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이 문제다’라는 사람이 문제다

법치(法治)와 인치(人治) 사이 

기원전 207년. 한 고조 유방이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했다. 병사 10만명이 화려한 아방궁과 함양의 거리를 보고 있을 때, 소하는 진나라 승상부(丞相府)로 달려갔다. 그리고 소하는 진나라의 법률인 진률(秦律)과 역사서, 각국의 호적대장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한 고조 유방은 함양 백성들에게 법삼장(約法三章)을 약속했다. 진나라의 엄한 법률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속내는 소하의 행동처럼 체계적인 통치를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른바 약법삼장은 ‘진나라’와 다른 정치를 한다는 안티테제(Anti-These)였지 본질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진시황의 법치는 제국을 중앙 집권화하는 최초의 시도였다. 그런데 진시황의 오판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시황제’ 스스로 전국의 문화와 전통, 풍토와 풍습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상황에서 자신의 생애에 완성하려던 조급함이 부른 참사였다.

진시황릉
진시황릉

진승과 오광의 난 또한 그러했다. 한 고조 유방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같은 이유였다. 각 지역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채, 기계적인 지시를 내린 중앙정부는 민심의 역린을 건드렸다.

전국시대 진나라는 진왕 영정이 혼자 결정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정보가 온전했다. 그러나 새롭게 정복한 국가들은 시황제가 이해할 수 없는 관습과 다른 도량형, 다른 문자들의 세상이었다.

진왕 영정은 면대면(face to face) 사회를 다스리다 졸지에 형이상학적 원칙에 의한 통치를 하는 황제가 되었는데, 그러기엔 진시황의 생애가 너무 짧았다. 시황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민중의 행위양식을 제국의 법치 아래 일치시켜야 했다.

그래도 그는 노력이라는 것을 했는데, 바로 죽기 전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진 제국의 정보 결여는 법치의 결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 많은 지식인은 시황제의 폭정을 법가 사상의 근본적 결함과 인덕의 부족으로 여겼다. 즉, 시황제 영정의 인품이 문제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법가 사상은 비록 당대에는 가혹하긴 했으나 이후 한 제국과 중국의 제국들, 주변의 국가들은 오히려 그 법가 사상을 발전시키고, 유교 사상에 포섭했지 해체하지 않았다.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한(韓)나라에 살던 공자(公子)로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태어났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당의 한유를 한자라 불러 헷갈리지 않도록 이름을 통째로 넣어서 한비자로 불린다.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한(韓)나라에 살던 공자(公子)로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태어났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당의 한유를 한자라 불러 헷갈리지 않도록 이름을 통째로 넣어서 한비자로 불린다.

즉, 유가 사상은 ‘인치(人治)’를 강조했지만, 그 운용체계에서는 법가의 것을 전혀 버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진 제국이 멸망한 후 초나라 패왕 항우는 전국을 다시 주나라 시대처럼 돌리려고 했다. 즉, 봉건제도로서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항우는 진국의 법가 사상의 실패를 공식화했지만, 유방은 약법삼장과 달리 ‘점진적 변화’에 무게를 두었다.

그 결과 회하에서 항우가 죽은 다음 재통일한 한 제국은 초기에 ‘군국제도’를 시행했다. 진시황의 법치 결과인 ‘군현제도’와 느슨한 ‘봉건제도’의 결합이었다. 적어도 유방은 진나라의 패착을 ‘인치’의 실패로 규정하지 않았다.

이후 한나라의 법은 점점 발전해서 한 무제에 이르러서는 진 제국의 군현제도를 더욱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차이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훗날 후한 시대 제갈량은 유장의 서촉을 정벌하고 법정과 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군사인 제갈량이 서촉의 법을 엄하게 선포하자 법정은 한 고조 유방의 ‘약법삼장’ 이야기를 꺼내며 민심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제갈량은 한 고조와 소하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법은 백성의 사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에 그 법이 가혹했던 것이고, 당시 백성들은 지쳐있었다. 한 고조 유방은 그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약법삼장’이라는 말을 꺼냈지 사실 법을 완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완연한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언제나 ‘왕도정치’를 강조했고, 군왕이 곧 군자가 되는 통치 체계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사실 조선의 실제 통치 원리는 ‘제도’였다.

초창기 정도전의 조선은 ‘고려’보다 더 정밀한 법치 국가였다. 사실 역사에서 통치 시스템은 완화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문명이 발전하고 복잡해지는 만큼 시스템과 ‘법치’의 수준도 복잡해지고 깐깐해졌다.

그리고 다시금 현대를 되돌아보면 현대 문명인은 ‘인간의 심성’보다는 타인의 예외적 행동에 대한 보복과 보상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투쟁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는 작업을 입법부라는 기관을 통해 하고 있다.

출처 SBS 힐링캠프
출처 SBS 힐링캠프

최근 작금의 상황을 제도를 운용하던 대통령과 권력자들의 자질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사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해법은 언제나 시스템에 대한 보완과 법치의 강화였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이며, 예상되는 예외적 행동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법’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사람의 문제일까? 예외적 행동을 하는 인간의 존재는 영원불멸의 상수이다. 그러나 제도는 그 예외적 행동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장치이다. 예외적 행동을 하는 현상이 있다면 그 장치를 의심해봐야 한다. 바로 그것이 제도적 개선인 것이다.

임형찬

'정치하지마라' 저자
bucurest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