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지만 ‘그들만’ 모르는 페미니즘 신뢰상실 이유

드디어 페미니즘의 위기가?
‘드디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라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의 발언 패러디

페미니즘을 ‘대세’로 밀던 일부 진보언론도 요사이 여론의 조짐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위기의식을 갖는 모양이다. 최근 <한겨레 21>은 ‘페미니즘, 반격을 맞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메인으로 내보냈다. 내용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점차 세력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반격을 맞다(출처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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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반격을 맞다

한편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과연 기사를 쓴 기자나 기사를 통과시킨 데스크나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의 현실 인식을 보이고 있다. 해당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면 이렇다.

그렇다면 반격의 수뇌부는 누굴까.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 진보정권을 이끄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각종 ‘여성혐오’적 글쓰기로 사임 압력을 받아온 탁현민 행정관이 제자리를 지키는 등 현 정부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을 허용하는 ‘암묵적’ 메시지를 준다는 것이다. 여성을 성적으로 모욕 주고 대상화해온 이를 국가 통치 이미지를 만드는 자리에 그대로 두고 있다. 여성부 장관까지 나서서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다.

반면 ‘낙태죄 비범죄화’ 청와대 국민청원에 조국 민정수석이 한 답변을 천주교계가 ‘교황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항의하자, 대통령의 지시로 곧 수정했다. 여성들의 요구에는 하나같이 ‘나중에 해도 되는 사안’으로 유보하면서 종교계 요구에는 민감하게 대응한다. 새 정권이 출범했지만, 여성들의 삶이 나아진 점은 없다. 아무도 그렇게 못 느낀다. 정권의 이런 태도가 사회적 좌절을 겪는 남성 일부 집단의 ‘반격’보다 더 책임이 크다.

<한겨레 21>의 주장에 따르면, 현 정부의 반여성적(?) 행태가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 집단의 반격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의 내용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관계에서부터 잘못됐다. 우선 조국 민정수석이 ‘낙태죄 비범죄화’ 청원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교황의 발언 인용을 정정한 이유는 실제로 인용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 수석은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신중절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 교황의 발언 내용의 핵심은 ‘낙태에 반대한다’는 것이 천주교의 설명이다. 물론 이러한 인용 상의 오류를 정정한다고 해서 낙태죄에 대한 입장이 변할 필요는 없으며, 실제로 임신중절 여성에 대한 처벌 기조를 재고해야 한다는 청와대의 입장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후보 시절 ‘페미니즘 대통령 후보’ 선언을 한 문재인 정부가 페미니즘에 대한 최근의 문제 제기에 힘을 싣고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문재인의 ‘친 페미니즘 행보’를 이유로 문재인에 대한 지지철회나 지지유보를 표명한 네티즌들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탁현민의 과거 문제 발언도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공격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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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풍의 계기, ‘문화계 성폭력 누명’과 ‘워마드’ 그리고 ‘연예인 마녀사냥’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여론이 최근 들어 악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를 <한겨레 21> 기사처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사실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몇 가지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최근 일련의 문화계 인사의 성폭력 고발사건이 무고로 밝혀졌다. 여기서 잠시 과거를 회상하자. 지난해 SNS에서 #문화계_내_성폭력 고발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발 관행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페미니즘의 대의를 빌려 무차별적으로 정당화됐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결국 박진성 시인과 박성준 시인을 비롯한 일련의 문학계 인사들이 억울하게 성폭력범으로 몰린 사실이 드러났다. 아울러 미술계 내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고발자들이 글을 지우고 폭로 피해자들을 회유하려 하는 등 무고의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박가분, <포비아 페미니즘> 참고).

그런데 이러한 고발 분위기에 편승해 폭로피해자의 얼굴을 기사에 공개하는 등 2차가해를 저지른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와 같은 당시 핵심 관계자들은 뒤늦게 아무런 해명 없이 기사를 수정하는 등 책임회피로 일관하고 있다. 집단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이 페미니즘 담론의 신뢰성 전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의 기사수정 정황(출처 한국일보)

그다음으로 ‘호주국자 사건’이 있다. 워마드 유저로 알려진 유투버 ‘호주국자’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 글과 사진을 게재하다 호주 현지에서 체포·기소돼 현재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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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호주국자가 즐겨 이용한 사이트 ‘워마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성 어린이,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에 대한 혐오발언이 만연했다. 문제는 평소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웠던 진보언론이 정작 이러한 혐오사이트에서 제기됐던 각종 위험신호를 외면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한겨레>를 비롯한 각종 진보매체와 지식인들은 메갈리아·워마드를 페미니즘 투사로 추켜세웠다. 이처럼 ‘약자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약자에 대한 혐오발언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에 대중은 신물을 느낀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예인에 대한 무분별한 마녀사냥도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피로감을 부추긴 주범 중 하나다. 이미 오래전부터 페미니즘 완장을 휘두른 일부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아이유, 설리, 수지 등 여성 연예인 대상으로 근거 없는 ‘로리타=소아성애’ 논란을 부추기며 마녀사냥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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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최근에는 ‘전형적인 한남짓’이라는 무례한 댓글에 ‘메갈짓’이라는 댓글로 응수했다는 이유로 유아인 역시 일부 여초 커뮤니티와 페미니즘 진영의 조리돌림 타깃이 됐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작고한 샤이니 종현에 대해 넷페미니스트 일각이 살아생전 자행한 마녀사냥이 다시 알려지면서 과격 성향의 페미니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과거 종현은 성소수자에 대해 ‘그쪽’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트위터 페미니스트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을 동반한 조리돌림에 시달려야 했다.

