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한국형 페미니즘’

집단 A의 공통점

여기 한 집단이 있다. 집단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기안84, 전현무, 유세윤, 유상무, 장동민, 이찬혁(악동뮤지션), 중식이, 블랙넛, 송민호”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연예인? 남자? 아니다, 이들은 전부 ‘여혐논란’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선동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이다. 일일이 설명하자면 책을 써도 될 정도이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들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자.

장동민 퇴출 1위 시위

장동민은 넷페미들의 끈질긴 괴롭힘 때문에 온갖 방송에서 하차했고, 유상무는 대장암 3기라는 불행이 찾아왔는데도 죽음을 재촉하는 저주를 당했다. 인디밴드인 ‘중식이밴드’의 중식이는 표현의 자유의 범위 안에 들어가고도 남는 노래 때문에, 무대를 실질적으로 잃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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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암 3기 유상무

만약 이들이 명백한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면 이런 글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은 자신의 사촌 동생에게 장난을 쳤다는 이유만으로 여성혐오자로 낙인찍혔다.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의혹이며, 맥락 중심 해석인 데다가, 잘 쳐줘야 문제성 발언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으며, 특정 대상에 대한 지나친 발언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의혹이나 해석, 혹은 발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이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집단 B의 공통점

여기 다른 집단이 있다. 이 집단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명문대 교수, 유력 대선 후보, 국회의원, 대전시 산하기관장, 전남도 산하 기관장, 문체부 산하기관장, 중견 연예인, 공무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공직자? 아니다. 이들은 실제로 성범죄, 성희롱, 몰카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제자를 향한 명문대 교수의 성범죄는 기시감이 들 정도로 많이 본 뉴스이다. 또한, 유력 대선 후보가 형수의 생식기를 찢어버리겠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전공의 성추행으로 파면 당한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A교수

청문회에서 ‘개념의원’ 소리 듣던 의원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성추행 의혹을 받고 있다. 그리고 고위공직에 있는 이들이 부하직원을 성추행하고, 여자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여 형사입건된다. 영화판에서 ‘대선배’라 불리는 이는 미성년자 성매매를 했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들은 포털뉴스 사회면에 자주 오르내린다. 아니면 검색을 조금만 해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절대 ‘여성혐오자’로 낙인찍혀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반면 젊은 연예인이나, 문화의 협소한 필드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이들은 ‘여혐’으로 낙인찍히면 몇 년 동안 시달려야 한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착한 탈’을 벗은 한국식 페미니즘
90년대 대학가 운동권을 중심으로 래디컬(급진적)한 한국형 1세대 페미들이 생겨나던 ‘올드페미’시절이 지나자, 페미세력은 급격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IMF가 직격탄이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힘드니 여성들이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대중으로 스며들기 위해 ‘착한 탈’을 쓰기 시작했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며 소외된 남성 또한 페미니즘이 해방해줄 것이라는 달콤한 말을 했다. 그리고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권익 또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포괄하려 했다. ‘미국형 3세대 페미니즘’을 표방하던 2000년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신의 권익은 당사자가 해결해야 한다. 2000년대의 ‘착한 탈 페미니즘’은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했다. ‘여성부가 하는 게 뭐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회에서도 거의 호출되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넷페미들의 오프라인 버전이었던, 90년대의 래디컬 올드페미들의 전략이 더 유효했다고 보일 정도였다.

손희정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이 2016년 10월 8일 서울 서대문구 벙커1에서 열린 ‘대한민국 넷페미사’ 라운드 페이블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날 손 연구원은 ‘배운여자, 여시, 트페미, 페미나치, 메갈’이라는 표현을 “온라인 페미니스트의 ‘멸칭’의 역사이자 넷페미 수난사”라고 말했다.(출처 여성신문)

그리고 2010년대가 되어서 다시 래디컬 뉴페미, 우리가 흔히 ‘넷페미’나 ‘메갈’이라 부르는 이들이 등장했다. 2000년대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정부지원과 잉여 운동권을 중심으로 ‘착한 탈’을 만들고 있을 때, 이들은 인터넷상에서 남성혐오를 키워갔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메갈리아가 여성혐오에 대항해서 생긴 사이트라는 것은 완전히 날조다. 여초커뮤니티 상의 남성혐오 뉘앙스는 200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축적되어왔다.

