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레스토랑 낙인은 알바문제 해결할 수 있을까?

알바노조와 S레스토랑 사건의 경과

트위터와 일부 SNS에서 S레스토랑의 사장이 알바생의 주휴수당을 미지급하며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이슈화가 됐다. 그리고 현재 이 이슈와 논란을 주도하는 중심에는 ‘알바노조’가 있다. 알바노조는 청년 알바생을 일종의 불안정계급(프레카리아트)으로 규정하며 이들을 정치적 각성과 행동의 주체로 이끄는 데 관심이 있는 ‘청년좌파’라는 (前 사회당 계열의)정치조직 외곽단체다.

물론 정치성향과 별개로 알바생의 권익을 향상한다는 취지는 매우 훌륭하다. 문제는 알바권익을 옹호하는 ‘운동’이 인터넷과 SNS에서 제기되고 공유되는 방식이다.

알바노조 홈페이지에는 ‘성희롱 레스토랑 S레스토랑’이라는 내용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으며 현재에도 성희롱을 기정사실로 하는 분위기이다. 지금도 S레스토랑을 대상으로 지속해서 피해증언에 대한 제보를 받는 상황이다.

출처 알바노조
출처 알바노조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후에 드러나겠지만, 이들은 페이스북에서도 업주가 일부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이미 성희롱 건에 대해서는 인권위에 진정했으며 이후 ‘노동청·산업재해·고소 등을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예고했다.

해당 S레스토랑은 메갈리아·워마드라는 사이트 이용자에 대한 출입금지 공지를 SNS에 올렸다는 소문 때문에(해당 업주는 타인이 올린 글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일부 트위터 유저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된 지 오래였고, 그 과정에서 알바생이 피해를 주장한 것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되었었다. 물론 각자의 주장에 석연치 않은 대목도 일부 존재한다.

아무튼, SNS에서 업주에 대한 폭로와 고발이 점입가경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장이 수천만의 돈을 미끼로 피해자에 대한 입막음을 시도했다는 (근거없는)주장이 트위터에서 제기됐다가 삭제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S레스토랑은 대외적으로는 알바생이 주휴수당 지급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성희롱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알바노조의 주장에 맞서며 또 다른 일각의 의혹 확산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현재진행 중인 사건이므로 잘잘못에 대한 판단은 아직 섣부른 시점이다. 다만 현재진행 중인 이 사건에서 지방의 작은 레스토랑의 사장을 SNS와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매체에서 착취와 성희롱이나 일삼는 파렴치한 업주로 규정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언론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전형을 만들어내면서 피해자에 공감하는 측의 공분을 자극하는 보도행태는 매우 오랜 관행이었다.

<한겨레> 13일 자 기사 알바노조, “레스토랑 사장, 알바생에게 ‘예쁜 엉덩이 다칠라’ 성희롱”

한편 이것이 공분을 매개체로 삼아 사람들을 집합적 행동에 참여시키는 일종의 ‘운동’의 한 양태라면 그런 운동이 얼마나 애초의 목적(작게는 현실의 개선에서부터 크게는 사회변혁)에서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러한 방식의 운동적 문제 제기와 사회고발의 관행을 ‘강자·약자 도식’과 ‘피해자·가해자의 전형 만들기’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쟁점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SNS의 폭로가 지닌 양날의 검

사회적 문제(가령 알바생에 대한 갑질과 착취 등)를 SNS에서 고백하고 폭로할 때 취하는 전형적인 수사적 전략 중 하나는 자신은 어떤 피해자의 ‘전형’이며 이러한 피해를 겪었음에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SNS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심각하게 ‘억압적인 상황’에 직면했으므로 SNS에서 이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 역으로 평소 SNS를 열심히 해오며 그것을 통해 인간관계와 또래를 형성해온 측에서 자신들 내부의 인간관계 갈등을 폭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SNS가 그동안 가로막혀있던 공론의 통로라는 사실로 해석하지만 정반대로 이러한 상황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점은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내부의 여론재판은 진실검증 절차가 부재하며 이에 따른 상호 확증편향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에서의 논쟁은 사실상 화력 과시의 대결로 옳고 그름을 판정한다. 이런 점에서 SNS와 인터넷은 근대적 공론장이라기보다는 중세적 결투 관행에 더 가깝다. 또한, SNS는 본인의 평소 행적이 노출되기 쉬운 장소이다.

