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체제의 적폐···국가주의라는 마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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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체제의 적폐···국가주의라는 마수 1

1987 국가주의 교육 체제
1987 체제는 정치, 행정, 사법, 경제, 금융, 공기업, 고용, 노조, 교육, 복지 등 수많은 분야에서 그 말기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국가주의 교육 체제’다.

한국 교육 체제의 특성은 교육 관련 헌법과 법령과 예산에 잘 드러난다.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교육 사무는 거의 지방정부 사무다. 큰 폭의 학교 자치가 허용되고, 지방정부의 예산, 인력의 거의 절반이 교육과 관련됐다. 한국도 교육 사무는 지자체 사무다.

하지만 초중고 교육은 교육 관련 법령과 ‘국가교육 교육과정’과 예산에 의해 촘촘하게 통제된다. 상대적으로 국가통제가 약한 고등(대학)교육도 입시제도, 각종 국가공인 자격제도, 국가가 할당하는 예산 등에 의해 통제된다.

게다가 한국은 대학의 지리적 위치(서울 수도권 선호)가 교육의 품질 경쟁을 무력하게 만든다. 원래 거의 모든 국가 규제는 국가(정치집단과 관료)와 이익집단(교육 공급자 집단) 간 이해관계의 충돌, 타협, 담합의 산물이다.

한국의 초중등 교육 관련 규제는 세계 최다·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초중등 교육법 및 시행령에는 교육 주체(교육 기관, 시설, 교육자 자격 등), 교육 과정, 교육 재정(재량권) 등에 관한 사항이 상세하게 규정, 학교는 이를 의무적으로 따라야 한다.

교육자(교장, 교감, 교사, 장학사, 교육감 등)의 자격 요건도 법령(별표) 사항으로, 대체로 학력·학위와 경력 중심이다. 학원 강사가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해도, 교사 자격증이 없으면 학교 정규 교과 과정에 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학교 경영 능력이 빼어난 사람도 교장 자격증이 없으면 교장이 될 수 없다.

박근혜의 ‘자식된 도리’···국정교과서(사진=뉴스타파)

교과서를 중심으로 가르쳐야 하고, 교과서는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검정 또는 인정한 도서로 해야 한다. 이는 지자체장도, 교육감도, 교장과 교사도 손댈 수 없다. 교장, 교감, 교사 자격 제도도, 국정교과서 제도도, 내신 상대평가 제도도 선진국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규제다.

교육 과정이나 각종 자격 제도는, 지자체(교육청)이나 학교 차원에서 재량권이 없는 획일적 규제이기에 교사, 교장, 교수, 학과, 졸업생 등의 치명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라서 이를 둘러싸고 사생 결단의 대결이 벌어지곤 한다.

대학(교수와 학과)들도 국가규제를 통한 이권 보호에 뛰어들었다. 특정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으면 실력에 상관없이 어떤 일을 아예 못하게 만드는 식이다.

한편 교수, 교원(단체), 교육 관료 등은 합심해,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빌미로, 교육 외부자가 교육에 관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당 배제(무당파)를 의무화한 교육감 선거제도는 한국의 교육 자치는 ‘교육공급자(단체) 자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출직 교육감의 권능은 매우 협소하다. 대통령령이나 부(장관)령에 의해 통제되고, 자체 세입도 없어서, 교육 과정이나 교원 임용 등 교육의 기본 틀을 건드릴 수가 없다. 주로 인사(보직)와 예산의 항목을 조정하는 수준이다. 한마디로 염불(교육의 본령에 충실한 교육 자치)을 할 수 없으니, 잿밥만 밝혀야 하는 상황이다.

교육 관련 법령과 ‘국가교육과정’은 단지 국가의 교육(과정, 기관, 교육자)에 대한 통제 요구의 산물만은 아니다. 학생, 학부모의 교육 기회 균등이나 공정 경쟁 요구와 교육공급자(사학재단 및 교원)의 이해관계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 모든 요인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 한국의 초중등 교육은 북한 사회주의 중앙통제 경제와 아주 유사해져 버렸다. 중앙통제경제와 장마당의 번성-단속-위축-재번성이 반복되면서, 북한은 나진-선봉, 개성, 신의주(황금평) 같은 규제 예외(특혜) 지대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중앙통제교육 체제는 수준별, 맞춤형 교육에 대한 요구와 불만이 비등하면서, 사교육(장마당)이 번성하자, 규제 예외(특혜) 지대인 특목고, 자사고, 혁신학교를 허용했다.

