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형의 시사잡상] ‘선빵’ 맞았다고 받아치는 공권력과 시위대···폭력에 대한 성찰

널리 알려진 영화 <대부>는 마피아 조직을 운영하는 시칠리아인의 가족사를 다룬 영화다. 결국, 시리즈를 관통하고 나면 ‘꼴레오네 패밀리’와 그 두 번째 수장인 마이클 꼴레오네는 무자비한 살인자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주인공과 그 집단에 쉽게 감정 이입하게 된다.

‘우리 편 폭력’을 정당화하는 서사의 분절

관객을 그렇게 만드는 방법은 너무 간단하여 비밀이랄 것도 없다. <대부> 1편에서 가장 먼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이가 ‘꼴레오네 패밀리’의 해결사 루카 브라쉬이기 때문이다.

루카도 해결사이니 살인 경력이 있겠지만, 그 국면에선 그저 상황을 정탐이나 하려다가 적대하는 조직의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루카의 살인은 이미지로 나오지 않고 영화 초반 마이클의 대사로 서술된다.

즉 우리의 눈에 최초로 목격된 폭력과 살인은 ‘이쪽이 당한 것’이다. 이후엔 패밀리의 수장이자 마이클의 아버지인 비토 꼴레오네가 습격을 받아 다치게 되니 패밀리의 대응은 인지상정처럼 보일 뿐이다.

대부(출처 OCN)
대부(출처 OCN)

‘우리 편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우리의 서사는 대개 이런 식으로 분절되어 있다. 루카 브라쉬가 죽인 사람, 패밀리가 처단한 사람은 기억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피해자인 순간’부터 이야기를 전개하면 그다음엔 모든 것이 편해진다.

당연하겠지만 이와 같은 ‘비법’은 물리적 폭력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다. 2007년 영화 <디워> 논쟁에서 사회비평가 김규항은 일군의 대중들이 영화평론가들에게 행한 사이버테러를 이런 식으로 정당화했다.

‘선빵’을 따지는 일의 무의미함

“<디워>를 옹호하는 사람들 역시 타인의 취향에 폭력적이지 않은가, 라는 반문은 맥락을 잃은 이야기다. 그들은 타인의 취향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 제 취향을 경멸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에 반발하는 것이다. 동네 양아치들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 법이다.”

디워
디워

그는 자신의 소박한 주장을 참으로 적절하게 요약됐고, 그렇기에 우리는 이와 같은 어법에 대해 ‘선빵론’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맥락 없는 폭력은 없다. 물리적 폭력이든, 사이버 폭력이든, 모든 폭력은 맥락 의존적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이다.

굳이 ‘선빵’의 기원을 따져 올라갈 수 있는 건 오늘 우연히 처음 만나 시비가 붙은 동네 양아치 정도일 뿐이며, 사실은 그들마저도 제각각의 기억을 주장할 것이다. 어디서부터가 폭력인지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내가 욕하는 대상이 내게 먼저 ‘선빵’을 날렸다고 입증하는 것을 ‘논의’라고 부른다. 내 마음에 드는 자료를 가져다주면 ‘팩트폭력’이라 부르며 ‘사이다’를 느낀다. 이래서야 서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서사만 끝없이 축적될 뿐, 논의의 진전은 불가능하다.

공권력과 시위대의 대치상황과 같이,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구현된 상황이라 해도 ‘선빵론’이 무의미한 건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공권력의 폭력에 더한 책임성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공권력의 목적이 치안유지 및 시민안전 보호라면, 시위대도 시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한 대 때렸다고 전경이 같이 한 대 때리는 게 정당하다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러한 책임성의 상대적 차이에 관한 논의를 “시위대의 모든 폭력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고, 공권력의 시위진압만이 문제다”란 억지 주장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끌고 들어가면 곤란하다.

시위대의 폭력은 어찌 봐야 하는가

시위대를 억제하는 일은 공무이며, 비난해야 할 것은 과잉진압이다. 시위과정에서 폭력이 행사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공권력을 향한 폭력은 무조건 정당하다 말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오늘 일의 정당성은 오늘의 문맥에서만 따져야 한다. 며칠 전 시위에서 전경에게 맞았다고 오늘 경찰을 때리자고 말해선 안 된다. 때린 그 사람을 찾아내서 때리는 게 아니라면 정당하지도 않고 다만 악을 증대하는 일일 뿐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궤변으로 무시하려 들면 안 된다.

