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시스템이야”

조조(鼂錯)에서 시작해 조조(曹操)로 끝나다

한나라 경제(景帝) 당시 조조(鼂錯)라는 박사가 있었다. 조조는 대표적으로 추은령(推恩令)의 기원인 삭번 정책과 매작령(賣爵令)을 경제에게 건의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추은령은 제후의 적장자 이외의 아들에게도 토지를 나눠주고, 열후로 승격시키는 일종의 제후 권력 분산 정책이었으며, 매작령은 ‘둔전책(屯田策)’으로 흉노와 맞닿은 북방 변방의 곡물 납입자에게 벼슬을 주는 정책이었다.

불행히도 조조(鼂錯)는 추은령 때문에 목숨을 잃었지만, 그가 주창했던 두 정책은 살아남아 한무제(武帝) 때에는 황제가 제후를 완전히 압도하며, 매작령을 바탕으로 흉노 토벌까지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조(鼂錯)의 정책 중 ‘매작령’은 그가 죽고 300년 동안 한나라를 서서히 망쳐가는 정책이기도 했다.

한무제(武帝)
한무제(武帝)

당시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호족 출신으로 태학 등에서 학문을 쌓은 자들 혹은 지방관이 관내에서 우수하다고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 ‘천거’되는 인재 등용 방식이었다. 향거리선제(郷挙里選製)라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기존의 제도도 지방관과의 인적 관계에 의해서 부정이 있을 수 있었으며, 명성이라는 것도 세습적인 성향이 강해 관리가 자의적으로 추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조(鼂錯)의 매작령으로 인해 아예 드러내놓고 중앙정부가 ‘매관매직’을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처음 매작령이 시행되었던 전한 경제와 무제 때에는 곡물을 내는 사람이 전쟁의 공로를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변방을 개간한 호족들이 대량의 전비를 대신 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변방이 아닌 내지의 백성들은 세금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매작령은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민자사업 같은 개념이었다. 보급품 민자사업에 거액을 투자해 관직에 오른 호족들은 점점 그 권력을 이용 더 많은 착취를 하고, 그를 위한 대농장 경영을 하기 시작했다.

한나라 무제 이후 백성들은 흉노 토벌에 필요한 세금과 인적 수탈, 그리고 매작령으로 관직에 오른 호족들의 수탈이라는 삼중 수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한이 망하고 신나라 왕망을 거쳐 후한이 성립했어도 이러한 ‘매작령’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한의 광무제 또한 제후였지만 대토지를 소유한 대호족의 이해를 대변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후한 말기에는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후한에서 매작령이 횡행한 것은 다름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향거리선제’의 자의성 때문이기도 했다. 추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고, 전시 상황처럼 ‘공로’를 쌓을 만한 사건이 없을 때는 주로 유력자와 인맥이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 결과 황후나 태후의 가문이 권력을 쥐게 되고, 군권과 인사권을 쥐게 되는 척신정치(戚臣政治)로 황제의 권력은 급속도로 위축되는 것이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냐면 후한 시대 ‘양태후(梁太后)’ 가문의 양기(梁冀)는 황제인 질제(質帝)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고 황제를 죽여 버리기도 했다. 어차피 조정에서는 자신의 추천으로 들어온 관료들이 다수였으니 외척 대장군이 황제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위축된 다음 황제 환제(桓帝)는 향거리선제에 의한 관료는 양기의 파벌로 보고 매작령을 이용해 우군을 만들기 시작했다. 매작령을 통해 거둬들인 재물은 황제의 내탕금이 되고, 환관들은 호족들에게 관직을 주기 시작했다.

환제는 비로소 양기 척살 후 외척 세력을 일소하고, 황권을 다시 잡았지만, 그때부터는 황제와 환관 그리고 매작령으로 관직을 사들인 호족들이 문제가 되었다. 매관매직과 수탈의 반복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권력을 잃어가는 외척 세력은 태학 출신의 기존 귀족과 결합해 파벌을 형성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청류파(외척과 기존 귀족 세력)’와 ‘탁류파(신흥 환관 세력, 배후에는 황제가 있다)’였다.

후한 말기에 벌어진 ‘당고의 화(黨錮之禍·당고의 옥)’ 사건의 기원은 전한 시대 경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래가 깊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조(鼂錯)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조조(曹操)에서 끝나게 된다. 전한 무제 이후부터 중국은 매관매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조조는 그 가문부터 환관과 관련이 있으며, 그 또한 매작령을 통해 성장한 지방 호족 가문이었다.