지난해 부정 입학·채용 비리 등 다수 적발된 하나고등학교. 하나고는 2010년 하나금융그룹의 학교 법인인 하나학원이 설립한 자율형 사립고다.

이들이 교육 규제가 만들어낸 공교육의 사막에 솟아난 오아시스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전국 차원의 규제 완화로 인한 폭발력(쏠림 현상)이 너무 클 것으로 예상하기에, 사막 자체를 옥토(공교육의 정상화)로 만들려는 시도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단지 오아시스를 몇 개 더 만들거나 확대하는 식이다.

요컨대 한국 교육 문제의 핵심은 사교육의 창궐도, 6-3-3 학제도, 특목고도, 대학입시제도도 아니다. 한마디로 교육 수요와 공급의 양적, 질적으로 크게 어긋나서(mis-matching) 엄청난 시간, 돈, 열정이 낭비된다는 것이다. 특히 60조원 넘는 예산을 쓰는 공교육의 낭비가 심하다. 사교육보다 공교육이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문제의 원인은 교육 수요, 공급과 이를 규율 하는 국가 규제 모두에게 있다. 교육 수요를 왜곡하는 것은 교육시험을 매개로 한 엄청난 격차(우대와 차별)다. 너무 많은 지대(렌트), 입구(관문)만 통과하면 중간 평가, 퇴출이 없는 고용체제, 교육시험 사다리 외에는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부족 등이다.

교육 공급을 왜곡하는 것은 공급자들의 기득권 및 공급자 중심의 거버넌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로 인해 학교 정원과 학령인구, 학교의 지역별 분포와 학령인구 분포, 대학 졸업자와 산업 수요 등이 양적으로 크게 어긋났다. 사양화된 학과와 대학이 그 징표다. 서울, 수도권에는 교실이 모자라고, 지방에는 폐교가 속출한다.

물론 가장 큰 낭비는 대학 졸업은 했으되, 그 학력에 상응하는 일자리를 갖지 못한 청년들이다. 따지고 보면 노동생산성 향상 기능의 고장도 교육 과정과 산업 및 사회의 요구가 양적, 질적으로 크게 어긋난 데 있다. 교육 과정과 입시 제도도 어긋났고, 평생교육 관련 점증하는 수요와 너무 적은 공급(예산)도 마찬가지다.

출처 동아일보

교육 문제의 절반 이상은 교육 체제가 아니라 경제사회 체제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사회 체제만 탓할 일이 아니다. 동시에 고쳐야 한다. 교육 관계자들은 교육체제를 고치는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 핵심은 교육의 미스매칭을 푸는 것이다. 개인 맞춤형 교육이 쉽도록 교육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 법령과 국가교육과정을 거의 철폐 수준으로 개정해(50% 이하로 줄여) 지방과 학교의 교육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 물론 이는 서울, 수도권, 충청권이 아니라 낙후된 지역에 먼저 부여해야 한다. 1970년대 서울 강남을 개발할 때, 당시 강북에 집중되어 있던 명문 고등학교를 사실상 강제로 이전한 정책이 주효했다.

교육 자치와 지방(행정)자치를 통합하되, 먼저 경제자유구역처럼, 멀고 낙후된 지방을 중심으로 교육 특구를 허용해야 한다. 국가(권력)의 과도하고 부적절한 교육 관여·개입을 줄여, 즉 국가가 아닌 지자체와 산업(기업)이, 교육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가 교육과정 구성과 교육 거버넌스 구조에 좀 더 깊이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이 (지역)사회와 산업의 요구에 적확하게 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특기, 적성, 학습 능력 및 수준이 천차만별인 개인별 맞춤형에 근접할 수 있다. 이는 지방교육자치를 넘어 학교 자치로 가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유력 후보들이 내놓는 교육 공약들조차,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그대로 빼박은 ‘국가주의 교육체제’를 근본적으로 고치려는 공약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치명적인 모순 부조리를 모르거나 모르는 체하는 대통령 후보와 대통령 선거전이야말로 1987 체제의 말기적 징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의 뿌리
국가주의는 자원(예산)과 권력의 국가(중앙정부) 집중을 요구한다. 따라서 국가를 움직이는 모든 존재. 즉 대통령, 유력정당 대표, 국회의원, 고위 관료, 지자체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대법원장 등을 제왕이나 저승사자로 만든다.

