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이밴드 정중식 향한 SNS와 언론의 ‘폭력 동맹’

개인적인 방침이 있다. SNS에서 논란이 된 일은 SNS에서만 언급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일도 처음부터 알았지만 <리얼뉴스>에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웹에서 진행된 편향된 논란이 그 논조 그대로 매체에까지 오르곤 한다. 그것도 주로 ‘페미니즘’ 이슈에서 그렇다.

한국처럼 여성인권이 허약한 나라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필요성이야 부인하기 어렵지만, 이런 식의 ‘받아쓰기 ’식 보도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매체가 군중의 폭발하는 정서에 브레이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추인해주는 역할이나 하고 있다. 운동 특성상 군중이 항의하는 대상이 그만한 군중의 분노가 모이지 않으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종류의 권력이 아닌데도 그렇다.

‘정중식 논란’ 보도의 문제점

해당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12월 11일 자 최민영 기자의 <[지금 SNS에선]보통 남자>를 보자. “‘보통 남자’의 정의를 놓고 인디 음악계 ‘중식이밴드’의 리더 정중식씨(34)의 글이 지난 주말 논란이 됐다”라고 시작한다. 정중식씨가 왜 글을 올렸는지는 언급도 하지 않고 그의 글의 부적절성만을 논하고 있다. 그럼 정중식씨가 괜히 ‘넷페미’를 도발하기 위해 글을 썼단 말인가?

출처 경향신문 갈무리
출처 경향신문 갈무리

이어서 사건을 보도한 <국민일보> 12월 13일 자 이은지 기자의 <[친절한 쿡기자] “박사모보다 나쁜 년들” 중식이밴드의 태도는 옳은 것일까>엔 그래도 사태의 발단이 기술되어 있다. 중식이밴드가 지난 3월 정의당과 총선 홍보협약을 맺은 맥락도 쓰여 있고, “사태가 불거진 것은 7일부터입니다. (…) ‘박사모보다 나쁜 년들’이라고 불특정다수를 칭한 정씨는 이어 ‘행사 측에 중식이밴드 왜 섭외했냐고 압박한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제는 밥그릇까지 뺏으려 한다. X같네’라고 밝혔죠”라고 적었다.

두 지면 모두 보도기사가 아니라 SNS의 논란을 소개하고 기자 개인의 의견을 제시하는 지면이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일방적인 견해를 대변할 거라면 차라리 정중식씨에게 접촉이나 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정중식씨의 페이스북 발언은 공적인 것이 아니며, 그가 말을 다루며 사는 사람도 아니니만큼 정제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기사로 다룬다고 할 때, 그에게서 그보다는 정제된 해명 한마디를 요구하지 않는 매체의 세태는 우려스럽다.

또한, 이왕 이 문제가 기사화된다면 그가 압박한 이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손해를 봤는지 정도는 물어봤어도 좋지 않을까. 정말로 전화한 사람들 때문에 공연이 취소된 것인지 여부라도 들었다면 적어도 기사를 통해 논란을 처음 접한 이들은 정중식씨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처럼 ‘분노한 일방의 감정에 대한 받아쓰기’가 반복되면 당장에야 감정 고양에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중식씨 같은 일개인을 괴롭혀서 얻을 것이 무얼까.

그들은 정중식씨의 가사와 글이 막연하게 ‘피해자’에 대한 ‘폭력’이라 말하면서, 구체적인 개인인 정중식씨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간사 범죄를 다룬 예술작품이 한둘이 아닐 진데, 제제 기준을 논의하는 것도 아니고 창작자 개인을 집단으로 조롱하면서 심지어는 ‘폭력’을 규탄하는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뒤집어진 기준으로 처신하니 정중식씨가 황당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노래에 대한 제재가 정당하냐가 핵심적 문제

중식이밴드는 <국민일보> 기사에서 말했듯 정의당과 총선 홍보협약을 맺은 이후 ‘여성혐오 밴드’ 논란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에도 트위터에서 논란이 시작되어 <여성신문>이 3월 31일 자에서 이세아 기자가 쓴 <“여성혐오 밴드가 ‘청년의 목소리’?” 정의당 공식 테마송 논란>이란 기사를 내면서 일파만파로 퍼졌다.

