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이밴드 논란과 퇴행적 진보

중식이밴드를 둘러싼 여혐논란

이달 초 중식이밴드의 리드보컬 정중식이 쓴 페이스북의 개인적 견해가 SNS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올 4월에도 중식이밴드가 정의당 테마송 협약을 맺으면서 그들의 일부 가사 내용이 ‘여성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가 된 가사 내용은 몰카 야동에서 등장한 전 여자친구를 보며 느낀 감상이라든지,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여성에 대한 푸념이라든지, 홍등가의 여성의 처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연민한다든지, 가난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여성에 대한 원망 등이 담겨 있다. 물론 해당 가사 내용은 남성으로서 자신의 성적 판타지라든가 자기연민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런저런 콤플렉스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한편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는 이러한 남성 측의 자기연민과 여성에 대한 심리적 콤플렉스 자체가 ‘미소지니(여성혐오)’의 징후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나는 ‘중식이밴드’를 아낀다, 그리고 비판한다
-중식이 밴드의 가사논란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 칼럼

이런 내용 자체가 미소지니인지에 대한 (꿈보다 해몽 격의) 논란과 별개로, 중식이밴드가 정의당과 협약을 맺은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의당은 기본적으로 ‘이념정당’이며 중식이밴드의 노래나 중식이밴드 자체가 진보적 가치를 대변할 수 없다는 이의제기는 충분히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연합뉴스
출처 연합뉴스

그렇다면 중식이밴드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진보이념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창작활동을 한다. 두 번째, 진보이념에 대한 보다 더 철저한(?) 학습 뒤에 이념적 기준점에 합격하는 창작활동을 한다.

지난 4월경의 논란 이후 중식이밴드의 보컬이 공식적으로 표명한 입장(<요즘 페미니즘 공부합니다>)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페이스북에서 정중식은 최근까지도 익명의 항의로 자신이 설 공연 무대를 잃는 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것은 정의당 논란과 결이 다른 또 다른 문제이다) 자신을 변화의 과정에서의 ‘희생자’로 놓는 글을 써 다시 한번 논란이 된다.

그는 여기서도 다시 한번, 자신이 노래하는 가사 내용이 ‘보통의 찌질한 남성’에 대한 노래이며, 이것이 누구에 대한 비하나 혐오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결국, 그의 페이스북 댓글 창은 ‘페미니즘 공부를 더 하라’는 비판자와 이를 반박하는 옹호자들로 뒤엉켜 난장판이 된 바 있다.

설상가상으로 <경향신문> 최민영 기자는 이에 관해 정중식에게 페미니즘은 더 배워야 한다는 취지의 기사를 올리며 논쟁에 밥숟가락을 올린 바 있다. 정의당 테마송 논란에서 하차한 것은 그렇다 쳐도 이번 경우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출처 경향신문 갈무리
출처 경향신문 갈무리

재밌는 것은 SNS에서의 중식이밴드를 둘러싼 논쟁이 비판이든 옹호든 이념적 잣대를 가지고 행해졌다는 것이다. 혹자는 중식이밴드가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빈곤청년이 철저한 이념학습과 고민을 할 여유 따위는 없는 세태를 솔직하게 다루었을 뿐이라고 변호한다. 그러나 애초에 중식이밴드가 노동계급의 빈곤청년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이에 중식이밴드를 둘러싼 지난날의 논쟁을 몇 가지 키워드를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키워드 #1. 정치적으로 올바른 예술?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이뤄진 검열과 별개로 최근에는 ‘정치적 올바름’을 잣대로 한 일부 예술작품들에 관한 검열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한 강좌에서 가르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겁탈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주장한 학생에게서 항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 결국, 해당 교수는 대학 당국으로부터 성 인지(양성평등) 감수성 훈련 강좌를 듣도록 권고받았다. 비슷한 논란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도 일어난 바 있다.

