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왜 트럼프를 두려워하나

미국 대선이 코앞이다. 트럼프의 맹추격으로 한국에서도 트럼프 당선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웅성거림이 높아진다. 미국 정치도 국제 정치도 잘 모르는 내가 이 글을 쓰는 문맥이다.

‘트럼프 당선’이란 확률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나도 ‘정신승리’가 필요했던 모양인지 그제야 “그런데 우린 왜 그렇게 트럼프를 무서워하지?”란 의문이 떠올랐다.

주변에 물어보았다. 크게 보아 한미동맹 악화와 미국 보호무역 강화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우려의 핵심인 것 같았다. 하긴 그간 주한미군 분담비를 거론했으니 비용 지출이 증가할 수도 있겠다.

답변을 듣고 생각을 굴리다 보니 핵심은 그게 아니란 통찰에 이르렀다. 우리가 트럼프를 무서워하는 이유의 핵심은 결국 ‘그가 뭘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분담비를 좀 더 내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한국이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주한미군을 빼버린다고 하면 상당히 난감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트럼프가 진정으로 뭘 원하며, 어디까지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른다.

즉 예측 불가능성, 불확실성이 핵심이다. 여기서 질문은 바뀐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왜 그걸 감내하려고 하나? 이 질문에 이르면 문맥은 한국 사회를 초월한다.

출처 CNN
출처 CNN

미국인이 아닌 세계시민들에게 물어본다면, 미 대선에 인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우리처럼 트럼프가 아닌 힐러리를 원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초강대국이 예측 불허의 인물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

그런데 미국인은 왜 그걸 원하나? 이 질문의 문맥도 미국 사회를 초월한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이 비슷한 일이 생기는 꼴을 보고 있다. 타국에 대해선 합리적인 정치인을 바라는 우리가, 자국에선 비합리적인 정치인을 선호하고 있다. 도대체 왜?

합리적 사회의 비합리적 개인이 가장 이득이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설은 게임 이론적인 것이다. 단순하게 교통신호 준수 상황을 생각해보자.

남들이 교통신호를 준수하지 않기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람들이 신호를 안 지킬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운전도 보행도 어려워진다. 차나 사람이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오지는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하지만 ‘남들이 모두 교통신호를 지킬 때 나 혼자 교통신호를 어길 수 있다면’ 내게 이득이 된다.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도 ‘타국은 예측 가능한데 내 나라만 아닌 경우’ 이득이 될 수 있으니 그런 이중잣대가 자연스럽다고 말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설의 문제가 있다. 가령 브렉시트(영국의 EU 연합 탈퇴) 상황을 생각해보자.

브렉시트 가결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무임승차하는 영국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영국의 기성세대에 대한 조소’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우린 그게 영국에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브렉시트가 영국에 큰 손해가 될 거라는 전망이 시장주의자들의 소망충족적 예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 부분은 일단 넘어가자. 어쨌든 이 문제가 게임 이론적 설명에서 제시되는 ‘이득’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brexit
brexit

합리적 엘리트에 대한 생활인들의 반격?

두 번째로 제기되는 가설은 진보적 정치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다. 힐러리의 예측 가능성은 엘리트의 합리성이며, 대중은 그 부분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여기서 타국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예측 가능성은 자국 대중에겐 ‘내 삶이 더 나아지지 않거나 나빠질 것’이란 명백한 가능성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트럼프가 된다면, 뭔가가 바뀔 것이다.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뽑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정치적 지향은 정반대일지라도 트럼프를 향한 대중의 욕망은 샌더스를 향한 욕망과도 궤를 이어볼 수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좌파와 신우파의 경쟁 구도를 보게 된다.

과거엔 세상이 나를 돌보지 못한다 생각했을 때, 좌익이 성장했다. 내 삶에 대한 불만과 사회에 대한 분개는 계급적대감이란 것으로 변환되어 좌파정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는 더는 그러한 변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좌파정당 혹은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상대적) 진보정당은 제도권의 양대 축 중 하나가 되었고, 대중에겐 ‘내 삶의 어려움에 대한 공범’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엔 좌파가 정권을 잡기 위해 우파와 대결하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신우파와 대결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좌파정당에 유입되던 이들을 신우파가 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사회학적 해석으로는, 선진국에서 세계화와 산업고도화로 인해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저소득층의 분노가 쌓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좌익들은 우익들이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 제시한 그 조건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대결했다. 그들에 대한 대중의 분개가 위치한 문맥이다.