출처 여성신문 갈무리
출처 여성신문 갈무리

정의당이 총선 공식 테마송으로 사용하려 했던 건 <여기 사람 있어요>, <심해어>, <아기를 낳고 싶다니> 세 곡이었다. 협약 체결 이후 ‘여성혐오’ 논란이 불이 붙은 곡은 <야동을 보다가>, <Sunday Seoul>, <좀 더 서쪽으로> 등이었다. 혹자는 <아기를 낳고 싶다니>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촌스락’, ‘흙수저밴드’란 이름으로 흔히 불린 중식이밴드는 2014년 초에 앨범을 냈고 2015년 슈퍼스타K7에서 화제가 되면서 비로소 명성을 얻었다. 슈스케에서 화제가 된 이후 중식이밴드의 <야동을 보다가>에 대해 불평하는 여성들의 트윗을 두어 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정의당과의 협약 체결 이후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중식이밴드의 노래 가사에 여성혐오가 있다면 그 수준은 어느 정도이며 어느 정도의 제재가 정당 하냐란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논점에 대해 따진다면 정중식씨의 해명조차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창작물’은 만들어지는 순간 ‘창작자 본인의 해석’을 떠나 별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제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석하셨다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창작자를 욕할 때는 다들 이 기준에 의해 행동한다.

그런데 이 기준을 따른다면, 뒤집어 말하면 정중식씨의 해명의 ‘무식함’과 ‘비윤리’를 아무리 까뒤집어 봤자 그의 노래에 대한 조치의 적절성은 달라지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리들 정중식씨의 해명에 집착하는지.

창작물을 비난할 때엔 창작자의 변명에 귀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 와 창작물에 대한 조치가 적절했는지를 물으니 그 물음을 던지는 창작자의 표현에 천착하여 벌떼같이 달라붙는 건 도대체 뭘까.

인간 인지가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일부야 그럴 수 있다지만 일군의 집단이 단체로 그러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제대로 말리는 사람 없이 그걸 ‘공론’처럼 소비하는 건 정말로 뭘까. 주관적으로 엄청 똑똑한 척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핵심적 문제 건너뛰고 ‘정중식 발언’만 비판한 SNS와 언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SNS에서만이 아니라 매체에서도 이 구도가 반복됐다는 것이 이 사태의 큰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사태의 발단을 아예 생략한 <경향신문> 기사뿐 아니라 나름대로 기술한 <국민일보> 기사에서도 핵심적인 논점은 생략됐다.

출처 국민일보 갈무리
출처 국민일보 갈무리

<국민일보> 기사는 “중식이밴드는 공인은 아니지만, 유명인이라는 사실 (…)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영향력이 수입에 직결된 케이스”라면서, “이에 관해 ‘고쳐달라’ 혹은 ‘페미니즘에 관해 공부해달라’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조언은 오히려 유한 것”이라 주장했다.

앞서는 공연 취소 압박이 있었단 사실을 그나마 적었는데, 가치판단을 할 때는 그 행위가 ‘페미니스트들의 조언’으로 축소 혹은 확대됐다. 그 조언에 ‘박사모보다 나쁜년들’, ‘X같네’라고 반응했으니 당연히 중식이밴드의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중식씨는 공연 취소 압박에 대해서 저리 썼지 ‘페미니스트들의 조언’에 대해 쓴 게 아닌데도 말이다.

무턱대고 중식이밴드를 비난하는 이들 중 일부는 어쩌면 정중식씨가 처음에는 ‘넷페미’ 일반이 아니라 공연 취소 압박에 대해 분개한 코멘트를 한 거란 걸 몰랐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선 전후좌우를 가리기 어렵고 벌어진 모든 일이 실시간으로 널브러진 상태에서 사태를 지각하니 말이다.

그런데 매체에서 사태를 정돈해서 기술하면서도 정중식의 불만을 ‘페미니스트들의 조언’에 대한 것이라 정리해버렸으니, 아예 ‘넷페미’란 사람들에게 더 결집해서 정중식씨를 비난하라고 선동한 셈이다.

그걸 ‘유명인’, ‘사회적 영향력’, ‘수입’이란 말로 정당화한다. 뮤지션으로서의 중식이밴드의 사정은 분명 슈스케 이전보다는 나아졌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와 같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중식이밴드의 태도보다 옳지 않은 것이 이와 같은 편향적인 접근이다. 갈등당사자 중 한쪽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판단을 생략하고, 그 문제 제기가 일으킨 소란만을 다루며 정중식씨가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문제를 충분히 다뤄주지도 않고 문제를 제기한 이만 ‘나쁜 놈’이 되니 이만저만 억울한 것이 아니다.

