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범죄 바라보는 페미니즘의 시각 온당할까

최지혜의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 칼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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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뉴스>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

1. 논의에 앞서
최지혜가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는 글에서, 그동안 한국사회에 남성이 여성을 죽이는 사회구조가 존재한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친다. 일견 피해망상증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이번 글은 그동안 남성이 가해한 범죄문제에 대해 제출됐던 최근의 페미니즘 담론의 조류를 실로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동안 페미니즘이 사용했던 외골수의 논리와 논리적 비약들도 집대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번 글이 나온 것이 꽤 반갑다.

사진 1. 최지혜 페이스북 캡쳐
사진 2. 제목이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가 안 되면 글 게재 취소 요청에 <슬로우뉴스>가 제목 그대로 발행했다. 최지혜 페이스북 캡쳐

곧 출간될 <포비아 페미니즘>에서도 지적될 사항들이지만, 일종의 예고편격으로 최지혜가 사용한 전형적인 논리가 어떻게 우리를 나쁜 결론으로 이끌고 가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범죄문제에 대해 다수의 여성주의자가 외면하는 사실
우선 쓸데없는 논란을 피하고자, 몇 가지 전제를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의외로 많은 페미니스트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외면하는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첫째, 확실히 남성이 여성보다 살인범죄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여기서 최지혜를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이 외면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남성 역시 여성과 마찬가지로 살인과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되며 그 비율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법무부의 강력범죄(Violent Crime) 분류기준(살인·강도·강간·폭행)에 따르면 한국 남성이 일상에서 강력범죄를 당할 가능성이 여성보다 더 높다. 반면, 연간 십수만 건씩 일어나는 폭행이 제외된 채 살인, 방화, 강도, 성범죄를 기준으로 잡은 한국의 강력(흉악)범죄 통계분류 체계에서는 강간에서 몰카 촬영까지 반영된 성폭력 범죄가 전체 강력(흉악)범죄 발생 건수의 80%를 차지하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 피해자 비율이 높게 나온다. 강력범죄 중 높은 성범죄 비율은 한국이 성범죄 천국(?)이어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법체계와 통계분류체계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미국 법무부의 강력범죄 통계 분석툴

앞서 본대로, 남성이 겪는 피해 역시 엄연히 존재하지만 여성계에서는 남성이 겪는 범죄 피해들을 마치 남성들 사이의 자업자득의 일인 것인 양 바라보며, 오직 여성만이 폭력의 피해자인 것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 김지은 기자는 남성 피해자 비율이 더 높은 폭행 및 상해 사건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폭력사건의 경우 술자리나 거리에서 남성끼리 드잡이를 하다 벌어진 일”이라고 평가절하 한 바 있다. 마치 남성 사이에는 일방의 폭력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이처럼, 폭력 및 범죄사건의 책임을 범죄가해자와 범죄사각지대를 방치한 정책당국에 묻기보다는 남성 전체에게 묻는 이러한 편향된 인식은 결국 남성과 여성을 각각 적대하는 계급으로 표상하는 페미니즘 일각의 오랜 사고에서 묻어나온다. 그리고 이들의 경직된 세계관 속에서 (페미니즘의 표현대로라면) 남성의 범죄피해는 ‘삭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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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여성이 범죄에 대한 더 많은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OECD 범죄 보고서에서도 기재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이것은 실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압도적으로 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기보다는 여성이 사회심리적으로 안전에 더 많은 가중치를 두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실제로 OECD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이 폭력 및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될 위험이 더 크지만, 여성이 안전에 대한 더 큰 불안감을 갖는다.”

더군다나 최지혜는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범죄에 대한 불안감을 근거로, 자신의 글에서 인구의 절반을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된 조건 속으로 편입된”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며, 다른 인구의 절반을 무력한 피해자로 간주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실제로는 바로 이러한 ‘남성=잠재적 범죄자’ 이론이 오늘날 저널리즘에서 노출되는 페미니즘 담론의 주된 경향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이후에 보다시피 어리석은 결론으로 향한다.

3. 근본귀인의 오류
요사이 페미니즘이 자주 범하는 오류는 바로 근본귀인의 오류이다. 근본귀인오류란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의 원인에 관해서 상황적인 요인과 조건의 힘은 과소평가하고 그 사람 자체의 속성과 성격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성범죄 사건이 일어날 때 나오는 ‘여자가 조신해지 못해서’와 같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와 대칭적인 오류는 ‘남자는 원래 짐승이 되기 쉬워서’와 같은 이야기이다.

한편 오늘날 페미니즘은 과거의 ‘이 남자는 원래 짐승이라서’라는 수준의 논의를 현학적인 용어로 포장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집어넣는다. 그것은 바로 사악한 ‘짐승’인 남성들이 죄악감을 가지고 반성하고 죄를 고백하라는 것이다.

