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비아페미니즘] ‘미소지니’ 개념 어떻게 오남용됐나

우리는 지금까지 정체성 정치를 둘러싸고 문제 해결의 본령과 무관하게 자가증식하는 공포와 혐오의 악순환을 살펴봤다.

정치적 올바름의 윤리는 이러한 공포와 혐오의 확대재생산을 멈추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심지어 그것에 동참한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이 가장 첨예해지는 지점은 바로 성정치(gender-politics)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보이콧 운동의 하나였던 “Vote Trump, Get Dumped” 캠페인이 대표적인 사례다. SNS에서 화제가 된 이 캠페인은 트럼프를 지지하거나 투표하는 남성과 데이트와 성관계 일체를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트럼프의 성희롱적 언행과 과거 성추행 의혹에 격분한 일부 여성들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성을 정치적으로 도구화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극단 노선의 기본 동기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행위를 그 자체로 여성인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문제와 정치적 대립을 사회가 ‘나’의 정체성에 대해 갖는 적개심으로 환원해서 설명하고 사회구조를 인격의 문제로 치환하는 행위. 이것이 바로 ‘포비아페미니즘’ 담론의 자양분이 된다.

미국 허핑턴 포스트에 보도된 “Vote Trump Get Dumped” 구호와 심볼

사회현상을 사회가 나를 적대적으로 대한다고 해석함으로써 피해의식과 공포심을 극대화하는 것은 현대 정체성 정치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가 인터넷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사례는 한국에도 있었다.

메갈리아 등 혐오사이트에서 활동해온 여성 네티즌이 ‘한남패치’라는 SNS 계정에다 공공장소에서 몰래 찍은 남성의 신상을 무차별적으로 유출했다. ‘한남충’ 등의 욕설과 조롱으로 명예훼손이 잇따른 운영자가 경찰에 검거되자, 메갈리아·워마드와 이에 동조하는 여러 여초 커뮤니티는 이를 여성을 표적으로 한 탄압이라고 규정한 뒤,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여성으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해프닝은 ‘비혼주의자 선언’으로까지 비화했다. 이들은 지하철역 등 공공장소에서 여성에 대한 수사기관의 검거에 항의하는 빨간 팻말과 리본을 부착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캠페인도 ‘범죄를 저지른 여성’에 대한 수사기관의 공무집행을 여성인 자신의 ‘공격’으로 받아들인 데서 시작됐다. 당연한 공무집행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심리는, 앞서 보았듯이 타인의 증오심과 공격성에 대한 과도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현대 대중 페미니즘은 이러한 타인의 정체성과 공격성에 대한 상상적 두려움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증폭시키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포비아페미니즘’이다. 다시 말해, ‘포비아페미니즘’이란 이처럼 여성(과 남성)이 상대방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심을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부추기는 페미니즘의 경향 전반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한 메갈리아 유저는 ‘포비아페미니즘’이 이식되고 확산되는 과정을 ‘공포세뇌’라는 인상적인 용어로 설명한다.

“여초 커뮤에 남혐 심기 어렵지 않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해당 유저는 “(노골적으로 남성혐오) 영업하려 하면 역효과 남”이라고 주의를 준 다음, 다음과 같이 비법을 전수한다. “나 같은 경우는 작은 여초 커뮤에 하루 1개씩 더도 말고 딱 한 개씩 메갈 뉴스에 올라온 특히 극악한 기사 골라서 올림. 대부분이 이별 살인류인 염산, 여친 살해 후 맨홀 유기 등등”이라는 것이다. 이 방법을 “충격요법”, “공포 세뇌”라고 소개한 해당 유저는 이렇게 “매일 한 개씩 딱 한 달만 하면 여자애들 남혐 생기더라”라며 그 효과를 보고하고 있다.
-박가분, 바다출판사 <혐오의 미러링> 160페이지

이것은 커뮤니티에서 혐오문화가 확산하는 과정에 대한 보고이기도 하지만, 그 외연을 확장해서 보자면 미디어에서 일부 여성운동 그룹이 자신의 이슈를 제기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남패치·강남패치 등 혐오성 SNS 계정을 운영한 여성 운영자가 검거되자 이후 강남역에 붙은 구호들

