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체제 인식 결핍증후군 1

“분단 (체제) 인식 결핍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1938년생으로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선생이 만든 조어이다. 아마도 한국 정치인·지식인·시민운동가 등이 한국사회의 특수성이나 기형성을 직시하지 못하고, 유럽·미국·일본과 비슷한 사회로 한국을 보는 경향이 강해서 이런 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통찰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진짜 심각한 지적 질환은 “조선 (체제) 인식 결핍증후군”이 아닐까 한다. 조선적 모순 부조리가 스멀스멀 부활해 대한민국을 삼키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조선 체제의 근간인, 중앙집권적 관료제(군현제)에 ‘인(仁)’과 ‘덕(德)’과 ‘예(禮)’를 핵심 가치로 한 철인 군주정치(성왕주의 정치)는 당시 문명, 즉 인간과 경제에 대한 이해 수준, 교통·통신 수단 등 과학기술(물질적 생산력) 수준, 교육을 포함한 총체적 민도에 비해 지나치게 앞서 나간 체제였다.

조선

세습 군주정치의 한계를 꿰뚫어 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총재) 중심 정치체제를 설계한 정도전의 구상만이 아니라, 이를 정변(1·2차 왕자의 난)으로 깨부수고 등장한 태종식 철인 군주정치도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 나가긴 오십보백보였다.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성왕(요순우탕 문무주공)을 닮은 철인 군주를 전제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군현제)는 조선의 태종시대(1400~1418년)와 세종시대(1418~1450년)처럼 왕과 관료들의 지성과 덕성이 뛰어나기만 하면, 당시 유럽·일본 등에 보편적이던 지방자치 분권적 봉건제보다 훨씬 발전이 빠를 수 있다.

단적으로 이토 준타로 등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 사전(1983년)’에 의하면 1400~1450년 사이의 세계 과학기술사의 주요 업적을 국가별로 분류하면 한국 21건, 중국 4건, 일본 0건, 동아시아 이외 전 지역(유럽·중동 포함) 19건이었다.

하지만 조선 체제는 국가(중앙)권력이 혼미·무능하면, 즉 왕이 혼미하거나, 왕은 허수아비고 실권과 권한은 행사하되 책임은 안 지는 양반 사족이나 세도가들이 쥐게 되면, 벼슬을 돈 주고 산 지방관과 이들과 결탁하거나 이들을 포획한 지방 아전과 재지 양반 사족에 의한 가렴주구가 극심할 수밖에 없다.

세습 봉건영주에게 백성(영민)은 “나의 백성”이라, 도탄에 빠지면 자신도 어려워지지만, 시험을 통해 임용되거나, 연줄이나 돈으로 벼슬을 사서, 임지를 돌아다니는 관료(지방관)에게 백성은 “왕의 백성”일 뿐이다. “왕의 백성”이 도탄에 빠져도 자신은 임지를 옮기면, 한마디로 먹고 튀면 그만이다.

왜 수명을 다한 조선 체제가 견고했던가?
그런데 당시의 문명 수준과 충돌하는 모순적 조선 체제를 견고하게 만든 것은, 지리(지정학과 지경학)에서 나오는 안보·치안 환경과 한곳에 정착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경제 체제다.

한반도에 자리 잡은 국가(중앙)권력은 무력(국방력이나 치안력)이 그리 강하지 않아도 견고할 수 있었다. 한반도는 지리적 조건상 중국을 종종 석권한 유목민 군대가 활개 치기 힘들었다. 중국의 왕조가 직접 통치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게 되어 있었다. 지리적 조건상, 왕조를 전복할 수 있는 크고 강력한 혁명(반란)세력을 규합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백성이 학정을 피해 국경 밖으로 도주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유럽이나 일본은 군주나 영주의 학정을 피해 달아날 곳이 있었다. 특히 유럽은 주로 불모지에 건설된 자유도시로 달아날 수 있었다. 조선은 일본 전국시대식 내란·민란·떼도적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치안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여말선초 이후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사회는 유럽(지중해 주변)·중동·중국·인도·일본에서처럼, 수많은 정치체(왕조)들이 서로 각축하는 ‘약육강식’을 하지 않았다. 좋은 싫든 부국강병·상무정신·실용주의를 체화시킬 수 있는 안보 위협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1592년)·정유재란(1597년) 같은 외침이 두세 번 더 있었다면 몰라도, 정묘호란(1627년)·병자호란(1636년)은 왕조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침략은 아니었기에, 안보위협이 조선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영화 ‘남한산성’ 포스트

한편 조선은 정착 농경을 가능하게 한, 연작 가능한 쌀농사(높은 농업생산성)에 기반을 둬 있었기에 생필품 교역이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배층의 이념적 터부도 작용했겠지만) 화폐도 그리 필요치 않을 정도의 자급자족적 농업경제체제에 기반을 뒀다. 이는 먼 곳과 생필품 교역을 하거나, 먼 곳으로 이동=침략을 해야 하는 밀 농사·목축 경제나 유목경제에는 허용되지 않는 경제적 조건이다.