실제로 올드페미들은 대학을 중심으로 조직화했으나, 뉴페미들은 트위터와 여초카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넷페미들의 상당수는 초창기에 2000년대의 ‘착한 탈 페미니즘’을 수용했다. 초창기 메갈리아는 얼치기 운동권 페미니스트와 여초커뮤 남성혐오자들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론적 훈련을 조금이나마 받은 얼치기 운동권 페미들이 여론을 주도했다.

그들은 동성애자 인권 이슈에 대해서 지지하고 연대했으며, ‘맨박스’ 같은 페미니즘의 아류 개념을 긍정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비운동권 계열이 흑화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착한 탈 페미니즘’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워마드’였다.

워마드의 세계관
‘착한 탈’을 거부한 ‘워마드’ 계열은 사실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과 거의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트위터와 여초카페를 중심으로 형성된 담론은, 역설적으로 소비 지향적이고 계급 지향적인 모습을 띠게 됐다. 애초에 여초카페의 상당수가 화장품, 성형, 옷 등의 과시 소비를 위한 정보공유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남초사이트의 경우 보배드림과 디젤매니아를 제외하면 과시 소비 정보공유 목적의 사이트가 없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세계관이 드러내는 한국 사회는 ‘촘촘하되 역설적인 계급사회’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강자는 약자에게 윽박질러도 되지만, 약자는 강자에게 어떠한 토도 달아서는 안 된다.
1-1. 그러나 약자에게 언더독 프레임(사회적 약자)이 씌워지는 순간, 모든 것은 역전된다.

SJ 레스토랑 앞에서 시위 중인 알바노조(출처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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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돈은 계급의 상징이기에 누군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만능열쇠이다.
2-1. 그렇기에 내 돈은 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도구이며, 나의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3. 국가와 사회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3-1. 여성인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없다.

이들은 가부장제가 완강하다고 자주 주장하지만, 스스로 나서서 가부장제 사회 자체를 바꾸겠다는 말은 잘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가부장제의 절대적인 피해자라는 궁상과 피해를 본 자신들을 위해 사회가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뻔뻔한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그들이 ‘착한 탈’을 거부하고 깨달은 것
사실 이들은 거대한 무엇과 맞서 싸울 용기도, 조직도 없으며, 사실은 그럴 필요도 못 느끼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을 드러내는 이론에 대한 탐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산발적인 부정적 정념과 냉소, 그리고 사이버 테러만 남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피해 사실이 명확하지 않다면, 절대적인 피해자로 산다는 것은 꽤 편한 일이다. 누군가의 동정을 살 수 있고, 지지도 얻을 수 있으며, 잘만 하면 돈도 되니까. 물론 가해자가 계속 있어야 자신들이 절대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으므로, 만만한 이를 가해자로 찍게 된다.

특히 여성들의 돈으로 먹고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방송이나 문화계 쪽 사람들이 좋다. 그들은 반박하거나 불만을 표출할 수 없다. 이슈가 커질수록 그들에게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택지는 둘 중에 하나뿐이다. 사과하거나, 회피하거나. 그들은 대중에게 계속 노출되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이므로, 보통은 고를 수 있는 게 사과밖에 없다.

출처 한겨레 토요판

이게 바로 실제로 ‘별일’을 저지른 집단 B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지만, ‘별일’도 하지 않은 집단 A가 ‘여성혐오자’라고 괴롭힘당하는 이유다. 이렇듯 그들이 ‘착한 탈’을 거부하고 깨달은 것은, 그리고 자신들이 여권신장을 위해 꼭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뉴페미니즘 이론은, 사실 ‘강약약강’의 순수한 ‘한국식 속물근성’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