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도와 고류검술은 실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검술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옛날 이소룡 영화에서 적의 칼을 발차기로 제압해 버리는 장면을 보고 열심히 따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 맨손으로도 검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5단까지 수련했지만, 무기를 들고 싸우는 자를 비겁한 자로만 생각했다. 신앙이든 정치든 하나의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되면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무술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검술과 유술이 전투에서 실전을 담당했다. 검술과 유술 중 어느 쪽이 단시간에 생명을 앗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 자체가 바보스러운 질문이다. 실전에서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칼이 없거나, 칼이 아니어도 충분히 상대할 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현대로 와서는 검술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 형태와 전략은 변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15세기경부터 검술에 선불교(禪佛敎)의 교리가 접목되면서 맹목적 살생에 대한 종교적 반성이 시작되었고, 나아가 무사들의 살인은 마지막 선택이었다. 살생을 피하고자 내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검을 빼지 않고 상대의 위협을 감수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검술보다 더 무서운 무술은 없다. 안전을 보장하면서 즐기는 스포츠 검도와 옛 검술은 실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기술이 모두 살생뿐인 검술은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스포츠처럼 아무에게나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처음 배울 때는 검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유술을 숙지시키고 평화를 사랑하는 합기도 윤리에 기반을 둔 정신에서 검술을 각인시켜 나간다.

합기도는 바로 그러한 점에 착안한 무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합기도가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검을 모르는 유술은 실전에 대한 편협한 프레임 속에 갇혀서 실제 상황을 보지 못하게 된다. 살인을 거부하는 궁극의 활인검은 검을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검술을 모르고 어떻게 검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술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해답을 합기도에서 찾았다. 칼싸움은 강한 정신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검을 들고 싸우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고류검술은 유술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유는 검을 사용하지 않거나 못할 때를 위해서였다. 무술 수련은 좀 더 안전하게 평화를 지킬 힘을 얻고자 노력할 뿐이다.

합기도(Aikido)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검술보다 무서운 무술이 없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으면 한다. 검술은 구미타치(組太刀)라는 짜인 형을 위주로 수련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안전하게 기술을 습득하기 위함이다. 약속된 동작이라고 해도 위험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검술 만큼 위험하고 무서운 것은 없다. 따라서 영리를 목적으로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살생하는 법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검술을 가르칠 때는 먼저 배우려는 자의 인성을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인성이 안된 자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내가 가르친 기술이 어디선가 나쁘게 이용되고 있다면 나는 폭력을 조장하고 사회 공익을 해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 뿐이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검술을 지도해서는 안 된다.

검술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현대 무도에 비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주변에서 도장을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은 검술로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하는 선생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대중적인 무도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스포츠와 같다. 내가 가르치는 도장도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안전하고 재미있게 배우며 운동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를 알아가면서 기술은 더욱 깊어진다. 검술도 그렇게 배우는 것이다.

윤대현

국제합기도연맹(IAF:International Aikido Federation) 정회원·공인 6단
(사)대한합기도회 회장
합기도신문 발행인
aikidokore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