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빠진 이지혜의 ‘너의 이름은’ 페미니즘적 비평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 논란이 된 성적 코드

<별의 목소리>, <초속 5cm>, <언어의 정원>과 더불어 유려한 작화로 유명한 신카이 마코토가 최근작 <너의 이름은>이라는 작품으로 일본 현지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너의 이름은>은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 5위에 올랐다. 또한 <너의 이름은>은 현재 한국에서도 지브리 계열 애니메이션 이후 오랜만에 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실적을 올린 바 있고 300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국내 개봉 포스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너의 이름은>국내 개봉 포스터

한편 해당 영화에 대해서 다소 ‘뜬금없는’ 성적 코드가 일본 현지에서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논란을 부르며 심지어 국내 일부 SNS 이용자 사이에서는 ‘여성혐오’ 논란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실제로 <너의 이름은>에서 고등학생 남녀가 서로 몸이 바뀌는 에피소드가 담겨있기 때문에 사춘기 소년 소녀가 서로의 몸에 대해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들이 담겨 있다.

그 와중에 남자주인공이 자신과 신체가 뒤바뀐 여주인공의 가슴을 만진다든지 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의 몸으로 변할 때의 성적 상상을 극대화하는 소위 ‘TS 물’이라는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춘기 남성의 호기심이라는 식의 양해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다 쳐도 남성향 오타쿠 계열 서브컬쳐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적 코드 중 하나인 ‘판치라’(치마 속 속옷이 노출되는 장면)라든가, ‘바스트 모핑’(여성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은 신카이 마코토의 팬으로서도 조금 뜬금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은 남성향 오타쿠 문화에서는 흔한 코드이기 때문에 이것을 그 자체로 비판한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만일 남성향의 성적 코드를 그 자체로 비판한다면 왜 같은 잣대로 여성향 오타쿠 문화의 성적 코드를 비판하지 않느냐는, 식의 골치 아픈 남녀대립 및 젠더시비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성적 코드가 내용의 주제의식 자체와 별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브컬쳐의 문법에 익숙하지 못한 관객 측에서는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낳을 수 있다. 심지어 그 성적 코드 중 일부는 과거 작품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요소이기 때문에 신카이 마코토의 팬들 입장에서도 의외라고 생각될 것이다.

물론 어찌 되었든 이러한 성적 코드들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던 것은, 오히려 <너의 이름은>이 앞서 말한 오타쿠적 성적 망상으로 가득 찬 속칭 ‘미소녀 뽕빨물’과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우 게으른 페미니즘적 비평과 서브컬쳐에 대한 단선적 접근

[너의 이름은] 좋아요 vs 싫어요
– 1월 16일 <아이즈> 김봉석·이지혜 <너의 이름은> 평론 기사

이러한 성적 코드에 대한 ‘불편함’을 넘어서 이 작품의 구도와 주제의식 자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해석이 일본 현지에서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이를 그대로 답습한 비평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지혜의 <피해자의 모에화>라는 비평이다. 보통의 의인화와는 다르게 특정 대상을 소년·소녀의 모습으로 귀엽게 묘사하는 것을 ‘모에화’라 한다.

이지혜의 <피해자의 모에화>라는 주장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너의 이름은>이 동경 대지진과 후쿠시마 참사의 피해자(=미츠하)를 모에화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실제로 작품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인터뷰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의식하면서 앞으로는 해피엔딩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과 <너의 이름은>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거기까지이다. 3.11 사건을 염두에 둔 감독의 여러 발언들만을 두고 ‘미츠하=후쿠시마 피해자’라는 단순한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의 이름은>은 피해자의 비극과 상처를 반복해서 다루고 그것에 천착하는 내용이 아니라, 작중 오토모리 마을 사람들이 결국 운석충돌로 인한 참사를 피하게 되는, 그리고 그것을 피하게 되는 과정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평범한 남녀의 노력을 다룬, 일종의 전혀 다른 ‘가능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노린 심리적 위안은 (그것이 손쉬운 것이든 아니든) 작중 캐릭터의 ‘모에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능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사진 가운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사진 가운데)

<부산영화제> ‘너의 이름은’ 감독 “대지진 이후 희망 그리고 싶어”
– 2016년 10월 9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부산영화제 발언

또한 이지혜는 <너의 이름은>이 후쿠시마 피해자를 ‘모에’하게 묘사했다고 말하는데, 작중 인물과 후쿠시마 피해자와의 ‘잘못된’ 동일시는 둘째 치더라도 서브컬쳐의 ‘모에 요소’ 대중문화의 작품상에서 캐릭터에 대한 매력을 부각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모에’라는 요소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덧붙여 말하자면, 모에화란 어떤 캐릭터의 매력 속성에 기대어서 작품의 서사를 전개하는 오타쿠계 서브컬쳐의 문법을 의미한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예를 들어 캐릭터의 전형화된 매력포인트(ex 수줍어하는 안경미소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뜻밖에 츤데레인 여고생)가 있다.