창작물에 대한 제제 방식은 다양하다. 국가권력의 차원에선 발매금지, 수정유도, 등급지정, 허용 매체지정 등의 방식이 있을 거다(상당수 자유주의자는 앞의 두 개는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시민사회는 그보다 폭넓은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의 제재를 고민할 수 있다. 이 경우엔 제재기준에 대한 (사회적인, 혹은 문제가 된 영역 내부 구성원의) 합의가 중요하다. 이런저런 것들이 다 통하지 않는 경우엔 소비자가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정의당과 협업한 게 아니면 큰 문제가 없다더니?

중식이밴드의 문제가 된 노래들은 이미 음원 발매 되었고 그 영역에서 권리침해를 당하고 있지는 않다. 등급지정이나 공중파방송 허용 등의 영역으로 간다면 그 영역의 기준에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야동을 보다가>는 19금 판정을 받았으며 공중파방송에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지난 3월에서 4월에 일어난 논란은 시민사회 수준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도 어떤 이들은 중식이밴드의 노래 자체가 심각한 여성혐오이며 허용되어선 안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더 많은 이들은 그런 노래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시된다기보다는 정의당이라는 진보정당과의 협업이 문제였다고 보았다. 정의당에서 4월 2일에 나온 <중식이밴드 논란에 대한 여성위원회의 공식 입장>의 일부를 발췌하자면 이렇다.

“(…) ‘중식이밴드’가 여성혐오 밴드인가 아닌가, 여혐으로까지 해석하는 것이 과도한지 아닌지 하는 등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다만 총선용 테마송으로 채택한 노래가 아니더라도 ‘중식이 밴드’의 자작곡의 일부가 대중들이 보기에 성차별적이며,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내용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당은 이번 선거송을 ‘중식이밴드’와 공식협약을 맺는 과정에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출처 연합뉴스
출처 연합뉴스

정치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인 문건임은 고려한다 하더라도, ‘중식이밴드의 정의당과의 공식협약’을 주로 문제시한 입장이다. ‘중식이밴드’를 ‘여성혐오 밴드’라 단정하는 데엔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봤다. <여성신문> 기사와는 달리 말이다.

그런 지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당시 문제 제기의 대상이 돼야 했던 건 중식이밴드가 아니라 정의당이었다. 해명해야 할 건 정의당이었지만 정중식씨는 정의당이 피해를 볼까 봐 입을 열었다.

주체도 이유도 요구도 보이지 않는 ‘소비자 행동’?

4월 1일 자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정중식씨는 “정의당은 중식이밴드의 노래를 사용한 것이지, 중식이밴드가 정의당이 아닙니다. 여성 혐오성으로 의심되는 노래를 부른 것은 중식이밴드지 정의당이 아니고요.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을 지지했다가 피해만 준 것 같아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정중식씨는 당시 해명 글에서 본인이 여성혐오는 아닌 것 같다고 주장하다 트위터 등지에서 ‘무식’과 ‘무지’를 조롱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롱의 기조는 이번 논란에서도 이어졌고, SNS 유저들이 자신들의 논점 일탈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됐다.

핵심적 문제만 따진다면, 지난 정의당 선거송 논란 당시의 입장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은 “중식이밴드가 정의당의 선거협약 대상으로선 부적절하지만, 인디밴드 공연시장에서 제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황당하다.

‘소비자 행동을 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니냐’란 말은 답변이 아니다. 그렇게 답변하는 것은 “도대체 내 트윗 어디가 국가안보에 저해가 되는지를 알려주시오”라고 물었는데 “국가안보에 저해가 되면 트윗 좀 규제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답하는 것과 같은 논리구조다. 정말이지 많은 소비자 행동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의 적절성을 판단해야만 한다.

이것을 불매운동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그저 개인적으로 소비를 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 공연 취소 압박을 하는 것은 훨씬 더 엄중한 제재다.

