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멈춘 80년대생 여자들

“잘 생겨서 그랬어요”

초등 여교사가 12세 제자와 성관계를 맺었다(의제강간)가 걸렸다는 얘기가 연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사건에서 주목한 것은 해당 사건의 민망한 서사가 아니라, 해당 여교사의 범행동기였다. 해당 여교사는 자신이 12살 제자에게 무려 만두씩이나 사주며 성관계를 맺은 이유가, ‘잘 생겨서’였다고 진술했다.

사진=YTN

‘제정신이 아니었다’, ‘불행한 가정생활로 외로움이 심했다’ 등이 상식적인 변명이라고 생각했던 필자에게, 해당 여교사의 솔직한 진술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30대 초반 여성이 갓 2차성징을 시작했거나 시작하지도 않았을 12세 초등학생을 ‘잘 생긴 남자’, 즉 완벽한 성애의 대상으로 인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성애의 대상’
성애의 대상이란 쉽게 말해 ‘성관계를 맺고 싶은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성관계를 맺고 싶은 대상이란,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긴 하지만 대개 사회적 흐름을 따른다. 미의 기준도 변하고, 사회의 통념도 변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60년대 선호되던 배우와 2010년대에 선호되는 배우가 전혀 다른 외관을 가진 것과 같은 이치이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 또한 성별과 상관없이 나이 차가 큰 커플들이 등장하고 있다. 나는 이 현상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딱히 논하고 싶지 않다. 성인 간의 성애는 그 대상이 누구이건, 방법이 어떤 것이건, 사회적 문제라고 단정 짓는 일이 반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대상이 미성년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미성년자를 향한 성애가 항상 문제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미성년자 간의 성애는 발랑 까졌지만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나이 차가 거의 나지 않는 20대 초반과 10대 후반의 성애 또한 크게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어엿한 성인이라 불리는 20대 후반 이후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20대 초반과 20대 후반을 구분하지는 않지만, 사회 통념상 직업을 갖는 나이가 되면 어른으로 본다. 그리고 어른에게는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할 사회적인 의무가 있다. 만일 어른이 실제로 미성년자를 보호하지 않고 성애의 대상으로 삼아 성적인 행위를 한다면, 그에게는 사회적 질타와 법적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설령 구체적인 행위가 없고 상상만 해도 사회적 질타는 충분히 쏟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러나 ‘미성년스러운’ 성적 기호는 상당히 대중적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부분의 정상적인 성인들은 이것을 판타지로만 소비하고 있다.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정상적인 성인에게 성애의 대상은 같은 성인으로 국한된다. 그리 많지 않은, 절대 사회의 다수라고 볼 수 없는 비정상적인 성인들만이 ‘미성년 성애’를 기호가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미성년 성애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 미성년 성애가 ‘성장 정체’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우겠다. 실제로 소아성애자들은 대부분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이들이 자신의 내면을 ‘미성년’이라고 전제하고 있기에 성애의 대상 또한 미성년이 된다는 가설은 합리적으로 들리는 부분이 있다.

성장이 멈춘 80년대생 여자들
필자는 한국사회의 80년대생 여자들을 볼 때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30대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만은 여중생이나 여고생으로 사는 게 아닐까. 정서적으로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강박적인 피해자 정서를 가진 데다, 편 가르기에 상당히 집착한다.

행동 양식도 잘 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 10대 시절 동네 번화가에 나가 짬빠이(돈을 나눠서) 해서 아이스베리 먹던 애들이, 그대로 30대가 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 연남동, 이태원, 가로수길 등지의 맛집을 찾아서 더치페이한다. 스티커 사진이 셀카와 인스타그램으로 바뀌었고, 대화 주제도 거의 차이가 없다. 10대 시절 주된 대화 주제는 연예인 얘기, 친구들 얘기, 옷이나 화장품 얘기, 잘 생긴 남자 얘기, 공부 얘기, 선생님 뒷담화다. 그리고 30대가 되어 그대로 연예인 얘기, 친구들 얘기, 옷이나 화장품 얘기, 만나는 남자 얘기, 먹고 사는 얘기, 직장상사 뒷담화다.

연남동 골목길(사진 출처 SBS)

남자는 다른가
물론 남자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대단한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인간은 어릴 때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유독 여자들에게 변화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남자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 요구되는 역할이 점점 생겨나고 그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과 달리, 여자들의 역할은 한정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한국 남자의 경우 주로 직장이라는 곳에서 주는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신입부터 시작해서 부장이나 임원까지 그려놓은 듯 정해진 역할들이 있다. 실제로 한국 남자들의 인생이란 조직에서 역할을 찾는 것으로 시작해서, 역할을 내려놓고 조직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역할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역할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반면 한국 여성은 2000년대까지 직장을 비롯한 사회에서 다층적인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냥 ‘엄마’가 지배적인 역할이었다. 90년대에 크게 신장하긴 했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산업현장에는 유리천장이 두껍게 존재했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에 좌절되었던 여성들은 2000년대에 자신들의 염원을 담은 대단한 반격을 준비하는데, 그것이 바로 ‘알파걸’이었다.

