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언론과 페미니즘의 ‘공포 상업주의’

제조된 공포, 강남역 살인사건
강력범죄 피해자 80%는 여성이라는 뉴스의 허구성
어떻게든 강남역 살인사건을 증오범죄로 꾸며내야 했던 그들
혐오발언과 정치적 올바름

제조된 공포, 강남역 사건
최근 한국의 언론과 여성계에서 ‘공포 상업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순간은 2016년 5월의 강남역 살인사건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정신질환(조현병)을 앓고 있던 한 남성에 의해 20대 여성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었다. 민감한 이슈임에도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이 사건이 쟁점화되고 여론화된 과정에서 잘못된 프레임과 정보가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큰 몫을 했다.

한국일보 5월 19일자 [페미사이드 쇼크] 극단 치닫는 女 혐오···“무섭지만 굴하지 않겠다” 기사 갈무리
먼저 관련 <한국일보> 기사를 보자. ‘페미사이드(femicide) 쇼크’라는 표제를 내걸고 있는 해당 기사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한 뒤 한국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여성살해의 위험이 만연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여기서 페미사이드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여자를 살해한 것’을 의미한다.

무슨 근거로 한국이 여성살해의 위협이 만연해 있다는 것일까? 유엔마약범죄사무소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202개국(한국 포함) 가운데 ∆통가 ∆아이슬란드 ∆일본 ∆뉴질랜드 ∆라트비아 ∆홍콩과 더불어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살해되는 7개국”에 포함됐다는 것이 그 근거다.

관련 기사
<한국일보> [페미사이드 쇼크] 극단 치닫는 女 혐오···“무섭지만 굴하지 않겠다”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도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페미사이드의 위험이 심각하다고 분석한 이 기사는 우선 통계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출발한다. 기사가 인용한 자료는 살인사건에 대한 통계이지 혐오범죄에 대한 통계가 아니다. 게다가 기사에서 거론된 여성이 더 많이 살해되는 국가 중 아이슬란드, 일본 등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강력범죄는 물론이고 살인범죄(homicide)의 발생빈도가 절대적으로 낮은 국가 중 하나이다.

예컨대 2015년 기준의 OECD 통계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와 일본의 살인범죄 발생빈도는 10만명당 0.3명이며 이는 10만명당 1.1명인 한국이나 1.2명인 뉴질랜드에 비해서도 낮다. 한편 OECD 평균 살인범죄 발생빈도는 10만명당 4.1명이다.

관련 자료
2015년 기준 OECD 통계

이처럼 ∆아이슬란드 ∆일본 ∆한국 ∆뉴질랜드 ∆홍콩 같은 국가 혹은 도시는 개발도상국인 통가나 한 해 10만명당 6.1명의 살인 피해자를 낸 OECD 내 치안 불안정 국가 라트비아와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게다가 강남역 사건 당시 많은 사람이 잊고 있었지만, 현실의 안전과 가장 먼저 직결되는 수치는 범죄 피해자 내부의 남녀비율이 아니라 범죄 자체의 발생빈도이다. 피해자 성비 자체에서 여성의 안전문제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또한, 피해자 성비에만 주목하면 앞뒤가 안 맞는 논리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여성이 범죄 피해자 비율이 더 높으면 심각한 사회 문제이고 남성이 범죄에서 피해자 비율이 더 높으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인가? 우선 범죄의 발생빈도부터 살펴보고 피해자의 비율에서도 비정상적인 격차가 발생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보통의 경우 이치에 맞는다.

<한국일보> 기사가 인용한 통계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 실제로 기사의 내용대로 지난 2011년 한국의 살인 피해자 비율은 남성이 47.5%, 여성이 52.5%로 기록됐다. 그렇다면 기사에서 한국과 더불어 여성이 더 많이 살해된 나라로 거론된 아이슬란드는 어떨까?

여성 피해자 비율이 0%에서 100%라는 극단을 오가는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는 해마다 여성 피해자 비율이 0%에서 100%라는 극단을 오간다. 2012년에는 여성 살해 피해자 비율이 100%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이지만 2010년에는 정반대로 남성 피해자가 100% 비율을 보인다. 아이슬란드 같은 경우는 사실 피해자 성비를 따지는 것이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살인사건의 건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낮은 나라이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도 2011년 살인범죄의 여성 피해자 비율이 52.9%를 기록하여 남성보다 비중이 높았지만 2007년과 2005년 그리고 2004년에는 남성 피해자 비율이 높았다. 그리고 더 장기적인 시계열(2004년~2011년)을 보면 대체로 남녀 피해자 비율이 50:50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추세를 보인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는 유엔마약범죄사무소 통계에서 2011년의 통계만이 수록됐다.