출처 알바노조
출처 알바노조

예컨대 SNS에서 피해를 주장하는 측의 진실성이 다른 편의 네티즌에게 의심받는 가장 큰 이유는 평소에 SNS를 열심히 할수록 그가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언행을 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번 사건의 피해주장자도 어떤 캐릭터에 대해 세컨드계정에서 한 다소 외설적인 발언이 네티즌들에 의해 인터넷상에 ‘박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현실에서라면 이런 평소의 일상적인 언행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터넷에서는 문제가 되며 강으로 가져가야 할 문제를 산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연유에서 S레스토랑 사건은 트위터페미-알바노조와 평소 넷페미에 반감을 품은 반메갈리아 성향 커뮤니티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SNS와 인터넷 공간은 양날의 검이다.

강자·약자 도식에서 흔히 놓치는 점

통상 ‘약자를 편들고 강자를 배척한다’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사안에 반응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대중은 누가 강자고 약자냐의 문제보다는 무엇이 사실이고 아닌지를 더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알고 난 다음에, 어떤 것이 강자에 의한 잘못임이 드러나면 그 이후에야 더욱더 큰 대중의 공분을 산다. 그러나 그 이전에 대중은 그래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냐는 것을 먼저 묻는다.

가령 건물주 리쌍과 우장창창 사장 간의 임대차 분쟁에서 일부 언론이 계약과정에서 일어난 일부 문제(주차장 공간의 무단이용)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자 우장창창 측이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은 바 있다. 그러나 언론과 이념진영은 자신의 보도행태를 돌아보기보다는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여론을 일종의 계몽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다.

출처 채널A
출처 채널A

둘째, 강자·약자 도식이 지닌 명백한 비일관성이 있다. 예컨대 우장창창-리쌍 임대차 분쟁사건에서는 강자와 약자의 도식 아래 임차인은 착취 받고 억압받는 소상공인의 ‘전형’이 됐다. 정반대로 S레스토랑 사건에서는 한 소상공인이 알바생을 착취하고 성희롱하는 파렴치한 업주의 ‘전형’이 됐다.

그렇다면 이 경우 도대체 왜 이념적 운동진영은 전자의 경우에서도 임차인이 꼭 무고한 피해자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을까. 대중은 이처럼 그동안 반복되어왔던 손쉬운 대립구도(강자는 악하고 거짓되며 약자는 선하고 진실하다)에 의구심을 품는 것이다. 물론 강자가 가해자가 되고 약자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대중의 절대적인 판단척도가 아니다.

셋째, 강자·약자 도식에 따른 가해자·피해자 만들기 서사가 정말로 운동권이 기대하듯이 집합적 행동과 참여를 불러일으키느냐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피해자’가 되는 것에 대한 각자의 내밀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이 좌파와 우파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공통적인 정치적 문법이 됐다(프랭크 푸레디, <공포정치>). 단 무엇에 대한 피해자가 되며 어떻게 피해자가 될 것인가, 라는 이런저런 시나리오에 따라 진보와 보수가 나누어질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 아래서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가 인터넷에서의 이런저런 격렬한 의사표시와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가령 “냉소적 반응이 자주 비판과 혼동되고, 정치과정과의 단절 경향이 때때로 비판적 시민의 책임 있는 행동으로 찬양(같은 곳)”된다.

피해자 담론에 대한 고착은 당연히 집합적인 정치적 행동보다는 냉소와 환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말하면 무엇을 해도 여성과 소수자는 호모 사케르(모든 권리와 발언권을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쓰는 유식한 말)일 수밖에 없으며, 무엇을 해도 보통의 시민들은 정권과 권력의 감시와 음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듯 어차피 무엇을 해도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정치에 대한 진지한 연루는 회피하고 각자의 SNS 계정에서 자신의 개인서사에 몰두하는 경향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피해자-되기에 입각한 공포정치는 정치적 영역에서 퇴각하는 동시에 가해자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무언가에 대한 지극히 사적 영역(개인의 SNS 계정)에서의 분노표출이라는 분열증적인 반응을 초래한다. 사실 이러한 식의 분열증적인 현상을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요사이 진보언론과 학계의 관행이기도 하다.