일부 북유럽 국가에서는 영화 <E.T.>가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악영향을 준다며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렸다. SNS에서도 <B사감과 러브레터>나 <장화홍련전> 같은 문학작품이 여성혐오 성향을 담고 있으므로 교육 현장에서 규제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 적이 있다.

참고로 앞의 오비디우스 논란에 대해 제리 코인이라는 시카고 대학교수는

“폭력과 혐오로 말할 것 같으면, 그건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삶의 일부인 것만큼이나 문학의 일부다. <죄와 벌>?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위대한 개츠비>?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라며 대학의 결정을 꼬집고 있다.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참조)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이뤄지는 작품에 대한 검열의 논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존속살해나 묻지마 범죄를 겪은 피해자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작품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다시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같은 방식의 논란에서 되짚어 봐야 할 것은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성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과 혐오 그리고 차별을 ‘포함’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본질적 기능이다. 물론 거기에는 해로운 요소들이 있고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유해성’이라는 기준으로 검열한다면 과연 ‘비평’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애초 중식이밴드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평이라는 것도 그들의 가사가 비평가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해로운 ‘현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가능했다. 같은 이야기를 일본 근대문학인 남성들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평으로 가득 찬 우에노의 <혐오를 혐오한다>에 대해서 되물을 수 있다.

키워드 #2. 퇴행적 진보와 언론

퇴행적 진보라는 용어는 미소지니 만큼이나 보편적으로 합의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소개하자면 퇴행적 진보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진보진영은 그동안 보수적인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 특히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왔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점차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표현의 자유 등에 관한 캠페인만으로 이념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자, 진보진영에서는 정반대로 정치적 올바름을 잣대로 사회적 검열권을 요구하는 형태의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령 2014년 북미권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게이머즈 게이트’ 와중에 이 같은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일부 성인게임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묘사가 여성과 약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부추긴다는 문제 제기와 더불어 게임산업에 대한 광범위한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페미니즘의 이름을 빌려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과거 북미에서는 1990~2000년대에도 종교계와 학부모단체를 중심으로 게임과 대중문화 내의 폭력묘사가 학생과 어린아이들의 모방범죄로 이어진다며 검열을 촉구하는 주장이 이미 이뤄졌고, 이것에 대해 진보진영과 학계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사실관계에 관한 반박을 한 적이 있다.


-퇴행적 좌파에 관한 설명

이처럼 이념적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과거에 이미 스스로 합의한 상식과 사실관계를 무위로 돌려버리는 것을 퇴행적 진보라고 부른다. 정의당과의 협약의 적절성과 별개로, 개인의 SNS 계정에 찾아가 중식이밴드의 노래를 여혐으로 낙인찍고 조리돌림 하는 일군의 십자군들과 이를 비판 없이 받아 적는 일부 진보언론 역시 이러한 ‘퇴행적 진보’의 대표적인 증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중식이밴드의 ‘야동을 보다가’에는 유출된 몰카 야동의 피해자인 전 여자친구를 보고 느낀 관음증적인 감정(상대 남성에 대한 분노와 관음적 쾌락 그리고 전 여자친구에 대한 연민 등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는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이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를 ‘정당화’한다며 비판한다. 확실히 몰카 유출 자체도 범죄이며 개인 사이에서 유출된 몰카를 본다는 행위 역시 윤리적으로 비판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 상황을 ‘있을 법한 일’로 상정하고 거기서 마주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노래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몰카범죄와 리벤지 포르노를 ‘정당화’하고 부추긴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면, 바람과 불륜을 노래하는 가사와 문학작품도 바로 똑같은 기준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중식이밴드의 가사가 리벤지 포르노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잣대에 의해 대중문화를 검열하고 건전가요를 권장했던 군사정권의 행위 역시도 그 고상한 윤리적 민감성을 십분 발휘해서 이해해줘야 한다. 가령, 불륜을 묘사하는 작품들은 가정파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을 마치 보편적인 일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나쁘지 않은가?