트위터 페미니스트에 대해 울분을 표하는 팬(출처 트위터)

페미니즘 담론의 패인, 낙인 프레임에 대한 집착

필자는 국내 페미니스트와 진보언론이 최근 왜 여론의 악화가 일어났는지를 한결같이 오판하는 것에 놀라움을 느낀다. 이는 어쩌면 그만큼 진영 내부의 성찰 능력이 마비됐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담론이 봉착한 위기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페미니즘 담론이 파행으로 치닫는 가장 큰 원인은 ‘문제해결 프레임’이 아닌 ‘낙인 프레임’ 집착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대중적 페미니즘 담론은 사회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낙인을 통해 지지자를 결집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이유를 소아성애 옹호자로, 유아인을 여성혐오주의자로, 종현을 호모포비아로 매도한 넷페미니즘의 마녀사냥이 그 전형을 보여준다. 대중적 페미니즘에서 유통되는 ‘한남’, ‘흉자(흉내X지)’, ‘명자(명예X지)’ 등의 낙인 프레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낙인 프레임은 단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가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것은 일부 페미니즘 지지자마저도 최근의 사태로 인해 등을 돌리게 하는 배경이 됐다.

반면 정상적인 정치사회 담론은 ‘낙인 프레임’이 아니라 ‘문제해결 프레임’ 아래 작동한다. 갈등상황이 일어나면 그것을 해소하는 데 공론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 정상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론을 방해하는 극단주의자가 출몰한다면 이념적 성향을 막론하고 이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상식인의 방법이다. 문제해결을 위한 공론장 자체가 붕괴한다면 모든 사회적 이념과 지향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녀 네티즌들이 극단주의자와 맞서 싸운 선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일베가 한창 흥했던 2013년 당시 남녀 커뮤니티가 힘을 합쳐서 일베 원정을 떠난 ‘일베대첩’ 사건이 있었다(박가분, <일베의 사상>, 오월의봄, 2013). 네티즌들이 일베 게시판에 몰려가서 ‘산업화’를 패러디한 ‘농업화’ 게시글을 도배하는 등 일베를 조롱하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칭 진보매체와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은 마치 메갈이 혼자 일베에 대항한 것처럼 사태를 왜곡하며 (아동, 노인, 성소수자, 장애인, 비정규직 등의 약자를 향한) 이들의 혐오발언을 두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두가 일베와 맞서 싸울 때 오직 메갈만이 일베의 혐오발언을 모방했다. 이처럼 페미니즘 진영 전체가 낙인과 혐오를 끌어안으면서 젠더이슈에서 많은 이들이 논의 자체에서 배제됐다.

2016년 7월 30일 정희진 기고(출처 한겨레)

진영논리와 굿즈로 전락한 페미니즘

이처럼 현재 페미니즘 진영은 고의든 실수이든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왜곡한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큰 잘못은 아니다. 이를 사후에라도 정정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진영은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진영 내부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통계청의 ‘통계 바로쓰기’ 공모전에서 여성계에서 행한 각종 통계왜곡(성별임금격차, 가사노동격차, 데이트폭력, 강력범죄, 성격차지수 통계에 대한 왜곡)이 지적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내부 자성의 목소리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페미니즘의 대의를 빌린 성폭력 무고 사건에 대한 자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진영논리에 대한 집착이 앞선 나머지 내부비판의 목소리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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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국내 페미니스트도 메갈리아·워마드 등 과격파 분리주의 성향의 페미니즘 조류를 내심 우려하면서도 이를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 페미니즘 전체가 상업적 진영논리로 뭉쳐 내부비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에는 실명비판과 치열한 논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국내 페미니즘의 오랜 관행이다.

비록 일부의 사례이긴 하나, 해외에서는 페미니즘 진영 내의 비판적 의견교환이 간혹 이루어지곤 한다. 가령 미국의 저명한 흑인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는 분리주의 성향의 백인 페미니스트의 위선을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꼬집는다.

수많은 백인 여성해방운동가의 수사법 속에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남성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페미니즘 운동이 성공하면 남성을 패배자로 만들 것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전투적인 백인 여성들은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를 차지하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노여움, 적개심, 분노로 격앙되어서 페미니즘 운동이 그들의 공격을 위한 공론장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 벨 훅스, 68~69페이지

남성에 대한 낙인 프레임과 그 아래 일어나는 공격성의 분출로는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 중 어느 하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벨 훅스의 입장이다.

벨 훅스(출처 예스24)

이러한 벨 훅스의 ‘이름’과 그의 저작의 ‘제목’을 인용하거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페미니스트는 많다. 페미니즘 담론이 사실상 에코백과 같은 굿즈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흥미롭게도 메갈리아·워마드 류의 과격 페미니즘과 이들의 낙인 프레임에 대해 벨 훅스 자신이 행한 문제 제기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변하는 페미니스트는 거의 없다. 바로 이러한 표리부동함이 페미니즘 담론 전체의 신뢰상실과 위기를 재촉하는 주범이라는 것을 페미니스트 스스로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