심리학자 댄 킨들런의 알파걸

2000년대가 되자 심각하게 보수적인 가정이 아닌 이상, 엄마들은 딸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여자가 남자를 이길 수 있다고 북돋아 주었다. 그래서 딸들은 초등학교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가파르게 치솟아 2010년대에는 남성을 역전하게 된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교실 안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풍경’은 조용한 혁명처럼 찾아왔다.

그러나 이 ‘알파걸 역할’이 문제였다. 엄마들이 자신의 딸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저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을 얻어서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였다. 동년배 남자들에게 좋은 대학을 들어가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은 보통 ‘좋은 와이프(엄마)’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이었던데 비해, 알파걸들은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알파걸이 되었다.

알파걸이 되었다. 그다음은
문제는 알파걸이 된 다음에 있었다. 대학 나와 직장 얻어서 먹고 살 만큼 돈을 버는데, 그게 끝이었다. 이것이 엄마가 80년대에 태어난 딸에게 설정해준 역할의 종착이었다. 그 후로는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 것도 생각만큼 녹록지 않을뿐더러 이 뒤로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들은 ‘알파걸이 된 다음의 삶’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 애초에 ‘알파걸의 삶’이라는 것도 엄마들의 좌절과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판타지에 불과했다. 좋은 대학→좋은 직장→중상류층의 생활 수준은 사회경제적 지표에 불과할 뿐, 그 어떠한 가치도 담지 않고 있다.

다행히 80년대생 여자들은 보통 그들의 엄마처럼 살지 않는다. 올해 출생아 수는 최초로 30만명대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금 80년대생 여자들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결혼하더라도 딩크가 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산업현장의 유리천장도 많이 개선되어서 20대, 30대 여성 취업률도 건국 이래 최고 수준이다. 20대 여성 취업률은 남자보다 높으며, 각종 시험 합격자 성비 역전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30대’ 여학생들
80년대에 출생한 여자들을 ‘알파걸 세대’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들이 여전히 ‘여학생’의 내면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간접 증거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프로듀스 101 시즌 2>의 메가히트, 욜로 현상, 뷰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심장하다고 보는 것은 <프로듀스 101 시즌 2>의 메가히트이다.

미성년자 여성에 대한 성애적 접근에 대해서는 그토록 불편해하던 여자들은,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미성년자 남성에 대해 똑같은 성애적 접근을 하고 있다. 앞서 가정한 것처럼 미성년자에 대한 성애적 접근이 스스로를 미성년이라 느끼고 있을 때 가능하다면, <프로듀스 101> 현상은 초등학생을 의제강간한 여교사의 ‘잘 생겨서 그랬다’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프로듀스 101 시즌2(출처 Mnet)

필자는 특히 30대 팬덤이 자신의 10대 아이돌에게 붙이는 ‘내 새끼’라는 애칭에 주목하게 됐다. 이들이 성애의 대상과 육아의 대상을 동일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이 호칭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지만’, ‘엄마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모순된 가치 사이의 타협점처럼 보인다. 만일 이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라면, ‘내 새끼’라는 애칭은 사회가 80년대 여자들에게 사회적 역할을 제시하지 못하고 소비시장에서 쏟아져나오는 상품에만 집중하도록 내버려 둔 결과가 된다.

생존기술만 탑재한 나이든 여학생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필자는 메갈·워마드를 비롯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이 ‘알파걸 프레임’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그들의 난잡하고 기상천외한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는 엄마 시절과 변함없는 지옥에 살고 있다’ 혹은 ‘나는 엄마 시절보다 더 힘든 지옥에 살고 있다’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으로 드러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실체는, 대부분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낙오되고 소외된 여자들이었다. 반면 알파걸 프레임을 내면화시킨 여자들은 페미니즘 뉘앙스에 공감은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경우가 잘 없었다. 그리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 출생한 남자들에게 공감대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현실화의 결과가 매우 초라했던 일베와 매우 닮았다.

어쨌든 낙오된 알파걸이건 성공한 알파걸이건 간에, 중요한 건 그들이 알파걸 이후의 사회적 역할을 찾지 못한 채로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생존기술과 약간의 사회경험만 탑재한 나이든 여중고생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 갈 길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사회의 책임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인내심을 갖고 읽었거나 스크롤만 쭉 내린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자극적인 제목은 ‘미러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