이랜드 임금체불 사건

이 와중에 유명 외식업체인 애슐리를 포함한 이랜드의 외식업 계열업체들이 ‘임금 꺾기(정해진 근무 시간 외의 근로시간을 요구하거나 휴식 및 대기시간을 임금에서 빼는)’등의 수법으로 그동안 84억원가량의 알바생 임금을 갈취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것은 이미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며 이랜드 측에서 공식해명과 사과를 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해당 업체들이 지금까지 낸 과징금은 고작 2800만원에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임금체불에 대한 얼마만큼의 과징금과 손해배상 금액이 결정될지 지켜볼 일이다.

출처 중앙일보
출처 중앙일보

아무튼, 해당 사건은 그동안 대기업의 부당노동행위나 불공정경쟁행위에 대해서 솜방망이 처벌만을 줄 수밖에 없는 법적·제도적 한계를 여실히 노출했다. 해외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등을 통해 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사회와 개인에게 피해를 준 액수 ‘이상’의 벌금이나 배상금을 물리는 제도가 존재한다.

물론 이 사건 역시도 SNS와 인터넷 일부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런데 사실 이랜드가 기독교 계열의 기업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SNS에서의 단골 메뉴인 ‘폭로’와 ‘자기 고백’ 그리고 ‘가해자·피해자의 전형 만들기’ 서사의 흥미롭고 지속적인 소재가 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정작 가해자와 피해자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와 그것을 둘러싼 스토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임금 꺾기 등의 관행은 대다수의 알바생이나 노동자들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인격과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피해의 규모가 대규모화될수록 드라마의 소재는 더욱 희박해진다. 참고로 은수미 전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러한 이랜드의 임금 꺾기 등의 관행마저도 다른 대기업에서도 이미 만연하며 유독 이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을 한 바 있다.

<노컷뉴스> 22일 자 기사 이랜드는 건드리고 재벌 대기업은 놔두고?

대안 모색에 관한 의제를 빼앗기고 있는 운동권

이처럼 현실의 사회문제는 사회적 통제와 정책 그리고 입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 모색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치적·사회적 참여는 그 가해자와 피해자의 전형이 잘 보이지 않을수록 점점 추상적이고 덜 흥미롭고 덜 매력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정책과 대안 모색에서의 추상론과 대중의 구체적 관심을 매개하는 것이 운동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지금 SNS를 경유한 운동의 역할은 정반대의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운동은 세를 불리기 위해 폭로를 통한 가해자·피해자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가해자·피해자 서사에 입각한 폭로의 어떤 경우는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정책이 효과가 있고 효과가 있지 않을 수도 있듯이 말이다.

출처 알바노조
출처 알바노조

한편 만일 정책이 효과적이지 않을 경우 다른 정책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광우병 괴담의 경우에서처럼)사실이 아닌 것에 이미 많은 사람이 많은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한 것으로 드러날 때 그 이후 생겨나는 환멸감과 냉소는 치유하기가 어렵다.

특히 가해자·피해자의 전형을 폭로하는 경우 무엇이 대안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보다는, 누가 진짜 피해자이고 억울한 사람인지에 대한 문제가 초점이 된다. 후자의 논쟁에 연루되는 순간 모든 것을 건 격론이 시작되며 전자의 문제는 관심사에서 멀어진다.

이미 진보진영과 언론은 한번 리쌍-우장창창 임대차 분쟁에서 그러한 함정에 빠진 적이 있다. 물론 개별적인 사안에서 억울함과 피해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 해결로 나아가기 위한 공익적 제보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운동세력과 진보진영이 선정적 폭로에 매몰되면서 실제 현실을 바꾸는 논의들과 의제들을 제도권 정치와 관료들에게 점점 빼앗기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만일 그들이 폭로의 결과에 대해서도 제대로 책임지는 자세를 평소 보였다면 이것은 대중의 입장에서도 덜 유감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박가분

경제학과 석사수료생. 프리랜서 작가.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