근본귀인의 오류는 여성 대상의 강력범죄와 살인사건을 습관적으로 ‘혐오범죄’라고 명명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강력범죄와 살인사건은 대부분은 범행대상에 대한 악의를 동반하기 때문에 정의상 ‘증오범죄’나 ‘혐오범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명명은 동어반복일 뿐 범죄문제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살인사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보다 더 구체적인 상호 간의 원한 관계나 금전 관계 등이며 성별 자체가 범행동기를 유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폭력·강력범죄에 동반되는 범행 가해자의 혐오나 증오는 현실적인 범죄대책에 대한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여성주의자는 이러한 살인사건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증오’나 ‘여성혐오 성향’을 끄집어내어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특히 이러한 나쁜 버릇은 살인이나 강력범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취약계층에 대한 대책 마련이 아니라, 인구의 절반에 대한 거의 주술적인 행위나 다름없는 집단반성과 죄악의 고백에 대한 요구라는 나쁜 경향으로 이어진다. 한때 이성과 진보의 편에 섰던 진보진영이 페미니즘과 더불어 이러한 비합리주의의 전형으로 스스로 퇴행한 것은 필자로서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4. 비판의 대상이 무엇인가?
최지혜의 칼럼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그 비판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지혜만의 잘못은 아니다. 자기 자신도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남성의 문화와 인식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요사이 저널리즘에서 나타나는 페미니즘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로 돌아가면, 최지혜는 자신의 글에서 “남자가 여자를 죽이는” 구조가 엄연히 존재하며, “남성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된 조건 속으로 편입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의 범죄자 상당수는 남성이고, 이것이 통계적으로도 뒷받침된다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해서 살인자의 대다수는 남성이라는 것이 최지혜에게 있어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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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의 논리대로라면 “여자를 죽이는 남자”의 문제는 보편적이며 여기에 대한 탈출구는 없다. 미국 법무부에서 발간한 <Homocide Trends in the United States, 1980~2008>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30여년 간 일어난 살인범죄의 가해자의 90%가 남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어느 나라든 비슷할 것이다. 최지혜의 논리대로라면 살인이나 일삼고 다니는 저 폭력적인 남성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말 그대로 전 지구적인 지옥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편, ‘살인자 다수가 남성’이라는 사실은 현실의 ‘남성 상당수가 위험한 범죄성향이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남성의 본성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현실의 남자 (혹은 여자)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지 않도록 가로막는 제도적·행정적·교육적 조건 속으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OECD 기준으로 한국의 살인발생빈도는 십만 명당 한 명에 가까우며 이것은 평균 십만 명당 4.1명의 살인피해자를 낳는 OECD 기준에서도 범죄안전국에 가까운 수치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살인 대다수를 남성이 저지른다고 해서 남성이 살인을 저지를 확률이 높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둘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지만, 저널리즘에서 양산된 페미니즘 담론에서 그 이야기는 동일시된다.

강남역 살인사건

내친김에 말하자면, 살인발생빈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남녀의 피해 격차가 낮아지는 것도 만국 공통의 현상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는 보고서에서 살인범죄 발생빈도가 낮으면 낮을수록(구체적으로는 10만 명당 1명) 살인범죄 피해자의 남녀성비가 1:1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UNODC Global Study on Homicide:2013>, 54페이지)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나 일본 같은 일부 범죄안전국은 연간 여성 살인피해자가 남성보다 많을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살인발생빈도 자체가 매우 적기 때문에 피해자 성비는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살인사건 자체가 적은 것보다 살인 피해자 중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을 마치 바람직한 상황으로 인지하는 듯하다.

5. 여자를 죽이는 남자 vs. 남자를 죽이는 사회?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매년 한국에서 실제로 살해당하는 여성의 수(살인미수 제외)는 대략 100~200명이다. 살인미수까지 합치면 살해의 위협을 당하는 수는 남성이 더 많지만, 실제 살인 피해자는 여성이 약간 더 많다. 이것은 여성이 폭력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한편, 많은 여성주의자는 이것을 남성에 의해 여성이 ‘살해(젠더사이드)’당하고 있다는 증거로 남용하고 한다.

이러한 과장법의 남용은 우리를 끝없는 인정 투쟁의 악순환으로 끌고 간다. 페미니즘의 논리대로라면 남성의 죽음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서사화할 수 있지 않을까?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15년 산업재해를 당한 남성은 7만2059명이고 여성은 1만8070명이다. 또한, 전체 산업재해 사망자(1810명) 중 남성의 수는 1746명이다. 산업재해 사망자 중 96%가 남성이다.

만일 여성이 매해 증오범죄로 인해 살해당하고 있다면 남성의 목숨은 그 과장법을 차용하자면 그 대여섯 배의 규모로 산업현장에서 소모품 취급을 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인류역사상 산업현장이나 전쟁터에서 남성의 목숨이 여성의 목숨보다 더 경시되어왔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한 <소모되는 남자>라는 책도 존재한다.

<소모되는 남자> 저자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출판사 시그마북스

한쪽에서는 남성에 의해 여성이 죽어 나간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도 사회가 남성을 여성보다 함부로 대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반성하고 죄책감을 가지라고 삿대질을 하는 것이 이제는 인터넷과 저널리즘의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필자는 성별을 나눈 어느 쪽의 피해자 서사도 그럴듯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젠더문제에서 대개 이성을 잃는다. 필자는 이것이 매우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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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경제학 석사. 프리랜서 작가.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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