관련 통계
UNODC Statistics

이처럼 실제 통계를 들여다보면서 수치들을 무작정 인용하기보다는 통계의 국제적·시간적 추세를 볼 필요가 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는 보고에서 살인범죄 발생빈도가 낮으면 낮을수록(구체적으로는 10만명 당 1명에 근접할수록) 살인범죄 피해자의 남녀성비가 1:1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UNODC Global Study on Homicide: 2014, 54p)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같은 곳에서 서유럽과 동아시아 일부 국가 역시 살인범죄 피해자 성비가 1:1에 근접한 동시에 이들 국가 상당수가 살인범죄 발생 빈도가 낮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28p). 한국이 바로 그러한 나라이다. 이처럼 전반적인 범죄위협이 낮은 일부 국가 중에서 상대적 피해자 성비가 특정 시점에 일시적으로 역전된 현상을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가 만연한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한 억측이다.

이 모든 제반 사정들은 생략된 통계자료는 언론에 의해 ‘대한민국은 202개국 중에서 유독 여성이 더 많이 살해당하는 국가 중 하나’라는 공포스러운 메시지로 변환된다. 통계와 사실에 대한 왜곡과 자의적 해석에 출발한 ‘공포 상업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강력범죄 피해자의 80%는 여성이라는 뉴스의 허구성
이와 더불어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해서 “대한민국 강력범죄 피해자의 80%는 여성”이라는 선정적 기사가 잇달아 보도됐다. <한겨레>가 ‘언니들의 이유 있는 분노, 통계로 짚어보았습니다’ 기사를 2016년 5월 24일 보도했다.

또한 이러한 통계는 여성학 분야의 저서(<여성혐오, 그 후>, 2016)들에서 아무런 반성이 없이 인용되곤 했다. 이러한 무책임한 주장 역시 통계에 대한 무지에 기반을 뒀다(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들녘, 2016).

먼저 강력범죄의 외연을 어떻게 잡느냐에는 여러 기준이 있다. 일반적으로 강력범죄는 폭력과 무기가 수반된 범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대표적으로 폭행·상해·강도·살인·성범죄·방화 등이 있다.

한편 경찰청통계 등 일련의 국내기관들이 작성하는 강력범죄 통계는 강력범죄 중에서 이른바 ‘흉악범죄’로 분류되는 살인·방화·강도·성범죄(강간·유사강간·강제추행·강간추행)에 한정된 것이다. 방화가 강력범죄로 포함되고 강간에서 몰카범죄까지 다양한 유형의 성범죄가 강력범죄로 포함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한국의 관행적이고 독특한 강력범죄 분류기준이다. 미국 법무부의 강력범죄(Violent Crime) 통계를 보면 한국과 달리 방화가 빠져있고 폭행사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련 자료
NCVS Victimization Analysis Tool(NVAT)

이처럼 언론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강력범죄 피해자 8할 이상이 여자’라는 뉴스가 인용한 통계는 바로 이러한 한국의 흉악범죄 기준이다. 흉악범죄 기준으로 강력범죄 통계를 볼 때 여성 피해자 비율이 높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강력범죄 중에서 폭행 및 상해가 제외되고 성범죄의 범위를 늘려 잡으면 성범죄가 강력범죄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이른바 흉악범죄 중 성범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경찰청통계 기준 80%에 달한다.