그 궤변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고 십 년 전, 이십 년 전 일로 건너뛰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누구에게나 할 말이 있다. 486세대가 군부독재시절을 호명하며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면 우파는 6·25전쟁까지 끌어들이며 정당화한다.

일본을 규탄할 때는 1990년대에 태어난 이들도 일제 강점기까지 시선을 확장한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을 ‘나쁜 놈’으로 규정하고 우리 위치를 ‘피해자’로 격상시키면 그 담부터는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고 믿는다.

사실은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다. 그런 것을 용인하면 다들 아무 역사나 소환해와 ‘피해자연’하고 논의는 개판이 된다. 한국 사회는 이미 그렇다.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막 하기 위해 먼저 자신이 피해자 집단의 일원임을 인증해야만 하는 사회가 되었다.

젊은 남성과 대화하다 그가 말하자면 ‘선빵은 여자들이 먼저 날리지 않았느냐’란 식의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러지 마라. 여자들과 그런 얘기하기 시작하면 호모 사피엔스 종의 역사를 역주행하게 된다”라고 조언했다.

여성들이 가끔 그러는 건 인지상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맥도 있다. 그렇더라도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오늘 얘기만 해야 한다. 이십 년 전 자기 경험, 자기는 겪지도 않은 어머니 경험, 투표권 없던 시절 얘기, 여자가 남자의 가산에 불과하던 시대 얘기를 다 끌어들여서는 곤란하다.

죽음을 감당할 수 없다면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적정한 선을 긋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긋는 과정에서 격렬한 견해차를 동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선을 긋는 것을 포기해서야 마피아 집단과 다를 바가 없다.

선진국 사례를 끌어들이는 것도 지겹다. 어느 동네를 가나 경찰이 시위대를 때리는 일, 시위대가 경찰을 때리는 일은 일어난다. 방식과 양상과 강도가 다를 뿐이며, 그마저도 맥락을 탄다. 체제에 얼마나 위협이 되느냐에 따라 설렁설렁 진압하는 시위도 있고, 가혹하게 진압하는 시위도 있다.

유럽시위
유럽시위

그런데도 굳이 그걸 끌어들여 자기가 옹호하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서로 우기는 게 우리 사회의 논의 수준이다. 무의미하다. 우리는 인권적 가치 기준으로부터, 우리의 실정에 맞는 방법으로 적정한 선을 긋는 논의를 시작하면 된다.

물론 그러한 선이 아예 필요 없다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 정치적 지향이 뚜렷하며 폭력혁명을 지향하는 이들이나, 시위의 자유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주의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조차 ‘폭력의 윤리적 적절성’이 아닌 ‘폭력의 수단적·정치적 적절성’의 차원에선 오늘 행사된 특정한 폭력을 비판할 수 있다. 또한, 제아무리 폭력을 찬양하던 이들이라도 갑자기 사람이 죽어버리면 덜컥 겁이 나고 윤리성을 고민하게 된다.

“한총련은 억울합니다”의 기억

가령 1990년대 중반, 모 대학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에서 경찰 프락치로 몰린 사람이 죽어버린 사건을 생각해보자. 한총련 간부가 이에 대해 내놓은 첫 반응은 “한총련은 억울합니다”였다.

내가 알던 선배 한 명은 이때 한총련을 떠났다. 또 다른 선배 한 명은 “프락치였던 건 사실이야”라고 말했다. 출범식을 막는 경찰을 봐야지 한총련의 폭력은 사소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어법대로라면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을 침략한 인민군을 봐야지, 국군이 죽인 민간인을 보지 말라는 사람들을. 그들이 죽인 이에 대해 “빨갱이였던 건 사실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덜컥 겁이 나는 사람들이 다수인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폭력의 윤리적 적절성’에 대한 문제는 매 순간 고민되어야 한다. 그래야 폭력이 통제되고 실수로 사람이 죽는 일이 줄어든다.

‘우리 편 폭력’을 정당화하는 서사를 만들다가, 사람이 죽어버리면 “억울합니다”라고 말하고 음모론을 써대면 안 된다. 그런 자세로 운동하다가 “사회적 약자에 의한 사이버테러는 정당하다”란 식의 궤변을 늘어놓아서도 안 된다.

