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 페미니즘 투사 놀음 선동하는 진보언론

[비평] <한겨레> 김지훈 기자의 ‘여성들이여 목소리를 높여라, 더 크게’

<한겨레>는 하나의 사회현상인 메갈리아·워마드형 페미니즘을 일관되게 옹호하는 논조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예로 여성학자 정희진은 해당 언론에 정기적 칼럼 기고로 이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해왔다.

메갈리아에게 고마워하라는 글을 <한겨레>에 게재한 여성학자 정희진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매우 당황스럽다. 메갈리아·워마드를 페미니즘의 한 유형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로지 한국 남성을 향한 극단적 혐오를 내세운 이들의 방식을 페미니즘으로 보지 않을뿐더러 이들을 가리켜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수사로 치켜세우는 <한겨레>·<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 성향의 언론과 강단 페미니스트, 여성단체 등 전체 페미니스트 진영의 인식에 동의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동안 현재 전개되고 있는 국내 페미니즘에 대해 수차례 걸쳐 비판했지만, <한겨레>에 실린 이 기사에 대해서 거듭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4일 <한겨레> 문화 섹션에 ‘여성들이여 목소리를 높여라, 더 크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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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여 목소리를 높여라, 더 크게

김지훈 기자가 작성한 이 기사는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미국에서 출판된 한 급진 페미니스트가 쓴 책이 국내에 번역되자 이 책을 소개함과 동시에 일명 샌드위치화법 형식으로 자신이 의도하는 내용을 중간마다 끼워 넣는 식을 띄고 있다.

<백래시> 수전 팔루디 지음·황성원 옮김·손희정 해제

기자가 누리는 펜의 권력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기사를 쓰고 싶어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방향과 일치하면 기사에 넣고 그렇지 않으면 빼거나 축소한다. 사실 아닌가?

김지훈 기자는 해당 기사 서두를 이렇게 썼다.

먼 훗날 미래의 역사가들은 2010년대 후반의 한국을 뭐라고 기록할까? ‘메갈리아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몸체를 드러낸 강력한 페미니즘의 물결이 일어난 뒤···’에 이어질 문장을 말이다. ‘과거 여성 참정권을 획득했을 때처럼 낙태합법화, 남녀소득평준화 등 돌이킬 수 없는 여성 권리의 진전을 일궈냈다’ 아니면 ‘마주쳐 일어난 남성들의 격렬한 반동에 부딪혀 주저앉아버렸다’?

김지훈 기자 주장의 핵심은 이 문단에 모두 들어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논박을 말하자면, 먼 훗날까지 갈 필요도 없이 향후 10년쯤 지나면 현재 페미니즘 소동이 새로운 물결이 아니라, 여성운동마저 후퇴시키고 페미니즘의 흑역사로 기록될 시기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싶다.

페미니즘 흑역사 주역을 꼽아보면.

첫 번째, <한겨레>이며 또 다른 진보성향 언론 매체들이다. 성 전쟁을 부추긴 기록물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두 번째, 페미니즘팔이 강단 페미니스트·문화평론가라는 명칭을 달고 활동한 이들, 정희진·이나영·이현재·손희정 등이며, 여기에 추가로 일단의 강단 남성 페미니스트들이다. 서민·진중권·박경신·손아람 등이 그들이다.

세 번째, 메갈리아로부터 시작해 워마드로 이어지는, 자신들이 페미니즘 최전선에 섰다 자부하는 극단적 남성 혐오론자 부류들이다.

메갈리아·워마드는 애초 페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이 온라인상에서 남성 혐오 놀이를 즐기던 이들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남성 혐오가 주특기인 이들은 진보언론, 강단 페미니스트, 여성단체와 스탠스를 같이 하다 보니 페미니스트 대열에 들어서게 된 케이스다.

사진=강남역 10번 출구

명확히 하자면, 필자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은 범인의 조현병에 기인한 것이지, 페미니스트진영 주장대로 여성이라서 죽었다는 강변에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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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십년 전 일어났던 여성참정권 획득 투쟁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여성운동은 역사적 소명의 사이클이 끝난 시대이나, 강남역 사건을 지렛대로 삼아 급진페미니즘의 불씨를 다시 지핀 것이며 <한겨레> 등은 시류에 편승해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삼았다.

김지훈 기자가 자신의 글을 빌려 소개한 <백래시>(수전 팔루디 지음), 즉 반격은 페미니즘 반격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37년 전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다. 현재는 21세기로 그 시대의 사회상과 현재 사회상은 큰 차이가 있다. 1970년대 초 청년반항 시대의 한 조류로 급진페미니즘이 휩쓸고 지나간, 1980년 미국 내 상황을 분석하는 <백래시>의 시대적 배경은 보수정부 레이건 시대였다.

그 당시 페미니즘 상황을 현재와 대비하는 것도 무리지만, 지금은 여성참정권 획득 투쟁 시기도 아니요,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시대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기존의 이념, 문화, 조직 형태, 인식의 전환 등 모든 것의 패러다임 전환을 앞둔 마당에 구시대적 페미니즘을 다룬 <백래시>를 페미니스트 진영이 교훈으로 삼기에는 21세기 시대 조류와 앞으로 맞이할 미래세대와는 동떨어진 페미니즘 서적이다.

상투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부여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여성과 남성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인생을 선택한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와 법 앞의 평등을 누린다. 물론 법 앞의 평등이 실제적 평등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진전해 나가야 할 일이다. 분명히 남성적인 사회를 극복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김지훈 기자의 주장대로 “젊은 남성들이 여성혐오의 선봉에 선 지금의 한국에도 유효하다” 이 말이 진정 맞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진보언론을 비롯한 TV 방송, 강연회, 토론회를 종횡무진 누비는 이들은 전부 페미니스트들이다. 메이저 진보언론 그 어디에도 현재의 해괴한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시각은 받아주지 않는 현실이다. 일방적으로 페미니스트 진영의 목소리와 주장만 담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 남성들이 여성혐오 선봉에 섰다는 김지훈 기자의 진단은 크게 잘못됐다. 불특정 다수 젊은 남성들을 여성혐오층으로 분류하는 것은 큰 오류이며, 젊은 남성과 여성들을 자꾸만 분리하는 행태이다.

또 간과하는 부분은 대다수의 여성은 현재 전개되는 페미니즘 방식을 원하지 않으며 매우 비판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침묵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여성인권을 후퇴시키고 정작 여성인권이 필요한 부분마저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의 페미니즘 현상이다.

성평등 의식과 환경에서 성장한 대다수의 젊은 남성들에게 1970년대식의 여성해방, 가부장제 타파라는 구시대 테마가 먹혀들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미 철 지난 레퍼토리다.

양성 간 혐오를 선동·조장하고 나아가 페미니즘을 두고 좌·우로 구분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며,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쪽은 오히려 <한겨레> 김지훈 기자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