[지금 SNS에선]보통 남자
-퇴행적 진보의 증상을 전형적으로 드러낸 경향신문의 기사

키워드 #3. 이중잣대와 공론장의 사유화

이처럼 퇴행적 진보는 바로 이중잣대의 문제와 이어져 있다. 혹자는 각자가 ‘불편한 것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정치적 올바름을 잣대로 행해지는 검열을 옹호하기도 한다. 물론 불편한 것을 보지 않을 권리는 소비자 운동에서는 유효할 수 있다. 굳이 돈을 내고서 자신이 싫은 것 불편한 것을 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식이밴드에 대한 비판자들은 과거 메갈리아 옹호 논란이 일었던 김자연 성우에 대해 <클로저스> 게임 유저들이 보이콧을 한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마찬가지로 정치적 맥락에서도 일부 정의당 당원들이 중식이밴드가 자기 정당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 싫다면 그들 역시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김자연 성우의 메갈리안 후원 티셔츠 인증 트윗
김자연 성우의 메갈리안 후원 티셔츠 인증 트윗

한편 김자연 성우도 그렇고 중식이밴드가 어디에서 누구를 상대로 작품활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지는 본인들이 판단할 문제이지 타인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가령 성우가 게임에서 하차한 이후에도 해당 게임 유저들이 그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의 사상을 검열한다면 그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현실은 일개 게임작품이나 일개 정당보다 더 넓다.

이처럼 현실은 어떤 이념집단의 뒷마당 내지는 소위 ‘나와바리’가 아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현장이나 공론장은 여러 정치세력이 자신의 주관을 표명하는 자리이며 누군가 특정인을 검열하거나 몰아낼 권리는 없다. 만일 그럴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의 것을 문화예술계 전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DJ DOC의 과거 베이비복스에 대해 한 부적절한 발언을 빌미로 그의 최근 가사 내용에 대해서도 여혐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DJ DOC가 불편하며 집회현장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출처 페미당당
출처 페미당당

마찬가지로 박근혜에 대한 탄핵에 동조한 수많은 시민 중에서는 이석기의 석방과 통진당 해산 무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며 이들을 집회현장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한상균 노조 위원장의 석방요구와 민주노총의 민중총궐기 요구사항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차이와 불편함을 감내하고 직면하면서 거리와 광장에 모인다.

그러나 지금 ‘불편해할 권리’를 말하며 사회적 검열권을 요구하는 상당수의 사람은 단순히 불편함을 말할 권리를 넘어서 공론장과 광장을 사유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촛불시위 때 특정 정치단체의 깃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폭력을 행사했던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행위들은 공론장과 시민사회를 일종의 자신의 ‘나와바리’라고 생각하는 조폭적 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나가며 : 여성혐오는 만능의 요술봉이 아니다

최민영 기자를 포함해서 타인에 대해 이념적 학습을 권하는 사람치고는 사건과 개념의 디테일에 대해 예민하게 고민하는 경우는 그리고 많지 않다. 앞서 보았듯이 이들은 흔히 자신이 직접 마주치지 않을, 타인이 누리는 무언가에 대한 검열과 규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손쉽게 주장한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에서 검열과 규제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한 자기모순에 대한 비난(퇴행적 진보) 역시 자기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무엇보다 어떤 작품이나 노래 가사 자체가 여성혐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단 미소지니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거나 잘 정의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미소지니 담론은 결국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여성에 대한 남성 측의 혐오감 내지는 심리적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에 기초해 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일종의 유사-정신분석적인 심리적 환원주의이다.

그러나 현실의 불평등, 차별 폭력은 누군가의 심리, 주관, 의식이나 무의식적 성향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의식을 교정하려는 교정 당국의 시도를 모방하면서 사회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종교인들이야말로 자신의 의식이 어떠한지 스스로 비추는 거울이 필요하다.

자신의 노래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해야 한다고 중식이밴드를 가르치려 드는 이념진영의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이 과거에 비판했던 행동을 스스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가분

경제학과 석사수료생. 프리랜서 작가.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