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찬의 리얼한 대한민국] 분노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의 삶에 대하여

1811년 9월 조선에서는 홍경래라는 인물이 평안도 가산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조선 정부가 평안도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것이었다. 홍경래는 대과에서 낙방했는데,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울대 한영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영조 이후 합격자 5191명 중 16%에 해당하는 829명이 평안도 출신이었다.

즉, 조선 8도 중에서는 한양을 제외하고 평안도 출신이 가장 많았던 것이었다. 이인좌의 난이 영남란(嶺南亂)으로 명명됨에 따라 영남 지역이 몰락한 탓도 있지만 적어도 과거제도 하에서 평안도 출신이 차별받았다는 홍경래의 말은 ‘사실무근’이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일반 양인들과 중인들은 평안도 차별을 공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평안도는 영남과 호남보다 땅이 척박하여 대부분 사람이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는 농업이 나라의 중추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평안도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느꼈던 차별에 대한 분노는 홍경래의 말에 폭발했다.

평안도는 고려조의 지역이라고 차별을 받았고, 추운 지방이라 남녀가 같은 방에 기거하거나 형사취수는 아니지만, 형제의 미망인을 받아들여 부양하는 등 유교적 질서에 부합하지 않은 문화로 차별받았다. 한마디로 기호 지방 이남의 유학자들은 체험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라는 것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평안도와 함경도가 이러한 차별을 받던 지역이었다. 홍경래의 난이 19세기였으니 조선이라는 왕국이 건국된 지 약 400년이 흘렀음에도 이런 문화적 차이에 대해 몰이해가 차별적 정서로 드러났다. 서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진지한 경험과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유학적 질서’보다 기후 조건과 생산 양식에 따른 삶의 방식을 고민해봤다면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들에 대한 멸시적 관점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서북 지역 백성들은 홍경래의 이야기에 그저 대과 시험에 떨어진 패배자가 지껄이는 헛소리쯤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시민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된 ‘묻지마 살인’ 피해자에 대한 추모의 글을 남기고 있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시민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된 ‘묻지마 살인’ 피해자에 대한 추모의 글을 남기고 있다.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의 집단적 분노가 정점에 치달았다. 지금까지 가부장제 아래에서 벌어진 사회적 차별과 성폭력의 위협이 해당 사건으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렸어야 할 ‘안전할 권리’에 대한 위협은 사실 남성이 생각하는 것 이상일 수 있다.

남성들은 사실 여성들의 의식 자체를 정확하게 공감하기 어렵다. 차라리 조선 시대 평안도 백성들의 삶이라면 더 나았겠지만, 남성은 여성의 삶을 경험해볼 기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녀가 다른 쪽을 차별하고 혐오한다는 것은 자신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동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분노의 근원 자체에는 공감해줄 필요가 있다. 또한, 남성 집단들이 차별을 공고히 하거나 혐오를 표방하는 행위와 언어적 표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경멸해야 한다. 반대로 여성이라고 그 분노를 명분으로 상대에 대한 ‘혐오적 언어’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다.

혹자는 이러한 필자의 이야기를 ‘맨스플레인’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녀 갈등이란 결코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또한, 여성이나 남성이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공존이라는 목표와 더불어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그리고 최근 신안군 집단 성폭행 사건에 대응하여, 왜 여성단체들은 강남역이 아닌 사건에 대해서 외면하느냐라는 비판도 유효하지 않다. 그들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공존이라는 목표가 있다면 남성들이 대신 그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좀 더 차별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균형점을 맞출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조금 분노보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른 성별에 대한 혐오와 비난보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점이 무엇일까를 한 번 따져보면 어떨까 싶다. 분명 남성은 여성의 성폭력 위협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반면 여성 또한 남성들의 군 복무 당시에 체험하는 신체적, 정서적 위협에 대해서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전자나 후자나 내 가족으로서 주변 이웃으로서 당사자성이 있었던 주제들이었다는 점이다. 공감에 대한 정서를 좀 더 넓혀보면 서로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함께 합의하고, 부당한 일에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헬조선’을 바꿀 키는 이미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손에 넘어와 있다. 우리가 모른 채 천천히 시간은 흘러갈 뿐이다. 그 세월을 비난과 분노로서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의문은 “왜 우리는 분노하는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