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해석하고 싶은대로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이 편견과 차별의 대한민국 만든다

흔히 귀납적 추론을 할 때 경험적 규칙을 인지하는 측면에서 우리는 참 많은 오류를 범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한때 유행했던 ‘혈액형별 성격’ 판단이 대화 주제로 많이 오르락내리락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점술과 종교, 연애 등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많이 개입된다. 경험적 증거의 규칙성을 따질 때, 흔히 우리는 다른 개인과 다른 상황을 혼동하고 같은 묶음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사실을 ‘해석하고 싶은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사실 혈액형 성격 분석과 점술, 종교적 가르침의 상당수는 확증편향을 유도하는 서술 구조로 되어 있다.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소담출판사)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소담출판사)

한국 사회에서 유난히 이런 문제가 도드라지는 것은 이러한 확증편향을 유도하는 서술이 ‘상품’으로 팔리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자기계발서’ 류의 도서와 미디어 콘텐츠가 소비되고, 도시 괴담이 잘 유통되는 구조랄까.

문제는 다수의 사람이 경험적 규칙을 검증하는 비판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주입식 교육의 문제인데, 언제나 우리는 패턴을 찾을 때 ‘의문’을 가지게 마련이다. 의문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고, 패턴을 만들어내는 증거들에 대한 의문도 다시 이어져야 한다.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삶의 롤 모델이 획일화된 이러한 상황, 혈액형 성격 분석이 재미를 넘어서서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있는 이 나라에서는 비슷하게도 사안을 바라볼 때 경험적 규칙을 잘못 인지하여 ‘차별’과 ‘편견’이 발생할 여지가 커진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은 외국인 강력 범죄에 대한 보도와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군에 대한 편견이 결합하였다. 3D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낮으며 교육수준이 곧 준법 수준과 교양 수준을 결정한다는 직업 차별의 연장선이었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의 범죄율은 높지 않다. 홍만표 변호사의 문제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는 상대적으로 화이트칼라 범죄의 수준이 더 위험한 국가이다. 이자스민 전 의원에 대한 집단 린치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는 편견과 차별이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존재한다.

게다가 이번에 로스쿨 측이 학교별 등급을 점수화하는 기준으로 ‘성실성’을 들었다. 대입 과정에서 ‘부모의 재력’과 ‘교육수준’이 자녀의 학업 성취도와 관계가 있다는 연구를 보면서도 우리는 뭉뚱그려 개인의 ‘성실성’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각자 개인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균질화한 오류이기도 하다.

최근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어떤 집단을 균질화하려는 발언이 많다. 특히 차별적 용어를 만들어내는데 일베는 상당한 사회적 이바지를 했다. 지역 차별과 여성 차별(혐오) 표현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김치녀’, ‘김여사’ 등을 보라. 반대로 ‘씹치남’을 보라. 특정 집단을 자신의 경험적 규칙에 따라 그대로 균질화시켜서 언어화시켰다.

우리는 이걸 편견과 차별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공감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공감을 위해서 다른 점마저도 분별없이 유사 사례로 인지하면 결국 편견이 탄생한다. 때로 어떤 사람이 분명 사례에 대한 공감은 하지만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할 때, 이 점을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학부형 세명이 만취한 여교사를 데려가 강간한 흑산초등학교 관사(출처 MBC)
학부형 세명이 만취한 여교사를 데려가 강간한 흑산초등학교 관사(출처 MBC)

이번에 신안군 흑산도 성범죄와 관련하여 농촌 사회의 폐쇄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폐쇄성 차원에서는 수긍하지만, 그것을 ‘범죄’의 영역으로서 그 집단을 균질하게 패턴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매우 문제가 있다.

나 또한 외가에 가면 간혹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한국의 농촌에는 아직 근대적 개인주의에 대한 관념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로 자라났고, 개인 공간에 대한 관념이 분명한 나에게는 외조모의 지인들 행동은 굉장히 무례한 수준도 있지만, 범죄가 아닌 이상 이해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란게 있다) 도시적 문화에서는 ‘무례’와 ‘범죄’가 될 수 있는 영역이 농어촌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대 간 문화에서도 이런 형태는 남아있다. 나이 든 사람이 나를 훑어보고, 사생활에 질문한다. 분명 불쾌하지만, 그들 세대의 경험과 삶의 방식에서는 악의가 없다. 차세대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러한 행동을 성희롱 혹은 사생활 침해, 개인주의적 불쾌감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경험적 규칙들을 악의성과 고의성으로 균질화하는 것은 편견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사회는 집단주의가 강하다. 즉, 이 말은 집단을 균질하게 바라보는 게 습관화된 사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은 의도든 인권적 측면이 있든 특정 인종과 성, 계층, 출신을 균질화하고 규칙성 있게 간주하는 것은 큰 위험성이 따른다. (학교 이미지, 동네 이미지 운운하는 것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가 잘 자각하지 못 하는 진짜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을 ‘다른 각각의 인간’으로 인식하는 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도 정말 경계해야 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규칙화하고 균질하게 특정 집단을 바라보게 되면 문제 해결은커녕 본래의 목적과 또 다른 차별과 혐오가 되어버린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각 사건에서 개인을 개별적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집단으로서 범주화되는 문제는 이런 관점이 통용된다고 생각한다. 여성·남성 혐오 논쟁,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대책, 블루칼라 노동자 학력 논쟁, 이번에 신안군 흑산도 사건과 농어촌 사회 규정 등 여러모로 개인과 집단에 대한 논점이 많은 듯하다.

임형찬

'정치하지마라' 저자
bucurest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