모에화란 그러한 모에 요소를 최대한 부각하기 위해 스토리와 배경과 플롯을 짜는 것과 서사와 극적 장치가 종속되는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작품상에서 캐릭터를 매력적이고 반짝거리게 묘사했다고 해서 그것을 ‘모에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치면 모든 대중문화 창작물들은 다 오타쿠적인 모에 계열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모에화란 작품 자체로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그 배후의 동인지 등 거대한 2차 창작 시장까지 염두에 둬야 비로소 설명될 수 있다(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 대부분 모에 계열 작품들은 2차 창작을 자유롭게 허용한다. 캐릭터의 모에 요소를 더 잘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스토리 라인 자체를 완전히 뒤엎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심지어 원작자 자신이 자기 작품에 대한 2차 창작 내지는 패러디를 한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너의 이름은>의 소설판도 애니메이션 내에서 비어 있는 부분을 보충할 따름이지 기존의 스토리라인과 병행하는 또 다른 스토리(이를테면 같은 캐릭터로 전혀 다른 세계관을 병치시키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시리즈와 비교해 보라)이나 세계관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지혜는 <너의 이름은>이 답습한다고 비평하는 이른바 ‘세카이계’ 작품들을 보자. 일부 독자들은 이지혜가 언급한 ‘세카이계’가 무엇인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세카이계라는 장르의 대표작은 <최종병기그녀>,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 <별의 목소리>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 <별의 목소리>

세카이계의 기본적인 골격은 이렇다. 남자주인공과 그 파트너인 미소녀가 있다. 미소녀는 세계(=세카이) 전체를 좌우만한 미스테리한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스스로는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 따라서 미소녀와 연애하는 남자주인공의 행동 여부와 러브라인에 따라 여자주인공이 폭주하거나 안정을 찾고 그에 따라 세계의 생존과 멸망 여부 역시 판가름난다. 당연히 여기서 미소녀는 (소년이 동경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미소녀는 어디까지나 남자주인공에 대한 순정을 안고 있는 객체와 대상으로 자주 묘사된다.

<라라랜드>가 고전적인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문법을 차용했듯이, <너의 이름은>도 바로 이러한 세카이계의 문법을 차용하고 있다. 서로 몸이 뒤바뀌었던 주인공 남녀가 만날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서 마을 사람들의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사성은 거기까지이다. 그렇게 치면 어느 날 사라진 아내를 찾아야 자기 주변의 세계를 복구시킬 수 있다는 설정을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도 ‘세카이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유사성만으로 일반적인 오타쿠 서브컬쳐의 모에 요소로 가득 찬 세카이계 작품과 그러한 소설을 등치 시킬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신카이 마코토의 이번 작품은 모에 요소에 의존한 서브컬쳐의 작품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정말 미츠하는 수동적으로 모에화된 피해자-여성 캐릭터인가?

이지혜는 또 다음과 같이, <너의 이름은>에서 여주인공 미츠하가 수동적이고 객체적인 대상으로 묘사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미츠하를 도쿄의 남자 타키가 구하고, 미츠하를 살린 타임루프는 미츠하가 쌀을 씹은 뒤 뱉어 만든 술을 타키가 마시면서 가능했다. <너의 이름은>은 이를 ‘무스비’라는 자연과 미신적 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미츠하가 자연-지방-억압-소녀를 상징한다면, 그를 구원하는 것은 도쿄-도시-풍요-자유-소년이다.”

이것은 작품의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올바름의 도식에 기울어진, 전형적인 ‘꿈보다 해몽 격’의 비평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이 도쿄-도시-풍요-자유-소년과 자연-지방-억압-소녀 사이의 비대칭적인 구도를 무비판적으로 재생하고 있으며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식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평을 하고 싶다면 그 잣대를 차라리 <초속 5cm>에 적용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마저도 억지스럽지만 그래도 <너의 이름은>에 가하는 비평보다는 덜 억지스럽다.