우리 대부분은 폭력혁명의 옹호자도 아니고, 군경이 민간인을 때려도 믿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이나 내세울 극단적인 견해는 주변부로 밀어내기 위해 각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폭력혁명의 옹호자들에 대해서 몇 마디만 더 하자. 폭력혁명 노선의 정당화가 이뤄졌던 시대엔, 특정한 신념을 공유하는 정치적 결사체가 권력을 쥘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는 “폭력혁명이 필요하다”란 말은 “정치권력의 쟁취가 필요하다”는 말과 사실상 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정당화가 가능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시작된 시대에 그 방법을 활용하지 말고 폭력혁명 노선을 따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설령 그게 성공한다 한들, 인민의 동의과정을 생략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 그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유지하고 정당화할 것인가? ‘인민의 동의를 받은 폭력혁명’을 지지한다 말할 거면, 왜 굳이 투표가 아니라 위험이 수반되는 폭력혁명이어야 하는가?

정치적 신념을 존중한다면 사리에 어긋나는 부분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다만 그들이 멸종위기종이고, 권력 없고, 경찰에 쫓기고 불쌍한 사람들이니 이해하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거야말로 그들을 가장 멸시하는 방법이다.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출처 뉴시스)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출처 뉴시스)

사이버 폭력의 특수성

다시 폭력 얘기로 돌아가면, 이 논의에 사이버폭력을 끼워 넣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이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사이버 폭력은 물리적 폭력과 같지 않다. 처벌의 강도도 윤리적 비난의 강도도 달라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엔 사이버 폭력이 물리적 폭력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행사될 수 있다. 또한, 상대방이 얻어맞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반격당할 여지도 적기 때문에, 윤리적 책임성의 문제가 지나치게 희석된다.

모두가 모여서 돌을 던질 때, 지나가다가 같이 돌 한 번 던지고 떠난 사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잊는다. “우리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봐라. 저 사람은 안 죽고 잘살고 있다”고 우기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자살한다. 사이버 모욕죄의 기원은 한 연예인의 자살이었다. 물리적 폭력과 같이, 사람이 죽고 나서야 움찔한다. 거기서 윤리적 적절성에 대한 고민이 떠오른다면 죽기 전에 폭력 단계에서부터 고민하는 게 맞다. 앞선 논의와 완전히 같다.

사이버 폭력이 더 나쁜 부분도 있다. 물리적 폭력의 차원에선 윤리성을 동원하지 않아도 누구나 조심한다. 시위대는 시키지 않아도 과도한 대응을 자제한다. 너무 앞서 나갔다간 고립되고 경찰에게 두들겨 맞기 때문이다.

‘우리 편’이 맞는 모습을 연출하려고 튀어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다간 눈앞에서 후배들이 피튀기는 걸 봐야 하고 자신은 십중팔구 감옥으로 끌려간다. 그래서 이런 선택이 쉽게 퍼지지는 않는다.

사이버 폭력은 다르다. 죄책감 없이 돌을 던지면서 그게 정당하다고 하면 옆에서 같이 던지는데 아무런 경계심이 없다. 시위대의 폭력보다 훨씬 쉽게,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다.

무책임한 폭력을 옹호하는 진보 담론, 무엇을 낳을까

그러니 시위대 폭력을 옹호하던 그 논리로 사이버 폭력을 옹호하는 운동권들이 어찌나 한심한가. 젊어서 철딱서니 없었으면 성찰을 해야지, 우물에 독을 푸는 사람들을 그 철딱서니 그대로 옹호하는가.

더 웃기는 건 오늘날 사이버 폭력을 즐기는 무리는 어느 쪽이든 보편적으로 ‘운동권 혐오’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들 행동을 정당화할 때는 운동권 논리를 들이댄다. 당신들도 그랬으면서 왜 우리를 편들지 않느냐고 말이다.

운동권은 ‘바보 삼촌’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영악한 조카들은 삼촌을 경멸하면서도 자기가 때린 누구의 깽 값은 대신 물어달라고 한다.

진보 담론은 책임지지 않는 폭력의 확산에 기여하는 사회악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연쇄 고리의 결과는 나중에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운동권과 진보는 ‘선빵’을 열심히 가린 결과, “선빵은 너희들이 날렸잖아”라며 냉소적 대중에게 역으로 규탄받는 자업자득의 지경에 빠졌다. 맥락을 열심히 따지던 이들이 만들어낸 맥락의 세계, 누구나 자기 폭력은 정당하다고 하는 악무한의 세계를 만들었다. 이 세계는 사회진보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한윤형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안티조선 운동사’(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함께 쓴 책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3년(2012~2014) 간 정치·신문비평 등을 담당했다.
a_hrima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