대중의 분개에 우리는 뭘 어째야 하나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이 진단의 문제는 “진단은 그렇게 했다 치고, 그래서 우리는 뭘 어쩔까요?”란 질문에 무력하다는 것이다.

누구는 샌더스 열풍에 주목하며 ‘신자유주의에 적응한 사민주의 이전의 사민주의의 길’, 혹은 그보다도 전의 구좌파의 길로 돌아가자고 하겠지만, 대중이 그에 설득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샌더스 열풍’의 함의가 그 노선에 대한 명확한 동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샌더스 지지층의 일부가 트럼프에게로 가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사회학으로 답이 안 나오니 심리학도 나섰다. 당위론을 설파하는 진보가 대중의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고 한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이나 강준만의 <싸가지 없는 진보>의 접근법이다. 단순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싸가지’ 갖추고 열심히 해보자고 한다.

역시 옳은 말이다. 실천적 함의도 분명하다. 한국 야권을 쳐다봐도 제발 좀 ‘싸가지’를 챙겼으면 좋겠는 정치인과 핵심 지지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 진단에도 근본적 한계가 있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합리성을 합리성과 동등하게 존중할 수는 없다는 원칙 때문이다. 이 원칙을 포기하면 더는 합리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의 분개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들이 이명박식 4대강이나 최순실식 ‘대통령 공유’경제, ‘무당 창조’경제가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믿으면 반대할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그러면 대중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싫어한다. 이걸 어째야 하나?

South Korean President Park Geun-hye bows after releasing a statement of apology during a news conference at the presidential Blue House in Seoul this week. (Yonhap/Reuters)
South Korean President Park Geun-hye bows after releasing a statement of apology during a news conference at the presidential Blue House in Seoul this week. (Yonhap/Reuters)

‘여성대통령’에서 포개진 한국과 미국의 사정

한국의 네티즌들은 추격전을 벌이는 트럼프가 “여성대통령이 어떤지를 보려면 한국을 보라”는 발언을 했다는 합성사진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트럼프의 여성혐오 문제를 한국의 게이트에 절묘하게 포갰다.

누군가는 이걸 보고 한국인임이 부끄러웠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게 사실이라면 ‘애국적이면서 여성혐오 문제에 대한 인지가 있는 미국인’이 내 앞에서 부끄러울 일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이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 상상된 언급에서 성별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부각된 건 사실이다. 여기에서 미국과 한국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와 그런데도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격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순실과 힐러리 사이의 아득한 격차, 그런데도 트럼프의 발언이 성립하는 공통문맥 말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너무 전형적인 여성 혐오적 사건이며, 그리 소비된다. 최순실과 박근혜는 한국의 강고한 여성억압 이데올로기가 경멸하는 ‘강남 아줌마’의 특성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그들이 무식해서지만, 구조적 원인이 없는 건 아니다. 가령 고영태를 보라. 성별 바꿔서 생각해본다면, 남성이 룸살롱에서 만난 여성을 사업적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일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예 ‘물장사’의 전주가 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최순실에겐 고영태가 적당한 파트너였다. 한국 사회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선 남성 조력자가 절실히 필요했는데, 사회생활의 접점이 넓지 않은 ‘아줌마’ 입장에서 실무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믿을만한 남성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연애하던 이를 데려다 쓴 것이다. 한국 사회의 여성 억압적인 구조를 완벽하게 반영하는 사례면서, 사람들의 여성혐오 정서를 부채질하는 사례다. 그러니 트럼프가 실제로 그리 말했다면 악의적 선동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여성혐오와 한국의 여성혐오

힐러리는 사실 ‘최순실-박근혜’와는 아득히 먼 차원에 있다. 노동시장과 전문직의 영역에서는 남녀격차가 사라지거나 역전된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엘리트, 합리성, 자본의 이해를 담은 기표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서구에서도 몇십 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의 대처가 있지 않았냐 반문할 수 있지만, 대처에겐 통상적인 여성의 성 역할을 이탈한 데에 대한 전폭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전투적 노동조합과 아르헨티나를 두들겨 패는 ‘철의 여인’에 대한 열광이나 분개는 ‘합리성’을 대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신자유주의하면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도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신자유주의하면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도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반면 오늘날의 힐러리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비록 미국에 여성 대통령이 나온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자본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합리적인 엘리트 전문직 여성’이 더는 낯설지 않다.

