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의 시간’ 서울대 교수들 “한국산업, 곧 중국에 잠식”

[서평] <축적의 시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26명

우리 사회는 지난 시기 약 15년 동안 무엇을 축적했는가. 차세대에 물려줄 기술, 경험, 지식의 노하우를 얼마나 축적했을까.

현재 노량진 거주 혹은 통학하는 공시생만 약 50만명, 그중 90%는 낙방한다. 나름대로 우수한 편에 속하는 인재들이다. 이들은 무엇을 축적하고 있나.

노량진의 한 공무원학원

한국의 학생들 대다수가 대기업, 공무원이 되어 월급 많이 받다 은퇴 후 연금 받으며 해외여행 다니는 생활을 선호한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서울대 졸업생은 로스쿨, 의학전문대학원, 고시 등 안정적인 분야로 쏠리는 추세에 산업계뿐만 아니라 사회전체 시스템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나.

본격 산업화 역사 50년이 채 안 된 과정은 우리 스스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기보다 선진국으로부터 개념을 수입해서 활용했다. 이제 산업계 모든 분야는 한계에 이르렀고, 동시다발 위기에 처했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26명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현재 한국산업은 우리가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실력과 패러다임으로 갈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수준에 왔다. 중국의 급성장으로 한국산업이 곧 잠식당한다는 것.

비단 이들만 위기의식을 느끼는 건 아니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위기의 징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며 더욱 심화되고 있음은 대부분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그간 지식의 축적이 멈추었다는 데 있다. 당장 교육계만 봐도 알 수 있다. 기초 학문은 무시된 채 오지선다형 문제풀이 입시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

공과대학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수한 학생들이 몰렸다. 어느 대학 공대 명칭만으로도 알아주던 시절이 있었다.

반면 지금의 공대는 위기다. 공대의 위기는 국가발전의 위기와도 직결된다. 이런 문제의식을 느낀 서울대 공과대학 각 분야의 교수진 현실 진단과 해법을 풀어놓은 책 <축적의 시간>이다.

<축적의 시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26명, 지식노마드

중국의 공과대학은 한국의 공과대학이 처한 현실과 정반대다. 중국의 똑똑한 인재는 전부 공과대학으로 몰리고 있다. 베이징대, 칭화대, 하얼빈 공대 등 우수 대학에 2만명이 넘는 최고급 인재가 넘친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교수들은 이공계 기피 현상이 만연한 공과대학 전반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한다.

지금의 공대 연구는 논문에만 치중되었다. 교수들이 산업체와 유리되었으며 논문으로 업적 평가를 받는다. 논문도 중요하지만, 실증적인 연구가 절실하다. 서울대 공대 실험 장비 수준이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나라는 독일, 일본, 미국 순이다.

독일 베를린 국립 공과대학교

특히 제조업 강국인 독일의 사례는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다. 독일에서 공대 교수가 되려면 산업체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산학협력을 가장 잘하는 독일 공대는 학술논문 건수를 높여 대학의 세계 랭킹 올리는 것보다 산학협력 활성화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핵심인력,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고 있다.

이 책의 공동저자들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해양플랜트 △건설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나노기술 △섬유패션 등 각 분야 26명의 교수진이 당면한 문제의 현황과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책을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관심 분야를 먼저 찾아 읽어도 괜찮다.

예컨대 한국이 세계 1위인 메모리 반도체 분야도 향후 5년 정도는 선도유지가 가능하겠지만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려면 연구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동차 분야도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의 10% 가까이 점유하고 있어도 한국 자동차산업의 내재적 폐쇄성과 새로운 기술개발에 대한 선도적 도전의식 부족이 문제, 미국과 중국은 미래형 자동차인 전기자동차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으나 한국은 전기자동차 시장이 원활하게 추진되고 있지 않다. 벌써 2~3년 전에 도로 위에 전기자동차가 돌아다녀야 했음에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한국의 미래 자동차 기술은 5년 이상 뒤처져 있다고 본다. 자율주행 자동차 부분도 기술 선도국과 격차가 크며 아직도 자동차 산업은 기술 종속국이다.

이 책은 산업 분야에 대해 객관적인 진단과 처방을 고민하고 있지만, 비단 산업 분야만 국한된 게 아니라, 기초적인 인문학 부분만 봐도 오랜 기간 인문학의 기초는 축적의 시간을 가져야 데이터의 힘이 생긴다. 개개인의 지식과 경험의 축적이 국가적인 축적으로 발전하는 법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고교생이 읽어야 할 한국 현대 단편소설이라는 참고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현대 작가 중 필자가 좋아하는 김유정의 대표 단편소설 <봄봄>, <동백꽃>이 단 2~3페이지로 압축돼 실려있었다. <동백꽃>은 약 13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임에도 그마저도 더 줄여 청소년에게 읽히고 있었다. 김유정 작가의 구수하고 향토적인 웅숭한 맛을 지닌 우리말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교육의 현실이 이럴진대 과연 무엇을 축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500년간 축적된 각 분야의 데이터가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일본만 해도 그들의 축적된 노하우 시스템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이 책의 저자의 공통된 진단은, 앞으로 4~5년은 버티겠지만 그 후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는 장기적인 비전이 있는가? 국가적으로 축적된 지식기반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가?

인천대교가 독자적인 우리 기술로 건설된 줄 알았는데, 핵심기술력인 초기프로젝트기획, 시스템디자인 기술은 일본 기술력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고 알게 됐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축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