영화 조조
영화 <적벽대전> 조조

우리가 잘 아는 후한의 승상이자 위나라 조비(曹丕)의 아버지인 조조는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호족 출신이지만 능력 본위의 인재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나라의 향거리선제와 매작령의 부작용을 막을 새로운 제도를 고안해보고자 했다.

사실 그는 그 해답을 얻지 못했지만 그러한 인재관과 고민거리는 그의 아들 조비가 등극하자마자 실현되었다. 바로 진군(陳群)이 상서(尙書)가 되어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건의하였고, 즉위 원년에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구품중정제(혹은 구품관인법)은 매관매직과 자의적 천거를 방지하고자 하는 제도였다. 구품중정제도 추천제의 일종이지만 중정관이라는 관리가 지방 인재에 대한 향품을 통해 승진할 수 있는 관직 상한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추천이라는 것은 유사했지만, 향거리선제와 달리 상한 관직이 있으므로 향품을 낮게 평가받으면, 고위직에 올라갈 수 없었다는 점이 달랐다. 당시 조비나 진군은 이를 통해 최소한 ‘매작령’으로 인한 매관매직의 관행은 일소할 것으로 생각했다 성품으로 향품을 받아 과거의 평판과 행실이 미래를 결정하도록 하는 매커니즘을 통용시키려고 했다.

물론 이 정책은 결국 향품 9등급을 결정하는 자의성에 의해 금방 변질되었지만 그래도 한나라 시대의 파멸적인 매관매직과 착취의 악순환 메커니즘은 끊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이후 귀족들의 혈연 세습을 공고히 하긴 했지만 향후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공직 인사에 있어서 여러 시사점을 남기는 역할을 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단지 재미있는 과거의 이야기는 아니다. 인사 문제는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국정농단의 핵심은 다름 아닌 ‘인사’였다. 즉, 시스템이 있어도 대통령 권력의 자의적 투영에 의해 시스템이 엉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South Korean President Park Geun-hye bows after releasing a statement of apology during a news conference at the presidential Blue House in Seoul this week. (Yonhap/Reuters)
South Korean President Park Geun-hye bows after releasing a statement of apology during a news conference at the presidential Blue House in Seoul this week. (Yonhap/Reuters)

한때 이 나라에는 ‘인사 청문회’가 없었다. 즉, 대통령이 장관을 내정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인사 청문’ 절차가 생기며, 대통령은 인사 청문회에서 최대한 잡음이 없는 후보를 선별해야 하는 ‘정치적 책임’이 생겼다.

물론 종신 공무원이 아닌 ‘고위 별정직 공무원’의 경우에는 여전히 정무적 추천을 한다. 즉, 정성적 평가와 정치적 자의성(자율성)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제도는 민정수석이라는 역할로 정무적 추천에서 문제가 될 소지를 미리 제거하고, 그 민정수석을 특별감찰이 견제하는 형태로 고안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마저도 붕괴하고 말았다. 장관의 인사마저도 대통령과 그 비선 실세의 지극히 수준 낮은 자의성에 의해 평가되고, 임명됐다. 혹자는 ‘제도’의 실패가 아닌 ‘사람’의 실패로 규정한다지만 설사 ‘사람’의 실패라도 우리는 ‘제도’를 연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바로 또다시 사람이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조(鼂錯)의 실수를 조조(曹操)의 시대에 마무리 지은 역사적 우연. 물론 그 조조의 아들이 대안으로 내놓은 제도는 이후 몇백 년간 부작용을 만들어냈지만 그럴 때마다 제도는 새롭게 고안되어 기존의 오류들을 보완해나갔다는 것이 우리가 참고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싶다.

혹자는 지금의 제도는 문제없다고 하지만 사실 진짜 실패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그 안일함이 아닐까? 이미 바닥에 물은 엎질러졌다. 물병이 깨져 쏟아진 물, 물병을 놓친 것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같은 이유로 다시 물병이 깨지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개혁은 떨어뜨려도 잘 깨지지 않는 물병을 만들자는 고민에서 시작된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이 깨질 것이다. 그래도 계속 궁구해야 하는 것이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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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찬

헬조선 개청년
'정치하지마라' 저자
bucurest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