 대한 개혁원리로 이용하겠다는 의중을 내비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칼날은 그들을 비껴갔다.

이 시기 민주정부와 극한의 갈등을 빚었던 노동계와 좌파는 자신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막기 위해 투쟁했다고 말할 것이다. 충분히 막지 못해서 오늘날 국가와 재벌 바깥의 영역이 이토록 황폐해졌다고 말할 것이다.

반면 민주정부 지지자들은 관료와 재벌에 대한 정권의 개혁 의지를 공기업·대기업 노조 중심의 노동계와 이를 지지한 좌파들이 꺾었다고 말할 것이다.

신자유주의하면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도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신자유주의하면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도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국가가 ‘제1깡패’인 상황이 옳다고 여기는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한 개혁세력의 좌우 전선은 아마도 이 부분에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진실은 이 두 극단 중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개별 사안에 대해선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논의는 결국 ‘삶과 생명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문제 해결적 논의어야 한다. 국가에 의한 산업화란 가속페달, 그로 인해 비대해진 재벌 중 일부 세력의 독립, 이들의 독점적 권력을 해체하지 못한 바깥 영역에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개혁은 분명 ‘선진국 흉내를 내면서도 생명의 문제에 무능한’ 현대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국가에 대한 논의든, 재벌에 대한 논의든, 비정규직이나 외주화에 대한 논의든 한국 사회의 핵심적 문제를 생명권으로 집약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문제는 이념과 노선을 떠난 인간의 기본 아닌가.

시민들이 이미 ‘존엄’에 관심을 가지는 시대에, 국가에 ‘생명’부터 헤아려 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 것인가. 그렇기에 더욱 우리의 정치는 이러한 ‘삶과 생명’의 문제에 답해야만 한다.

한윤형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안티조선 운동사’(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함께 쓴 책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3년(2012~2014) 간 정치·신문비평 등을 담당했다.
a_hrima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