이는 한국이 성범죄 천국이어서가 아니라 살인·강도·방화사건의 발생빈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과 최근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 몰카범죄와 같은 성폭력 사건도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특유의 통계분류 원칙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처럼 범죄 발생 빈도에서 흉악범죄보다 더 많고 남성 피해자 비율도 여성보다 훨씬 높은 ‘폭행죄’, ‘상해죄’ 등 다른 강력범죄 항목을 제외하고 남은 흉악범죄만을 한정해서 본다면 여성 피해자 비율이 더 높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참고로 2013년 기준 살인·강도·방화의 남녀 피해자 성비는 1.3:1이다(경찰청통계). 그리고 한국식의 법체계와 통계분류체계로 흉악범죄=강력범죄를 분류한다면 상당수 나라도 여성 피해자 비율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1~2013년 강력범죄 피해자 통계(경찰청통계)

물론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해서 성범죄를 비롯해 강력범죄에 대한 여성 측의 전반적인 불안감이 증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언론과 여성주의자들이 인용한 범죄 피해자 성비는 그러한 불안감을 설명하는 지표가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강력범죄에서 젠더이슈를 논의한다면 피해자 비율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강력범죄나 성범죄 자체의 발생빈도와 그에 대한 국가적 비교이다. 물론 이는 통계분류 원칙이나 법체계가 다른 국가들의 자료를 어떻게 비교할 것이냐는 까다로운 문제를 안고 있다.

이미 앞서 보았듯이 단순 피해자 성비만을 따진다면 UNODC 통계에서 2011년 여성 살해 피해자 100%를 기록한 아이슬란드는 전 세계 최고의 여혐국가(?)가 된다는 웃지 못할 결론이 성립한다. 실제 생활상의 안전과 직결되지 않는 피해자 비율이라는 지표를 두고 여성의 안전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이처럼 앞뒤가 안 맞는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범죄통계에서 나타난 피해자 성비만으로는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나 여성살해(페미사이드)가 만연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해당하는 살인범죄 통계를 보자. 2013년 살인기수(실제 살해를 당한 살인사건)와 살인미수를 합한 살인범죄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았을 때 남녀 피해자 성비가 1.6에 달한다. 살인의 위협 자체는 남성이 60% 더 많이 당한 것이다. 이 중 살인기수 사건만을 따져 볼 경우 여성 피해자 수가 남성보다 조금 더 많긴 하지만(남녀성비 0.9) 살인을 당한 피해자의 성비가 1:1에 수렴하는 범죄 안전 국가들의 지표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향은 아니다.

물론 살인미수와 살인기수의 피해자 성비가 역전되는 현상은 여성이 상대적으로 폭력에 더 취약하다는 점을 시사하지만 이마저도 여성을 표적으로 삼은 증오범죄의 만연을 보여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통계의 왜곡 및 과장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잘못된 길>에서 영미식 페미니즘을 비판했던 프랑스 페미니스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도 여대생 4명 중 한 명이 강간범죄를 당했다는 왜곡·과장된 통계가 검증 없이 언론에 유포된 전례를 비판한다.

“성폭력의 수치를 과장했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예는 1985년 <미주>라는 유력 잡지의 설문조사이다. 이 설문조사는 전통적인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심리학 교수 메리 코스(Mary Koss)에 의뢰되었다. 대학가를 대상으로 행해진 조사결과에 따르면 여학생 4명 중 1명이 강간 또는 강간미수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이들 피해자 중 4분의 1만이 자신이 겪은 일을 강간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코스는 3000명의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 남자의 집요한 압박과 논리에 굴복하여 성적 유희에 몸을 맡긴 경험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53.7%에 해당하는 여학생이 그렇다고 답변하였다. 결과적으로 53.7%의 여학생이 성폭행 피해자로 간주한 셈이다. ‘4명 중 1명’이라는 말은 이제 여성 잡지들과 강간에 대항하는 여러 단체와 정치인들의 여성학 분야에 인용되는 공식 통계수치가 되었다. 미국 페미니즘계의 스타였던 수잔 팔루디 (Susan Faludi)와 나오미 울프(Naomi Wolf)는 이 숫자를 마치 깃발인 양 사용했다.”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나애리·조성애 역, <잘못된 길: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중심, 2003, 44~45p

물론 통계해석의 허점을 지적받을 때 대다수의 여성주의자는 ‘표면적 통계’만으로는 여성이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반론하곤 한다. 물론 이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OECD 역시 보고서를 통해 “폭력을 동반한 강력사건의 피해자가 될 위험은 남성이 상대적으로 더 많지만, 여성이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더 많이 느낀다”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관련 자료
OECD Better Life Index

이처럼 여성의 범죄에 대한 불안감은 오랜 문제이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는 문제는 통계와 사실을 이미 존재하는 공포심을 더욱더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왜곡하는 지점이다. 이미 보았듯이 피해자 성비에 대한 통계만으로 여성의 안전문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언론과 절대다수의 여성단체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는 통계를 근거로 ‘여성 대상의 증오범죄가 만연해 있다’라는 공포 어린 메시지를 유포했다.

