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언니들의 인정투쟁 ‘페미니즘’···빈곤층 여성들의 문제는 ‘아웃 오브 안중’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은 중산층 이상 여성들에게나 유리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등 다양한 페미니즘 유형들은 모두 딜레마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빈곤층 여성들의 실질적인 문제는 언제나 빠져 있다는 것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자신의 유엔총회 마지막 연설에서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다. 반 총장은 지나날 20일(현지시각) 미국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1차 유엔총회 개막연설에서 “나는 재임 중 유엔 고위직에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여성을 임명했고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부를 수 있게 돼 자랑스럽다”며 “민족·종교·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권리를 수호해왔다”고 했다.

2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71차 유엔총회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연설하고 있다.
2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71차 유엔총회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연설하고 있다.

반 총장의 말대로 고위직에 여성을 임명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인가? 지구 위에 절반은 여성이다. 유엔 고위직에 오르는 여성은 극히 극소수 중 극소수다. 선택받은 여성들이다.

이런 여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인가?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인가?

21세기 페미니즘이 가야 할 길에 대하여 두 개의 글을 소개한다.

얼마 전 읽었던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생애 마지막 저서 <20세기를 생각한다>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내용을 읽었는데 평소 나의 문제의식과 너무도 일치하는 대목이 있었다.

20세기에 만들어 낸 페미니즘은 돈을 많이 버는 여성 변호사들에게 이롭고, 여성 교수들에, 대학교 여학생들에게도 이롭다.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대다수 여성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은 출산휴가와 아동보호이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는 상층 중간계급 출신이며, 이들이 지닌 단 한 가지 불리한 조건은 기껏해야 사소한 결점뿐인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결코 자신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닌 부류의 더 많은 사람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여성 변호사와 여성 사업가가 많다는 점에서 직장 내 유리천장이 산산이 조각났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훨씬 더 많은 여성이 남편 없이 혹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남편과 가족을 건사하며 살아간다. 노동시간은 길고 아동보호 제도는 부족하다.

한 가지 더 소개하는 글은 사회민주주의 총서 Ⅲ<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알렉산더 페트링 외 지음> 중 양성평등에 관하여 짧은 내용이지만 매우 탁월한 문제의식을 보여준 에바 플렉켄 <양성평등> 글을 소개한다.

에바 플렉켄은 독일 사회민주당 연방국회의원 정치보좌관이며 현재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의사소통 이론적 비판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뮌스터대학과 빈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 사회학, 거시경제학을 공부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적게 일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 정의로운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나쁜 성적을 받는 현상이 점차 퍼지고 있는 것이 정의로운가?

이러한 질문은 양성평등과 관련해 다루어야 하는 문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양성평등의 의미는 남성과 여성의 삶의 현실을 모든 정책 영역에서 체계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성평등은 분배 정의의 네 가지 원칙을 관통하고 있으며, 특히 성과기반 정의와 기회의 평등원칙에 투영된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씨가 패션잡지 48호에 기고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 캡쳐
칼럼니스트 김태훈씨가 패션잡지 <그라치아> 48호에 기고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 캡쳐

양성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남녀 성 역할의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기저기 갈기 견습생(육아휴직을 신청한 남성을 비웃는 표현)’, ‘까마귀 부모 (아이를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부모를 일컫는 표현)’ 논란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양성평등 이슈는 사회정치적으로 여전히 유의미하다. 성 역할을 둘러싼 논란이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고 상승작용을 통해 증폭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주의(feminism)의 내용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변화를 거듭해왔으며 그것의 강조점 또한 이동하고 있다.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서 급진적 요구가 불가피했다면 현시기 여성주의는 협력관계에 기초한 양성평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 구조적인 변화와 여성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에도 여성주의적 요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로 남아있다.

여성주의자들의 요구는 독일 복지국가와 관련해서 특별한 정당성이 부여된다. 예를 들어 노년층 빈곤은 여전히 여성의 문제이며, 부부합산과세제도는 현실에서 여성 고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 들어 남녀 불평등의 새로운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일부 영역에서는, 예를 들어 교육의 경우에는 남성차별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남성과 여성이 모두 불평등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 하나의 불평등을 또 다른 불평등으로 상쇄할 수 없으므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 정책적으로 양쪽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현대 사회의 양성 불평등이 다차원적이라는 것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도 보육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남성 간호사도 여성 간호사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있다.

즉, 양성평등 이슈는 다층적이며,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현실적 문제인 것이다.

다원적인 사회는 분배 정의를 위한 좀 더 정교한 전략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정의의 원칙에 따라 차별화된 접근을 요구한다. 이는 양성평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반기문 총장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도가 떨어지면서 페미니스트로 자처하는 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페미니스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