또한 불매운동이 창작자에게 압력으로 작용하려면 1) 불매하는 집단과 그 이유가 명확하고 2) 요구가 구체적이며 3) 창작자가 그 요구를 수용할 경우 불매운동이 철회될 거라는 전망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불매운동할만한 이가 그들밖에 없는 게 아니었다면 누구에게 얻어맞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야동을 보다가>만 문제 삼는지, 다른 몇 개를 같이 문제 삼는지, 특정한 성격을 지닌 행사에만 나오지 말라고 비토하는지, 아니면 모든 노래가 모든 행사에 울려 퍼지는 것에 대해 비토하는지 알 길이 없다.

트위터 유저들의 오프라인 ‘집단 블록’

정중식씨가 분개하는 것은 지금처럼 모호한 상황에서 ‘중식이밴드의 모든 노래가 모든 행사에 울려 퍼지는 것에 대해 비토 ’당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다면 정당한 분노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사회적 배제에 대해선 대처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지 않나? 그렇기에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지웠다. 그런데 거기서도 사람들은 그 분개 자체와 표현을 문제 삼았다. 뮤지션이 무대를 취소당하는 공포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러면 답이 없다. 논의는 사라지고, 오프라인 영역으로 튀어나온 트위터 유저들의 일종의 ‘집단 블록 무력행사’만이 남았다. 한 번 자신들이 정한 선 밖으로 벗어나면 얘기를 듣지도 않는다. 정중식씨의 페이스북 해명 글은 ‘신고 ’당하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한 논자들은 공격받는다.

SNS 시대이므로 조직화를 결의하지 않은 복수의 시민이 우연히 뭉쳐서 이런 일이 전개됐을 거로 생각한다. 트위터에서 흔히 보는 ‘블록’한 후 ‘내가 블록 한 사람 글 띄우는 이 모두 블록’을 히스테리적으로 시전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게 집단으로 일개인에 대해 이루어진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트위터에서 그럴 때와는 달리, 한 음악밴드의 생계와 존속 여부가 달린 문제다. 그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항의가 터져 나온 데도 그렇게 무성의하게 처리해도 되는 걸까? 항의를 거듭해도 문제에 다가서지 않고 조리돌림만 반복해도 되는 걸까? SNS뿐만이 아니라 매체조차 그 정도 인지에서 머물러도 될까?

출처 Mnet
출처 Mnet

정중식씨가 쓴 가사나 글들에서 문제를 느낄 수 있다. 나만 해도 슈스케 이후 그들의 노래를 찾아봤을 때 모종의 불편함을 느꼈다. <야동을 보다가>에선 그런 소재를 창작의 영역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Sunday Seoul>에선 ‘성형’과 ‘성매매’가 튀어나온 방식이 부적절하다 생각했다. <좀 더 서쪽으로>는 ‘된장녀’를 묘사한 노래였지만 오히려 여성 혐오적 화자를 끌어들여 있을 수 있는 세태를 보여줬다고 봤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비평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규제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해선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성혐오’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여성 혐오적 화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의 현실성이 있으며, 그 주인공과 창작자를 동일시한 비판은 난감하다 생각했다. 한편으론 창작자가 그 주인공에게 강하게 감정 이입할 경우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이의 판단은 나와 다를 수 있다. 이 노래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존속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어느 정도 수준의 제재를 취해야 할지 논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논의가 모이면 공론이 된다. 웹에서도 할 수 있다면 가장 좋고 그게 어렵다면 매체가 파편화된 논의의 핵심을 잡아야 했다.

논의가 없는 곳에선 ‘사과’도 ‘해명’도 무소용했다

문제는 지금의 이 논란이 그러한 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거다. 진행될수록 정중식씨 개인의 인식만 비판될 따름이며, 그러면서 중식이밴드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허용된다는 식으로 잘못 정리된다.

정중식씨는 지난 3월의 논란 이후 반성과 해명의 글을 올렸다. 거기에 대한 일군의 조롱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 문제가 평소 인지가 없던 이들도 문제 제기를 받고 성찰하면 금세 본인들이 원하는 ‘정답’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취급했다.

당시 어떤 이들은 ‘바로 해명 글을 올리지 말고 공부부터 하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번 논란 이후 한 인터뷰에서 정중식씨가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기에 이번 논란에서 올린 글을 보곤 ‘페미니즘 공부하지 마라’는 조언이 대세가 됐다. 종잡을 수가 없다.