사진=강남역 10번 출구

어떻게든 강남역 살인사건을 증오범죄로 꾸며내야 했던 그들
무엇보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범죄 동기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 없는 보도가 잇달았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조현병을 앓는 범인이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을 내비친 일부 발언(평소 여자들이 나를 괴롭힌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강남역 사건 초기에는 사건이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로 규정됐다.

그러나 결국은 (여러 여성 프로파일러가 포함된)범죄심리분석 팀이 투입된 결과, 해당 사건은 정신질환에 의한 피해망상이 원인이 된 ‘묻지마 범죄’로 결론 내려졌다. 왜 이들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증오범죄로 규정하지 않고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것일까? 조현병을 앓는 질환자의 피해망상으로도 충분히 계획적인 범행이 가능하며, 이러한 망상성 범행의 대상은 여성·어린이·노인·외국인 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프로파일러들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실제 지난해 특정 민족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을 망친다는 망상에 시달리던 환자가 해당 민족사람 3명을 살해한 사건도 인종 혐오 범죄가 아닌 피해망상에 의한 정신질환 범죄로 처리했다”라는 것이다.

관련 기사
<조선일보> 警 ‘강남 화장실 묻지마 살인’ 프로파일러 투입결과 발표···2년 전부터 여성 대한 피해망상

물론 여성이 이러한 묻지 범죄에 취약하고 범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우려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것과 강남역 살인사건이 증오범죄냐 아니냐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일부 여성단체는 강남역 살인 사건은 ‘증오범죄가 아니다’라는 수사기관의 발표 자체에 분개하면서 검찰청 앞에서 시위를 벌인 바 있다. 마치 강남역 살인사건이 무조건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로 규정되어야만 여성범죄 문제를 더 잘 이슈화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처럼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시사하는 바는 단지 공포 상업주의에 편승한 여성계와 언론의 사실 및 통계 왜곡만이 아니다. 문제는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프레임 씌우기로 묻지마 범죄의 방지대책 마련에 대한 논의가 사장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노약자·어린이 대상의 폭행·살인·염산 테러 등의 묻지마 범죄가 다수 보고됐다. 지난달에도 조현병을 앓았던 한 여고생이 여아를 납치해서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애초에 묻지마 살인사건을 혐오범죄 프레임으로 바라본다면, 노인 대상의 묻지마 범죄는 노인혐오로, 어린이 대상의 묻지마 범죄는 아동혐오로, 외국인 대상의 묻지마 범죄는 전부 다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관된 잣대일 것이다.

그러나 범행의 대상이 소수자·약자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증오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 규정한다고 해서 그 범죄에 대한 대책이 더 잘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범죄에 노출된 취약계층 전반에 대한 보호의 문제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관리의 필요성(강남역 살인 사건의 범인은 2016년 3월 가출 후 약을 끊은 상태였다) 등 여러 가지 차원의 문제가 중첩된 문제였다.

그러나 ‘여성혐오’ 프레임에 맞춰진 일부 언론보도 속에서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해당 프레임 바깥의 사회적 맥락과 문제들은 가려지고 말았다. 그 결과 강남역 사건은 불행하게도 문제 해결에 대한 공론보다는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일각에서의 소모적인 남녀대립의 문제로 비화하고 말았다.