이런 안보·치안 환경과 정착농·가족농 중심의 자급자족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삼았기에 유교에 정통한 문관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제(군현제)가 작동할 수 있었다. 조상을 섬기고 상하·선후·장유·귀천(양천반상·良賤班常)의 질서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적 ‘예’도 공고화될 수 있었다. 삼강오륜 등 유교적 ‘예’는 국가(임금과 신하), 학교(스승과 학생), 가족(부모와 자식, 부부)을 강력하게 규율했다.

요컨대 조선은 지방보다 서울(중앙)이, 민(백성)에 비해 관이, 생산자 상민(농민)·천민에 비해 지대 수취자인 양반·사족이, 시장 교역을 필요로하는 상인이나 공인보다 자급자족적 농민이, 승부가 간명한 싸움(전쟁 등)으로 승부를 가리는 무관에 비해, 철학적 논쟁과 국가권력으로 시비를 가리는 문관의 힘이 압도적을 강한 사회였다.

실학사상 등 선진적 사상을 담은 책을 인쇄할 수도, 유통할 수도 없었다. 바로 그렇기에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잘 작동하지 않아도 좀체 시정 되지 않았다. 양반 사족들의 기득권을 건드리는 대동법 시행에 100년이 걸린 이유다. 조선은 자본축적도 어려웠고, 사상혁명도 어려웠고, 물리적 민중혁명(반란)도 어려웠고, 국경 밖으로 이주도 힘들었다. 이렇듯 저항이 어려웠기에 시대와 맞지 않는 제도와 사상이 견고했다.

그 결과가 국방력, 상공업, 시장경제를 피폐하게 하고, 사회 엘리트층의 유일한 로망은 정권을 잡거나 관료가 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실용주의와 부국강병 의지도 멀리 걷어 차버렸다. 그 결과가 망국이었다.

문제는 조선의 국가주의, 약탈주의, 가족주의 사상문화적 유산이 망국과 해방과 6·25전쟁과 경제발전과 6월 항쟁으로 일소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사상, 국가주의와 약탈주의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양대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약탈주의와 국가주의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사상으로 대표되는 도덕주의는 국가주의를 엄호하고, 제사공동체(대가족)에서 기인하는 가족주의는 약탈주의를 엄호한다. 조선식 ‘예’에서 기원하는 서열주의, 곧 구시대적 우대·차별주의는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제반 사회관계 속에 남아 있다.

시장, 사회(공동체), 지방이 크게 성장한 오늘날에도 국가주의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은 국가주도 경제발전의 성공과 더불어 시장, 사회(공동체), 지방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균형 때문이다. 극심한 불균형이 초래하는 합법적 약탈(지대추구)을 제어할 방법이 국가의 개입 외에는 마땅찮기 때문이다.

약탈 수법은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혼미, 무능을 틈탄 양반 관료와 사족에 의한 직접적인 약탈, 곧 가렴주구였다면, 지금은 시장, 사회(공동체) 등의 현격한 힘의 불균형과 국가의 과잉보호 또는 무책임한 방조 틈탄 지대추구로 바뀌었다. 물론 과거나 지금이나 문자 그대로 토지·부동산을 통해 불로소득을 수취하는 행태도 여전히 만연하다.

지대추구는 원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잘 작동하는 가상의 시장 가격과 그렇지 않는(수요와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시장가격과의 차이가 지대이다. 동시에 잘 작동하는 가상의 민주공화제의 표준(공무원 보수기준)과 현실의 표준의 차이가 지대이다. 실력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단지 땅이나 소속(위치)이나 서열(위치)로 인해 부와 권력이 자동으로 주어진다면, 이것이 바로 지대이다. 그런 점에서 좋은 땅이나 소속이나 서열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지대추구라고 할 수 있다.

잘 작동하는 시장경제와 민주공화주의가 아닌, 독과점, 갑질, 권력(규제, 예산, 표준 등) 등으로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약탈이다. 국가주의와 약탈주의(지대추구)가 결합한 것이 바로 공공부문 종사자들의 지대추구다. 국가주의, 약탈주의(지대추구), 가족주의가 만나서 생긴 악동이 바로 관피아와 공공양반사회, 직장계급 사회다.

없애야 할 것은 들어가기만 하면 혹은 차지하기만 하면 부와 권력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좋은 땅이나 소속’ 그 자체다. 지대추구는 좋은 땅이나 소속이 만드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본체가 사라지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법이다.

1987년 6월 항쟁

1987년 체제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등 민주화를 이뤘지만, 조선 체제의 악성 유산인 국가주의와 약탈주의(지대추구)는 거의 해체하지 못했다. 재벌대기업, 토건산업(부동산)에 의한 지대추구는 업자들 간 시장경쟁에 의해서, 또 민주·진보 정치세력에 의해서 어느 정도 제어됐다. 그러나 신의 직장을 만드는 것을 능사로 아는 공공부문과 노동조합에 의한 지대추구는 훨씬 더 심해졌다.

국가 예산은 이런저런 명분과 술수를 구사해 먼저 먹는 놈이 임자가 됐다. 규제는 로비를 통해 사익 편향적으로 이리저리 구부리거나 구멍 낼 수 있는 어떤 것이 됐다. 그런 점에서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은 차별과 배제의 성격이나 불평등, 양극화의 성격이 훨씬 악성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장계급사회, 공공양반사회, 연공계급사회, 고시공시열풍 등이 그런 징후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socialdesign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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