공부하든 성찰을 하든 개인의 고민과 생각은 자신의 결을 따라 성장해간다. 피드백과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렇더라도 처음부터 본인들이 원하는 ‘정답’을 내뱉을 수는 없다. 공부 여부 떠나 그것만 내뱉으라 요구한다면 ‘받아쓰기’ 강요다.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정중식씨가 ‘노동계급’인지 ‘빈곤남’인지 혹은 ‘보편적 남성’인지 ‘보통의 남자’인지 논란은 이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사실은 경제적 형편이 좋든 교육을 더 받았든 주변부 문화를 즐기든 그와 같은 ‘받아쓰기’ 강요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상식’이란 말이 운동의 어휘가 된 세상이 되었지만, 애초 누구에게나 그리 명명백백한 문제라면 ‘운동’이나 ‘소통’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까짓 거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한 번 받아쓰면 되는 거 아니냐”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다.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지만, 그런 원칙 내다 버리고 그렇게 한다 해도 문제다. 다른 인디밴드의 이런저런 사건에서도 드러난 일이지만, ‘받아쓰기’한다고 살아남지도 못한다.

그저 ‘낙인’이 찍힐 뿐이다. ‘낙인’ 이후엔 배제다. 정중식씨도 정의당 선거협업 논란 이후 후일담에서 <오마이뉴스>에서 기자가 애써 ‘페미니즘 공부하고 있다’고 정리했을 때는 극히 일부에서 찬탄도 받았다.

(당시 어떤 이들은 정중식씨가 정의당보다 낫다는 어이없는 말도 했다. 정중식씨가 이번에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면, 진보정당 운동은 21세기가 개막하기 전부터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가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의 인지가 이토록 편의적이다. 딱 자신들을 편든 그 순간만 칭찬한다. 그게 아니면 그동안 어떤 태도를 보였든 그냥 욕한다)

출처 오마이뉴스 갈무리
출처 오마이뉴스 갈무리

그래도 배제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 배제에 비명을 지르니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지 않고 그 비명에 다시 ‘여혐’의 딱지를 붙인다. 본인들은 매우 협소한 장에서 하는 일이기에 ‘폭력’이 아니라 믿지만, 그 장은 점차 더 커지고 있고, 인디밴드 가수처럼 내구성이 떨어지는 이들부터 나가떨어지고 있다. 매체도 이를 부추긴다. 황당한 세상이다.

‘받아쓰기’ 강요할 때, 무엇이 생길까

지금 그와 같은 ‘받아쓰기’ 강요를 하거나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몇 년 전의 자신을 만났다고 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여성혐오’란 단어가 대중적으로 이토록 폭발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미국에서조차 최근의 유행으로 안다. 한국 트위터를 본다면 지금부터 3년 전으로만 가더라도 이렇게 쓰이지 않았다. 더 길게 본다 한들 5년이다.

결국, 지금 난리 치는 그들은 그런 강요의 분위기가 없거나 약할 때, 지금의 자신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금 늦게 시작하는 이들은 그들보다 더 혹독하게 당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들은 ‘판관’으로 자리 잡았는데, 뒤에 오는 누군가는 본인들의 몇 년 전과 비슷하게 시작했는데도 ‘배제’당해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사다리 걷어차기’일까?

페미니즘 담론은 한동안 더 번성할 것으로 보이지만, 갈수록 이미 형성된 집단의 요구에 온전히 순종하는 이와 극렬하게 거부하는 이로 양분되고 있다. 주체적인 인간이라면 그 양자택일을 따르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으나, 그런 경우 침묵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정중식씨 계정 밑 댓글을 봐도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필요 없다고 믿는) 극렬한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최근의 운동 조류는 별생각이 없는 많은 이들을 그쪽으로 등 떠밀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고 실제로 등 떠밀린다면 ‘그 사람 그럴 줄 알았다’고 반응하면서, 다시금 자신들 요구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넓은 영역의 사람들을 사실상 ‘극렬한 안티 페미니스트’로 치부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물론 이런 방식의 운동 전개 과정에서 소소한 개인들이 썰려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류가 이어지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즉자적으로 가능한 온정적 해석’의 영역을 넘어선 사건이 누적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오히려 운동 종사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넷페미’가 그저 웹상의 고무된 사람의 다발에 불과하다면, 그 조류에 그토록 뜨겁게 마음이 술렁이는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라도 말이다.

한윤형

한윤형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안티조선 운동사’(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함께 쓴 책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3년(2012~2014) 간 정치·신문비평 등을 담당했다.
a_hriman@hotmail.com
한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