그것을 부추긴 공범 중에는 진보언론과 여성계도 있었다. 이 역시 ‘포비아페미니즘’이 가져오는 구체적인 폐단 중 하나이다. 사회 전반의 혐오감과 공포심 그리고 불안감을 부추기는 방식은 문제 해결은커녕 다른 약자·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지원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렇듯 성별 대립 구도로 강남역 살인사건이 보도되고 여론화된 결과, 시위와 일부 넷 공간에서 ‘살여(女)주세요’, ‘여자라서 죽었다’라는 선정적인 구호가 난무했고 더 나아가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자기 고백을 SNS에 인증하는 유행이 일각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사진=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대상의 일부 범죄에서 남성이 범행이 저질렀다는 근거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는 것은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에서 가해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잠재적 아동 학대범으로 규정짓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잘못된 논리는 대개 정치적 올바름(여성은 약자이기 때문에 일부 과격한 표현을 인정해야 한다)을 이유 삼아 눈감아지거나 심지어 일부 언론상에서 적극적으로 옹호되었다. 문제는 잘못된 사실과 논리에 기반을 둔 공포와 혐오의 확대재생산이 가져온 폐단마저 정치적 올바름의 견지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혐오발언과 정치적 올바름
일례로 강남역 살인사건은 해당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의 의사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슈화되었고 추모를 빙자한 강남역 시위현장은 서로에 대한 욕설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또한, 성별대립을 자제해달라는 유가족의 의사가 언론에 보도되자 해당 유가족에 대한 욕설이 SNS상에 쏟아지는 일이 있었다(박가분, <혐오의 미러링>, 바다출판사, 229p).

그들은 피해자와 유가족의 처지를 동정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유가족을 자신의 정념을 발산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SNS상에서는 밤길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줄 알아라’라는 메시지를 괴한으로부터 받았다는 식의 도시 괴담이 유포되면서 ‘모든 한남충(한국 남성 비하용어)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식의 또 다른 혐오 발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사건규정과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여성혐오’라고 몰아붙이는 일이 생길 지경이었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사건의 발생 동기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고 보도하는 것도 여성혐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따르면 당시 사건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던 상당수의 사람을 졸지에 혐오주의자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것은 오히려 여성혐오에 항의하는 측의 담론야말로 혐오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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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론]히틀러가 정신질환자일 가능성도 생각해보자

아돌프 히틀러

이를테면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이며 그들 안에 여성혐오라는 위험한 성향이 꿈틀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남성이 그 내면에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내재화하고 있는 잠재적 가해자라면 단순히 그들로부터 자기반성과 자기 고백을 이끌어내는 것만으로 그들의 가해자성(?)을 제거할 수 있을까?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은 해결책과 대안을 처음부터 봉쇄한다.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 속에서는 사실 잠재적 가해자 측의 고백이나 자기반성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고 그저 메갈리아·워마드 식 낙인찍기에 기반을 둔 혐오 발언만이 유일한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여성혐오뿐만 아니라 인종적 증오와 같은 담론적 구조를 지닌다. 그들(한남)은 교정될 수 없는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에 끝없이 낙인을 찍고 괴롭혀야만 한다. 마치 일베 유저들이 한국여성을 ‘김치녀’라고 비하하면서 ‘삼일한(삼일에 한번씩 팬다)’ 운운했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메갈리아·워마드 식 혐오 발언에 심취해 있는 이들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지속적인 혐오 발언을 한남들에 대한 일종의 ‘교정수단’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메갈리아에 올라온 “앞으로의 메갈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봤다”라는 글에서 글쓴이는 메갈리아가 나아갈 방향을 “한남충 길들이기”라고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도를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가져가야 할 프레임은 ‘이런 이런 남자가 보지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프레임이다. 이 새끼들은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다 귀담아듣는다. 좆질 외엔 아무 생각도 못 하는 남자의 슬픈 운명 아니겠노.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곳은 ‘여성의 우월함’ 고취, ‘열등함을 극복한 남자들이 사랑받는 법’ 설파, 이 두 가지라고 본다. 그와 동시에 워마드에서는 염산 공격으로 한남들 줘패야 하고 메갈에서는 ‘이런 이런 조건을 충족한 한남들은 먹어는 준다’ 이런 식의 초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가분, <혐오의 미러링>, 182p

원래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던 인종주의와 여성혐오 담론과 정확한 같은 담론으로 퇴행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의 폭주가 오늘날 봉착한 자기모순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사회구조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정체성 정치는 결국 메갈리아·워마드 식 포비아 페미니즘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보았듯이, 불평등 문제든 범죄문제든 사회문제 전반을 특정 정체성과 주관적인 내적 성향의 문제에 결부시키는 순간, 개개인의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모순과 사회구조의 문제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각자의 정체성을 둘러싼 인정 투쟁의 악순환이 반복된다.이러한 관행이 우리를 실제 삶의 문제에서 얼마만큼 진전시켰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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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경제학 석사. 프리랜서 작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