대통령이 제왕 중의 제왕이 된 것은 공직 인사권, 감사권, 예산권, 법률제안권과 대통령령 제·개정권, 검찰과 감사원 등을 활용한 징벌권을 한 손에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안철수는 대통령의 5대 권력을 집행권, 입법권, 예산권, 인사권, 감사권으로 요약했다. 미국 대통령은 입법권, 예산권이 없고, 인사권과 감사권도 제동 장치가 많다.)

제왕적 대통령의 핵심 아이템 검찰총장 인사권

그런데 5대 권력으로 한국 대통령의 힘과 위상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 대통령이 강한 것은 600년 이상의 뿌리를 가진 강력한 국가주의 문화가 부여한, 국가에 위임된 역할(특히 규제)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즉, 국가주도 경제발전 유산인 공기업 등 공공기관이 여전히 많고, 징벌권, 감사권, 징세권도 국가(검찰, 경찰, 감사원, 국세청 등)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 기관(원)에 대해서는 대통령 말고는 제어, 통제할 존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핵심 권력인 공직 인사권의 위력이 큰 것은 기본적으로 한국 공무원은 임지, 역할(보직), 직급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임지, 보직, 승진과 감사가 당사자에게 엄청나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서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복종의 의무’까지 명시해 놓았다.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선 vs. 악, 정의 vs. 불의 투쟁
국가가 자의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많은 젖과 꿀, 자의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많은 채찍과 족쇄를 가지고 있으면 권력투쟁은 대체로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투쟁으로 되기에 십상이다.

권력을 놓치면 자신의 공적 가치를 실현할 수도 없고, 먹고 살 수도 없고, 자칫하면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투쟁으로 일관하면, 모순 부조리 구조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필요 없고, 숙성된 국정 비전도 필요 없다. 또한, 모순 부조리를 시스템(구조)이 아니라 사람(정치리더십)의 문제로만 본다.

예컨대 불평등, 양극화, 일자리 등 모순 부조리는 어떤 강하고 사악한 존재(세력)의 억압, 착취나 부정·비리의 산물로 본다. 그 사악한 존재(세력) 이름은 친일부역, 친북좌익, 유신독재, 수구보수냉전기득권, 수구진보기득권 세력 등이다.

최근 들어서는 신자유주의, 재벌, 상위 1%, 적폐 세력 등도 원흉 목록의 상단에 이름을 올린다. 착한 정치인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었듯이 유인보상(인센티브)체계와 지배운영(거버넌스)체계가 불합리하면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1987 체제의 말기적 징후
조선 유교 체제-분단·정전 체제-박정희 체제-1987 체제가 남긴 최대의 악성 유산은 무엇보다도 반응성, 책임성, 문제 해결 능력이 높을래 야 높을 수 없는 권력이 좌지우지하는 영역이 여전히 너무 방대하다는 것이다. 국가와 시장에 불로소득과 지대가 너무 과도하며, 사회는 지대추구와 각자도생의 모래알 사회로 됐다.

공무원연금 개혁 반대 시위(출처 연합뉴스)

시장과 사회에 대한 권력의 압도적 우위는 국가주의를 부르고, 시장의 불균형(지대 과잉)과 사회의 파편화는 각자도생의 약탈주의를 부른다. 시대착오적 이념집단이나 ‘우리 식구만 잘 먹고 잘 살자주의’로 무장한 이익집단이 발호하면서, 물질적 문화적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황폐화 이전에 정신과 문화가 극도로 황폐하고 걍팍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촌과 동아시아와 가까운 미래로부터 오는 거대한 도전과 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바로 중국의 경제적 웅비와 정치적 굴기, 일본의 보통국가화, 기후변화와 환경위기, 제4차산업혁명으로 요약되는 미래의 위기다.

1987 체제의 말기적 징후가 너무나 역력하다. 대한민국은 단순 리모델링을 너머 재건축 수준의 개조가 필요하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socialdesignkore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