한편 한국 사회에선 남녀 간의 학력 격차가 줄었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노동시장에서의 격차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분개하고 있다.

또 한편 그 분개하는 젊은 여성들을 바라보는 젊은 남성들은 ‘실은 우리 처지는 한국의 중년 남성보다는 미국인 청년 남성과 흡사한데 내가 왜 저들에게 욕을 처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느끼고 있다.

트럼프는 남자다. 미국의 양상이 한국과 매우 달라도, ‘젊은 남자를 많이 끼고 다니는 부호 여성’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트럼프의 성 추문은 일회적인 게 아니라 그의 존재양식이었을 게다.

그런데도 ‘여자가 많은 트럼프’와 ‘여자 만나기 어려운 저소득층 백인 남성’이 여성에 대한 분개 속에서 뭉친다. 부조리하다. 그런데 주어진 현실이다. 여기서 남성들은 여성들만큼도 가진 게 없어 보인다.

뒤집힌 합리성, 뒤집힌 성별

담론의 영역으로 와도 비슷하다. 개념을 만드는 이들은 여전히 남성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개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이들은 여성이 훨씬 더 많다. 남성들은 ‘쌍년’ 한 마디로 불쾌했던 연애담을 재단하지만, 여성들이 남성을 규탄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어는 종류가 다양하다.

세계적 페미니즘 운동의 조류에 깊이 공감한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최근 돌려 읽는 책이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라고 한다. 하지만 웹상에서 젠더갈등의 현장을 살펴보면, 언어가 필요한 건 오히려 남정네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은 힐러리 같은 이가 탄생할 사회적 맥락을 아직 만들지 못했지만, ‘합리성이 여성의 것으로 보인다’는 문맥에선 미국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도식적으로 말할 때, 남성이 사회에서 상층부와 하층부로 양극화되어 있고, 여성이 중층부와 최하층부를 차지하는 입장에서, ‘여전한 남녀차별’과 ‘남성 역차별’이 각각 발화자 개인에겐 동시에 진실일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이다.

가뜩이나 비합리적 대중을 합리주의자가 설득하는 일도 어려운데, 젠더갈등까지 더해졌다. 정치적 좌표가 좌초된 세상에서 젠더이슈는 쉽게 정서적 공감을 끌어낸다.

그런데, 일방향의 공감이다. 남성에게 감정 이입하면, 여성들이 떠난다. 여성들에 감정 이입하면, 남성들이 떠난다. 트럼프 현상을 나름대로 세련되게 분석하고 우려할 한국의 진보 담론은 메갈리아에 분개한 젊은 남성들을 진보 담론에서 배제하는 데 앞장 선다.

글을 쓰기가 너무 어렵다. 전후좌우를 분간할 수 없어 현기증이 난다. 추락하고 있는지 이동하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안 간다.

트럼프의 낙선을 바라지만, 트럼프를 등장시킨 시대의 흐름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도 미국도 그 길을 갈 것이다. 내 경우엔 그게 가장 두렵다. 그런데 이게 두렵다면, 트럼프가 낙선하더라도 세상은 크게 안 바뀐다는 의미다.

본인이 제1세계의 일원인지 제3세계의 구성원인지 분간이 안 가는 나는 힐러리의 당선을 바란다. 그러한 내 욕망은 ‘남성적’인가, ‘여성적’인가? ‘합리적’인가 ‘비합리적’인가? 이젠 이런 쉬운 문제에조차 답을 찾기가 어렵다.

한윤형

한윤형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안티조선 운동사’(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함께 쓴 책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3년(2012~2014) 간 정치·신문비평 등을 담당했다.
a_hriman@hotmail.com
한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