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 부검 논란, 전문가윤리와 담론의 필요성

한국 사회에 제대로 된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 부재를 비판하기는 쉽다. 어느 정도는 관습화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위 담론의 역할을 중시하는 이들이라도 그 역할을 시민사회와 저널의 영역, 그러니까 제너럴리스트의 영역에만 국한하기 쉽다.

이를테면 전문가 집단에서야 그 전문영역의 코드에 따라 우열판단이 가능한데 담론적 영역이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윤리란 것이 작동하려면 그 전문집단 내부의 담론이 필요하다.

그것이 외부화되어서나마 긍정적으로 발휘된 것이 황우석 사태에서의 브릭 사이트(‘외부화’라고 표현한 건 과학자 집단 내부에서의 담론이 아니었기 때문)의 역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한 내부적 논의의 가능성이 없다면, ‘전문가윤리’란 것도 한국 사회에선 발화자의 ‘격’과 ‘급’을 따지는 논법이 된다.

용산참사 다룬 영화
용산참사 다룬 영화 <소수의견>

영화 <소수의견>에 나온 인상적인 대사에서, 검사는 ‘연세대 출신 법의학자’의 양심적 소견을 “국과수 사람들은 서울대 출신인데요?”란 말로 짓누른다.

그들 사이에 논의가 오가지 않으면 그 전문영역 코드의 우열이란 것도 개별 사안에 대해선 발휘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어떻게든 해당 전문가를 포섭하려는 권력의 책동뿐이다.

포섭된 전문가와 ‘우리 편 전문가’

슬픈 것은 권력을 지닌 보수파가 해당 전문가를 포섭하려고 할 때, 권력이 없는 진보주의자들이 전문가 사이의 담론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별 사안의 엄중함 속에서, 그들은 그 지점을 포기하고 ‘우리 편 전문가’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은 ‘전문가 윤리가 없는 개인’으로 규탄당한다.

최근의 백남기 농민 사망 관련 건에 대입한다면 병사 판정을 내린 주치의와 조건부 영장을 발부한 판사가 이에 해당한다. 이 상황이 정당할까? 혹은 정당하더라도 이러한 비판이 타당성과 실효성이 있을까?

고 백남기 농민
고 백남기 농민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영장 발부 판사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그가 영장에 들어가는 논리에서 인의협의 성명서나 공중파 방송 기사에 나온 한 의사의 소견을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인지를 물어보자는 것이다.

답을 주자면, 물론, 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들, 진보진영에서 칭찬하는, 소신을 지키고 판사직을 그만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누군가는 상부 압력을 피하고자 문을 걸어 잠그고 판결문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체제를 바꾸려면 비범한 개인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위치할 수 있는 범상한 개인이 그렇게 판단 내리도록 제도적으로 유도해야만 하는 법이다.

보통의 사건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우리가 추앙하는 이들보다는 그저 상황에 비분강개하는 우리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이들을 준엄하게 규탄하는 이 조류가 옳게 여겨지지 않는다. 공정하지도 않을뿐더러, 변화를 추동할 효용도 없어 보인다.

타락한 전문가의 연쇄 고리

반대방향에서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우리는 박주신의 병역 비리를 규탄하는 무리에 의사 하나가 끼어 있다고, 이상한 소리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무리에 변호사 하나가 끼어 있다고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전문가적 논의를 펼쳤다고 믿지도 않는다.

저쪽에선 야권지지자들이 전문가 윤리를 규탄하는 상황도 그 비슷하다고 우길 수 있다. 전문가는 멀쩡한 판단을 내렸는데, 대중추수주의로 탄압하고 있다고 우길 수 있다. 우리는 물론 아니라고 흥분할 것이다. 내 심정도 그렇다.

그런데 그게 증명되려면 결국 전문가 집단 영역 내부의 담론이 필요하다. 그들 내부에서 사안별로 논의하면서, 그 논의에서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지 않는 이들은 서울대 출신이든 연세대 출신이든 권위를 상실하게 하는 그런 기제가 필요하다.

그게 우리에겐 없다. 만들 수 있을까? 회의적인 사람도 있다.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좁은 데다, 엘리트 양성 시스템이 단순해서 모두가 선후배 사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모진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야구에선 보복구를 던지거나 벤치클리어링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과 포개질 현상인지도 모른다.

고 백남기 농민 빈소 앞에 붙은 대자보
고 백남기 농민 빈소 앞에 붙은 대자보

하지만 만일 그런 것을 만들 수 없다면, 전문가윤리는 내부적으론 규제할 수 없고 김영란법과 같은 외부규제의 침해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효용성과 타당성 논란에 시달릴 것이다. 모진 소리를 못하더라도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은 많다. 결국, 논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어쩌면 백남기 농민 시신에 대해 부검 영장을 발부한 판사도 그런 논의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고뇌에 찬 결단을 정당화할 무언가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그런 것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모두 알다시피 많은 상황에서 부조리는 한 사람의 타락이 아닌 여러 사람의 타락의 연쇄 고리로 이루어진다. 판검사는 법의학자가 아니고, 현장 수사관도 아니며, 회계법인도 아니다.

개별영역의 전문가들은 다른 영역 전문가의 판단을 참조하여 자신의 판단을 이어나간다. 그러니 많은 경우 전문가 개인을 비난하는 행위는 대체로 무의미하다.

전문가 집단의 담론이 작동해야 한다

그들은 판관 포청천이 아니며,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도 아니고(이 영화에서 그의 활약은 역사적 인물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별개의 것이다), 하다못해 <정무문>의 진진도 아니다.

이들의 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그 제한성을 뛰쳐나오자고 한다면 예외적인 개인, ‘우리 편 전문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돌출된 사람들을 존경한다.

부림 사건을 다룬 영화
부림 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

그러나 누구나 그리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막상 전문가들의 내부담론이 시작된다면, 그렇게 돌출된 행동들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까일 수도 있다.

결국, 떼를 지어 누군가를 욕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전문가 개인에게 윤리성을 요구한다 해도, 대부분 그들만이 윤리적으로 행동해서 되는 문제도 아니다. 전문가 개인이 근거로 삼아야 하는 다른 영역 전문가들의 윤리양상이 모두 바뀌어야 하는 문제다.

그러려면 전문가적 논의에서 심각하게 벗어난 판단을 하는 이는 내부적 비판을 받고, 그 비판으로 인해 권위를 상실하도록 하는 기제가 작동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문가윤리를 위해서도 담론을 요구해야 한다. ‘격’과 ‘급’을 따지는 문화나 ‘우리 편 전문가’에 대한 숭앙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의 담론이 어떻게든 기능을 복구해야만, 사회 전체적으로도 담론이 제 기능을 할 방도가 열릴 것이다.

한윤형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안티조선 운동사’(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함께 쓴 책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3년(2012~2014) 간 정치·신문비평 등을 담당했다.
a_hrima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