최근 일부 학계와 저널리즘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여성혐오’(misogyny)라는 용어의 오·남용 역시 ‘포비아페미니즘’의 대표적 징후이다. 원래 미소지니라는 용어의 사전 저 의미는 여성에 대한 혐오(hate)와 경멸(contempt)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미소지니라는 용어는 그 사전적 의미를 훨씬 초과하는 맥락들(성차별, 성고정관념, 성적 대상화 등등)을 끌어들인다. 예컨대 우에노 치즈코와 같은 여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미소지니 개념은 가부장제 사회 내에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뿌리 깊은 혐오와 경멸 그리고 열등·우월의식 등이 뒤섞인 콤플렉스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전형적인 ‘정신분석적’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미소지니를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는 내면화된 콤플렉스 전반으로까지 규정한다면, 미소지니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만능 요술봉이 된다. 예컨대 여성이 남성이나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오직 남성이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심층적으로는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사고하길 거부하는 혐오의식에서 비롯된다.

세일러문 요술봉. 미소지니는 어떤 요술봉으로?

한편 여성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여성혐오다,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해 무관심한 것조차 뒤틀린 남성성의 발현이다 등등. 이처럼 일부 여성주의자들은 종종 이 모든 것들, 여성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여성에게 무관심한 태도 전반 모두를 다 ‘미소지니’라는 개념 아래 포괄하는 논리를 구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미소지니 개념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만능 요술봉이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개념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편 여성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차별과 고정된 성 역할 그리고 남성 측의 각종 콤플렉스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미소지니 개념을 ‘여성혐오’라고 읽고 쓰는 국내의 번역에 대한 논란이 있다. 미소지니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만 해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사전적인 의미로 번역한다면 미소지니는 여성혐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오히려, 미소지니 개념이 너무 광범위한 것이 문제다. 여기서 진짜 되물어야 할 것은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미소지니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다. 이 문제는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일부 여성주의자들은 미소지니와 성차별주의(sexism)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주장을 하기 위해 고조된(heightened) 단어를 부주의하게 남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성차별주의는 사실 미소지니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으로 여성을 매우 좋아할 수 있지만, 기꺼이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성차별주의)을 지지할 수 있고 또한 여성에 대한 성적 스테레오타입을 사용(성고정관념)할 수 있다. 그래서 용어의 의미가 팽창하는 것은 유감이다. 성차별주의와 미소지니의 관계는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증오의 관계와 같다. 그 중 어느 것도 용납될 수 없지만, 불의와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정확한 언어가 필요하다.”
-저명한 사회비평가이자 여성주의자이기도 한 나오미 울프의 발언. <The Guardian> Sexism and misogyny: what’s the difference?

반면 앞서 보았듯이 우에노 치즈코와 같은 일부 여성학자는 여성혐오를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들은 사회적 관습과 정치적·경제적 제도 그리고 심지어는 인류 문명 전반이 여성에 대한 남성 측의 혐오의식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주장을 즐겨 펼친다. 속류 마르크시즘의 상부구조(법·제도·관습)와 하부구조(여성혐오·미소지니) 도식의 조악한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미소지니라는 용어가 공중에 퍼지고 저널리즘에 정착되면서 어떤 작품이나 누군가의 발언 하나하나에 ‘여혐·미소지니’냐, 아니냐의 논란이 종종 일곤 한다. 미소지니라는 개념이 사회를 분석하는 개념적 틀을 넘어, 이제는 일반인과 대중문화에 대한 낙인의 용어로까지 퍼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여기서 소환되는 미소지니라는 개념 자체가 정합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부터 따지는 게 우선이다. 이미 보았듯이, 많은 경우 미소지니라는 용어가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라는 의미에서 크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부 성적 묘사로 여성혐오 논란에 휩싸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너의 이름은> 국내 개봉 포스터