게다가 <초속 5cm>는 오타쿠 계열의 모에 요소로 가득한 작품보다는, 오히려 일본 근대문학에 고유한 남성화자 중심의 ‘사소설(私小說)’의 전통에 가깝다. 남자 주인공은 어떤 여자를 중학생 시절부터 좋아한다. 여자 주인공은 지방으로 이사를 간 이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재회하기 위해 여행을 가면서 어렵사리 만나지만, 그 이후 남자 주인공은 줄곧 전전긍긍하며 여자 주인공에게 제대로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다. 결국, 도쿄에서 스쳐 지나가는 두 남녀는 이어지지 못하고 전혀 각자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남성 측의 심리적 갈등보다 여성 측의 심리는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이 여성의 마음이 무엇일까, 전전긍긍하는 식이다. 이 경우 <초속 5cm>는 이지혜의 평과 달리 세카이계나 미소녀 게임이 아니라 (우에노 치즈코가 비판한 바 있던) 남성 중심적인 일본 사소설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지혜 자신도 (일부) 인정하듯이 그러한 잣대는 <너의 이름은>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츠하는 단지 타키와 번갈아가면서 그 심리가 묘사될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이지혜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야기를 이끄는 행위상에서도 미츠하는 타키와 완전히 동등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갈무리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 > 갈무리

바로 이 지점에서 이지혜의 비평은 기본적인 사실관계에서 틀렸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이지혜는 마치 도쿄의 남자 타키가 미츠하를 찾는 것에만 사건해결의 계기가 생기는 것처럼 평론한다. 그러나 이전에 미츠하가 도쿄로 타키를 찾아 나섰고 그것을 통해 비로소 타키가 미츠하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준다. 이것이 어딜 봐서 타키가 미츠하를 일방적으로 찾고 구원하는 서사인가? 오히려 시간의 어긋남 속에서 서로를 찾는 것이 <너의 이름은>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내친김에 말하자면 ‘무스비’라는 (이지혜의 해석에 따르면 여성에게만 전가된) 자연과 미신적(?) 힘은 단지 미츠하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키에게 작용하는 힘이기도 하며 양자가 동등하게 ‘활용’하는 힘이기도 하다. 결코, 일부 ‘세카이계’의 일반적인 문법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여성이 일방적으로 휘말리는 식이 아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나아가 이지혜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미츠하가 시작부터 대상화됐던 것처럼, 타키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이토모리를 구하는 일을 했던 소녀의 노력은 삭제당하고 지워진다.”

여기서 소녀의 노력을 삭제하는 측은 오히려 이지혜 자신이다. 이지혜는 시간의 어긋남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타키를 만난 이후, 미츠하가 마을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토모리 마을을 구한 기억은 당연히 마을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마을을 구한 당사자인 미츠하와 타키 양자의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도 빠뜨리는 만큼 평론가가 애니메이션을 정말로 본 게 맞느냐고 의문이 제기될 법도 하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지혜는 애니메이션을 안 본 게 아니라, 그저 본인이 염두에 두는 자연-지방-억압-소녀 vs. 도쿄-도시-풍요-자유-소년의 이항대립에 작품의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내용상의 누락을 저지른 것이리라. 그리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에 억압과 소녀적 속성을 부여하고 도시라는 장소에 남성성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평론가 자신의 ‘편견’의 발로가 아닐까?

나가며

한 마디로 <너의 이름은>에 대한 이지혜의 비평 일부 내용은 길게 반론하기도 수고스러울 정도로 기본적인 사실과 내용에서 어긋난 비평이다. 또 다른 사소한 예를 들자면 <너의 이름은>이 ‘행복한 결말을 위해 몇 번이고 이야기를 반복하는 (<슈타인게이트> 식 – 인용주) 루프(loop)물의 특성까지 담았다‘는 기술도 사실에서 틀렸다. <슈타인게이트>처럼 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위해 몇 번이고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과 행복한 결말을 위해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활용하는 이야기는 질적으로도 장르 상으로도 다르다.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지혜의 평론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에서의 <너의 이름은>에 등장하는 일부 불필요한 성적코드에 대한 의혹과 문제 제기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굳이 세카이계나 미소녀게임이라는 장르의 특성으로까지 소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까지 소급하는 것은 서브컬쳐에 대한 무지의 발로이거나 아니면 과도한 아는 척의 발로일 뿐이다. 평론가 본인이 더 잘 알겠지만 <너의 이름은>은 기존의 세카이계나 미소녀게임의 문법만으로 읽기 곤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이 동일본 대지진을 염두에 두었으며, 전작과 달리 더욱 더 직접적인 해피엔딩을 추구한 작가 자신의 일종의 ‘노선 선회’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름의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다. 또한, 신카이 마코토가 성취한 것만큼 그가 드러내 보인 작품상의 한계 역시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정치적 올바름의 도식과 같은 단순화되고 경직된 도식이 아닌, 더욱 더 세밀한 비평의 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가분

경제학 석사. 프리랜서 작가.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