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지지자와 인정투쟁에 나선 진보진영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타인이 어떤 구조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어떤 구조에 사로잡혀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렵다. 그것을 안다손 치더라도 그런 인식은 항상 뒤늦게 온다. 누군가 속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무언가 속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비슷한 말로 ‘속지 않는 자가 속는다’는 격언이 있다.

최근 진보언론과 진보진영이 문재인 후보 시절부터 짜 놓은 담론적 구조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프레임 아래 놓여 있었고 그것이 어떤 인식을 방해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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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이 파시스트라고 일침을 놓는 일부 진보논객들에 대해서 이것을 더욱 권해보고 싶다. 사실 아무것에 대해서나 파시즘 홍위병 딱지 붙이는 건 2002년 붉은악마에 대해 파시즘 운운한 박노자부터 시작한 진보의 유구한 전통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매우 게으른 방식의 비평이기도 하다. 진보진영은 과거부터 어려운 말을 잘 주워섬기는 것에 비해서는 세밀하지 못한 비평으로 스스로 발목 잡히곤 했다.

우선 이들이 비난하곤 하는 문재인 지지자, 특히 넷상 문재인 지지자들의 담론부터 살펴보자.

문재인 지지자들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을 적폐로 규정하며, 자신들은 그들로부터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는 엄호세력이라 인식하고 있다.

사진=문재인 캠프

그것을 정당화하는 ‘서사’는 노무현의 몰락에 기여한 것은 진영 내부의 ‘배신자’들이었다는 스토리이다. 그런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솔선수범해서 사악한(?) 진보언론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공정하게 하자면 과거의 역사는 그보다 더 복잡하다. 참여정부의 실정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프레임 때문에 선거에서 번번이 지던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이 노무현 임기 말과 임기 이후 자신들에게 들러붙은 노무현 프레임을 지우기 위한 갖은 애를 쓴 것도 사실이다.

인터넷 용어로는 ‘손절’ 각이었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경향신문의 (사실상 자살을 권유하는)‘장엄한 낙조’ 드립이 나왔고 한겨레의 ‘놈현 관장사’ 드립이 나왔던 것이다.

 

경향신문 2009년 4월 16일자 ‘굿바이 노무현’ 칼럼
한겨레 2010년 6월 11일자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 기사

나는 문재인 지지자와 그 진보적 비판세력 모두가 서로에게 공정해질 것을 권하고 싶다. 과거 참여정부의 무능과 정책실패는 분명하다. 쉴드 치기는 어렵다.

동시에 첨여정부 시절의 진보진영과 언론도 분명한 정책도 대안도 비전도 없이 현 정부를 때림으로써 손쉬운 점수 따기에 혈안이 되어 결국 9년간의 수구정권 암흑기를 예비했다.

이게 불공정한 비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렇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시 민주노동당과 운동세력이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 포데모스처럼 대중 정치의 급진적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고 노무현의 공백을 메웠더라면, 그들의 행동이 사후적으로 정당화가 되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러지 못했다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운동권 용어대로 노무현 당시 진보세력도 소위 ‘정세판단’이 안되었다. 정치적으로 자립할 능력도 사회적 비전도 없으면서 리버럴 개혁성향 정부를 대안도 없이 때리면 마치 자신들에게 살길이 열리리라는 것처럼 착각했다. 그러한 착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 문재인 지지자들이 가져가는 서사는 좋았던(?) 옛 시절의 표현대로라면 ‘자생적인 민중서사’이다. 사실관계에서는 다소 부족하지만(예컨대 진보언론은 사악한 게 아니라 단지 찌질할 뿐이다) 적폐로 불릴만한 잘못된 정치·사법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견제의식을 동원하는 데 이러한 종류의 서사는 한편으로는 유용하다.

진보진영의 논객들은 문재인 지지자들이 파시즘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이 파시즘으로 변질되려면 자유주의와 법치주의 이념을 수용하는 이들이 아주 많은 변화의 단계를 겪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문재인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문화대혁명식 죽창질이 아니라 법과 절차에 따라 검찰을 개혁하고 청와대 인사를 물갈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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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문재인 지지자들이 파시스트라면 그들은 진보언론인들하고 인터넷상에서 드잡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SNS와 넷상에서 상호 드잡이질과 격한 논쟁 그리고 어그로의 형태로 자기 정치를 해왔던 넷좌파와 넷진보의 방식을 문재인 지지자들도 그대로 차용하는 것뿐이다.

문재인 지지자들이 파시스트라면 넷진보좌파도 파시스트이다. 물론 어느 쪽의 이야기도 언어도단이다.

만일 문재인 지지자들이 파시스트라면 대한민국 정부 트위터 계정이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색을 썼다고 몰려고 항의한 성소수자 활동가들도 파시스트이긴 매한가지이다.

문재인 지지자들을 홍위병이라 부르는 것은 이들을 무지개좀비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언어도단이다. 그저 흔히 보았던 인터넷의 인정투쟁과 논쟁방식일 뿐이다. 서로 공정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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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재인 지지자들이 저토록 ‘후진’ 정치서사를 가지고 있다면 진보좌파들은 어떤 서사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서사 없는 정치는 불가능하다. 대중의 마음을 끄는 데 스토리텔링만 한 것은 없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김대중 시대, 노무현 시대, 그리고 각각의 시대의 한계와 아쉬움을 끝낼 마지막 시대(최후결전?!)로서의 문재인 정부라는 꽤 기승전결이 명확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명왕(?) 문재인은 과거의 완결되지 못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고독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내친김에 말하면 고독한 영웅이자 어벤저로서의 문재인 이미지를 굳히는 데 기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선국면 때 ‘유약한’ 문재인 프레임을 확산시킨 진보언론과 진보진영이다.

실제로 문재인은 유약한 무골호인 타입이 아니다. 그러나 그 프레임이 역설적으로 문재인 지지층의 보호 본능을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자기 프레임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의 스토리텔링은 무엇인가? 진보진영은 오히려 정확하든 부정확하든 ‘서사 없음’이 문제 아닌가? 기승전결이 없고 똑같은 내부모순과 똑같은 논쟁과 똑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것이 진보진영이 만년 5~10%대의 박스권에 갇혀 있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런 이야기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영화로 만들면 폭망하기 딱 좋다.

물론 진보진영에도 나름대로 서사가 있다. 일종의 피해자 서사 말이다. ‘믿었던 정부로부터 실망만 하고 우매한 대중들이 자꾸 나를 괴롭힌다’ 서사 말이다. 진보진영은 이 서사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이 실린 <한겨레>

생각해보면 최근 진보진영에서 페미니즘이 일종의 핫이슈인 것도 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과 진보진영은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의 피해와 상처에 강박적으로 몰입한다는 점에서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

얼마 전 정의당의 인사가 더민주의 사표론으로 피해받은 자신들을 성폭행 피해자에 비유한 것이 그 전형이다.

확실히 친노와 친문 지지자들이 공유하는 정서와 이야기는 키치(Kitsch·미학에서 저속하고 유치한 미적 사물을 의미한다)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실정치는 원래 키치라는 사실부터 인정하는 것이 진보진영 본인들에게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버니 샌더스도 제레미 코빈도 시리자도 포데모스도 친문 지지자만큼 키치하다. 정의상 심오하고 고상한 정치변화는 없다. 난해하고 고상한 고다르 영화에 열광한 젊은이들이 주도했던 68혁명은 결국 실패한 혁명일 뿐이다.

박가분

경제학 석사. 프리랜서 작가.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