올해 개봉한 일본영화 <너의 이름은>은 몸이 뒤바뀐 남녀의 모습을 그리며 여성의 몸에 들어간 남성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성적인 묘사가 등장한다. 이것으로 인해 넷상에서 <너의 이름은>을 둘러싸고 여성 혐오 논란이 인 적이 있다. 이처럼 어떤 영화나 애니메이션 작품에 성적 코드와 성적 대상화가 드러나면 이것이 바로 ‘여혐=미소지니’가 발현된 사례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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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부 여성이 즐기는 BL(동성애)물에 등장하는 남성 대상의 성적 코드와 성적 대상화는 역으로 ‘남혐=misandry’인가? 사실 여성혐오·남성혐오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느 쪽의 주장이든 그 주장 자체로는 의미불명이다.

여성이나 남성을 예컨대 성적으로 매력적인 대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현실의 인격에 대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심층적인 심리 구조상 ‘혐오(miso-)’ 성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정신분석학이나 ‘궁예의 관심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명확한 연결고리를 찾아내기 힘들다.

궁예의 관심법 “다 꿰뚫어 보고 있느니라” (출처 KBS 태조왕건)

예컨대 정신분석학에서는 가끔 대상에 대한 애착과 증오는 심층적·무의식적 심리구조 속에서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증오가 애착으로, 애착이 증오로 쉽게 전이된다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에 대한 어떤 심오한 철학적 통찰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어떤 현상이나 작품에서 혐오를 ‘읽어낼 수 있느냐’의 여부를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나아가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의미불명의 개념과 논리적 비약을 남발하는 것이 오히려 성적 대상화라는 문제 제기의 초점을 흐리는 것 아닌가. 이런 현상은 종종 성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혐오의 문제로 전환할 때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다. 가령 여성이나 남성에 대해 스테레오타입화되어 있는 묘사나 발언을 했다고 해서, 혹은 어떤 성고정관념을 표출했다고 해서, 바로 그 사람이 혐오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이 여성이 선천적으로 모성적이라거나 본래 운전이 미숙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성차별주의자이다. 만일 그가 여성은 단지 따먹기(fuck)에만 좋다거나 남성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데 묶여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면 그는 여성혐오주의자이다. 여성혐오주의자들은 항상 성차별주의자이다. 하지만 성차별주의자가 항상 여성혐오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박가분, 바다출판사 <혐오의 미러링> 160페이지

이처럼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를테면 성차별 문제가 반드시 개인의 주관적·내면적 성향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인식을 전제로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임금 격차와 유리천장 문제도 여성혐오가 아닌 ‘장시간 노동의 일반화’라는 경제 구조적 측면의 요인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처럼 현재 의미상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여혐=미소지니’ 개념은 성적 대상화의 문제뿐만 아니라, 고정된 성 역할이나 성차별 그리고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증오 발언 등의 모든 젠더문제들을 한데 뒤섞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처럼 취급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의 모호성은 현실의 젠더문제들을 상호연관시키고 통합시켜서 설명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됐겠만, 정작 대다수의 여성주의 담론에서는 ‘그래서 그 문제들이 어떻게 연관되고 통합되어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비유나 유추에만 의존할 뿐 실질적으로는 비어 있다.

오히려 그것을 설명할 때는 우에노 치즈코처럼 유사정신분석학이나 심리적 환원주의에 의존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미 ‘여성혐오가 가부장제의 보편적인 심리구조’라는 전제하에 일본의 여성혐오 문화를 분석해서 유명해진, 우에노 치즈코의 설명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해야 할 곳에서 조악한 형태의 정신분석 담론을 빌리는 것에 그친다. 이것은 문예비평에서 허용될 수 있는 주장일 수는 있어도 사회적인 논의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요점은 ‘미소지니=여성혐오’ 번역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미소지니가 원래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무분별한 낙인으로 사용되는 것이 핵심이다. 고무줄처럼 늘려서 본 미소지니란 여성에 대한 남성 측의 모든 불쾌한 태도를 의미한다. 문제는 이 불쾌한 태도에는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정당한 반론과 문제 제기조차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럼에도, 페미니즘>이라는 저서에서는 자신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다고 믿는 젊은 남성들이 “여성혐오”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젊은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는 부분은 분명 사회 곳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지 여성혐오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낙인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 연합뉴스TV

또 다른 일례로, 한 기사는 지난해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싼 논란 및 메갈리아 논란과 관련해 “페미니즘 진영과 한국사회 내 깊게 뿌리박힌 여성혐오 세력 간의 극적인 전투가 시작됐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내보낸 바 있다.

한국사회 내 깊게 뿌리박힌 여성혐오 세력이란, (앞으로도 다뤄질) 임금 격차 문제나 여성범죄 문제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젊은 남성들이다. 그동안 젊은 남성들에서 표출되어왔던 여성혐오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성별대결(극적인 전투)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이 같은 포지션은 오늘날 ‘포비아페미니즘’의 주된 경향을 보여준다.

이처럼 미소지니라는 낙인 프레임으로 젠더이슈를 바라볼수록 역설적이게도 상대방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와 혐오는 더욱 극대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예컨대 임금과 일자리 등에서 나타나는 성격차의 문제도 미소지니 프레임을 통해 볼 때 여성을 향한 남성 측의 의식·무의식적인 혐오의 문제로 전환된다.

즉, 성차별은 더는 사회구조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것의 가부장제 아래 남성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콤플렉스와 공격성향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재해석된다(<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예를 들어 윤지영은 <현실의 운용원리로서의 여성혐오>라는 논문에서는 성별 임금 격차마저도 여성혐오라는 구조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미소지니 담론을 뒤집어 말하면, 여성을 둘러싼 남성의 모든 행위는 여성에 대한 공격성향 및 콤플렉스의 징후로 읽힌다. 여성학이나 일부 문화연구 이론의 영역에서 이러한 식의 서술은 사회현상과 텍스트는 ‘비판적·해체론적 독해’라는 고상한 이름이 붙거나 서구 현대철학자에 대한 현학적인 인용이 동반된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공포와 공격성이 보편적이라면 여성 측에서도 여기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분노 역시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에노 치즈코의 저서의 번역본 제목인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슬로건(그러나 실제 일본어 원제는 ‘여성혐오: 일본의 미소지니’이다) 자체도 이러한 공포와 혐오의 거울반사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자신에 대한 혐오와 공격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자신 역시 혐오를 무기로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것이 정당화된다. 실제로도 우에노의 책 제목은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구호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응보의 논리 자체가 혐오와 공격성의 만연을 낳는다는 구조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미소지니를 둘러싼 이 같은 용어의 문제는 단지 페미니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공포에 기반을 둔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이 전반적으로 봉착한 문제다.

앞서 보았듯이 정체성 정치에 대한 집착은 사회적 갈등의 모든 차원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공격의 징후’로 치환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것은 소통과 문제 해결을 낳기는커녕 상호 간의 혐오와 피해의식을 극대화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페미니스트 선언하기

그것이 사회이슈를 환기하고 문제 해결에 근접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문제 해결에 동참해야 할 절반에 가까운 인구를 논의와 참여에서 배제하고, 낙인을 찍고, 상호 간의 대결 프레임을 고착화하는 결과만을 반복해서 초래했다는 것이다.

가령 메갈리아 이슈라든가, 강남역 이슈에서 자신에게 불쾌한 사실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여성혐오’라고 일갈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낙인 찍기는 쉽다. 그러나 앞으로 보겠지만, 페미니즘 역시 틀린 주장을 펼치거나 그 주장에 맹점을 안고 있을 때도 있다. 포비아페미니즘은 이러한 비판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식으로 미소지니라는 개념을 활용하곤 한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의 발생 동기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라고 보도하는 것도 여성혐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따르면 의견을 교환했던 상당수의 사람을 졸지에 혐오주의자로 낙인찍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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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오히려 현재의 ‘여성혐오 담론’이야말로 혐오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박가분

경제학 석사. 프리랜서 작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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