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특집] 쇼트트랙 선구자 김기훈

12회 한국 첫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44년 만의 첫 동계올림픽 금메달

1992년 2월 21일 새벽. 대한민국 국민의 눈과 귀는 지구 반대편인 프랑스 알베르빌 아이스홀에 쏠려 있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지 어언 44년.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한 하계올림픽과 달리 동계올림픽에서는 그동안 금메달은커녕 메달 하나조차 따지 못했던 대한민국은 이번 대회 들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전에 출전한 김기훈과 이준호에게 메달, 더 나아가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두 선수 중에서도 특히 김기훈은 쇼트트랙이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1988년 캘거리동계올림픽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어 가장 금메달 획득이 기대되는 선수였다. 물론 전 국민적인 기대를 한몸에 받는 만큼 부담감도 컸다. 그래서 김기훈은 “링크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끈을 묶고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않으려고 애썼다”고 고백한다. 준준결승전과 준결승전을 조 1위로 순조롭게 통과한 김기훈은 준준결승과 준결승에서 함께 경기했던 뉴질랜드의 맥밀런, 캐나다의 블랙번과 함께 결승전을 치르게 됐다. 김기훈의 2년 선배이자 국내 라이벌인 이준호도 함께 결승전에 올라 경쟁을 했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고 맨 마지막 4위로 출발한 김기훈은 6바퀴째에 접어들면서 아웃코스로 나머지 선수들을 가볍게 제치고 선두에 올랐다. 그리고 속도를 높여 뒷 선수들과 점점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의 맥밀런, 캐나다의 블랙번, 대한민국의 이준호가 차례로 뒤를 따랐다. 세 바퀴 남겨 놓고 맥밀런이 김기훈의 바로 뒤까지 추격했지만, 김기훈의 레이스는 흔들림이 없었다. 두 바퀴를 남겨놓고 3위로 달리던 캐나다의 블랙번이 지친 맥밀런을 인코스로 제치고 2위로 올라섰고 이준호도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 바퀴를 알리는 종이 울릴 즈음 캐나다의 블랙번을 사이에 두고 김기훈과 이준호가 1, 3위를 달렸다. 하지만 김기훈과 블랙번의 거리 차는 이미 역전을 허용하기엔 너무 멀었다. 결국, 김기훈이 1분 30초 76의 기록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44년 노메달의 한을 일거에 풀어주는 완벽한 레이스였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한 김기훈 선수(사진 가운데)

당시 김기훈은 경기를 마치고 “참 기쁩니다. 모든 국민들이 성원해 주셔서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기쁩니다”라고 인터뷰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김기훈은 “순위 종목이기 때문에 기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계 신기록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타야 순위에서도 우선순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이야기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한 김기훈 선수(사진 가운데)

쇼트트랙의 진정한 재미를 보여준 남자 계주 5000m 결승

어쨌든 쇼트트랙의 선구자 김기훈이 남긴 발자취는 동계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 획득과 세계 기록 수립만으로도 매우 크다. 하지만 김기훈의 진짜 진가는 남자 계주 5000m 결승에서 빛났다.

첫 금메달의 감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틀 후 김기훈은 이준호, 송재근, 모지수와 함께 남자 5000m 계주 결승전에 출전했다. 대한민국 남자 계주 대표팀의 경쟁 상대는 1000m 결승에서도 맞붙었던 선수인 맥밀런의 뉴질랜드, 블랙번의 캐나다와 일본이었다. 이 중 전통의 라이벌이자 쇼트트랙 종주국인 캐나다와 함께 초창기 쇼트트랙 강국이었던 일본이 메달 경쟁국으로 꼽혔다.

김기훈은 스타트와 힘이 좋은 이준호에 이어 2번 주자로 나서 대회 2관왕에 도전했다. 4위로 레이스를 시작한 한국은 순식간에 선두에 오르기도 했으나 캐나다에 바로 선두를 뺏기고 치열한 1, 2위 싸움을 벌였다. 36바퀴째에서 캐나다를 제치고 선두에 올라섰지만,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고르고 힘이 좋은 캐나다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바로 26바퀴를 남겨놓고 다시금 캐나다가 선두로 나서자 바로 다음 주자였던 김기훈이 역전을 시키면서 엎치락뒤치락했고 한동안 대한민국이 1위를 지켰지만 13바퀴를 남겨놓고 이준호가 김기훈에게 터치하는 과정에서 캐나다의 2번째 주자가 1위를 빼앗았다.

그리고 순번이 한번 돌면서 캐나다와 대한민국의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 1번 주자로서 스피드가 좋은 이준호가 격차를 다시 줄였지만, 역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2번 주자인 김기훈이 바짝 추격한 상태에서 3번 주자인 송재근에게 넘겨줬지만, 격차는 여전했고, 4번 주자인 모지수도 캐나다에 뒤진 상태에서 이준호에게 넘겨줬다. 그러면 이렇게 계주 주자 간에 역할은 어떻게 구분할까. 어떤 기준으로 계주 선수들을 배치할까.

김기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주 선수들의 역할이 다 달라요. 계주 1번 선수는 스타트와 순발력이 좋아야 하고, 2번 선수는 지구력과 게임 운영이 좋아야 하고 3번 선수도 게임 운영 능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4번 선수는 스피드가 폭발적으로 좋아야 해요. 각자의 위치에서 소화해야 하는 내용이 다 다릅니다.”

이제 세 바퀴를 남겨둔 상황 이준호가 터치하는 과정에서 상대 캐나다 선수의 방해를 받아 약간 삐끗했으나 굴하지 않고 추격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터치를 받은 김기훈과 캐나다의 미셸 타이놀트. 골인까지 200m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두 선수의 거리는 4~5m에 달했다.

하지만 필사의 추격을 전개한 김기훈은 결승선을 앞둔 코너에서 타이놀트의 등 뒤까지 접근했고, 타이놀트의 인코스를 파고들어 오른발을 쭉 내밀며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0.04초 차 대역전승! 대한민국 쇼트트랙 비전의 기술인 날내밀기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메이저리그 슈퍼스타 요기 베라의 명언대로 막판 대역전승을 일궈낸 김기훈은 손을 번쩍 들었고 대표팀 동료 선수들과 감격의 포옹을 했다. 쇼트트랙의 진정한 묘미를 보여준 멋진 경기였다.

“저 선수를 어떻게든 빨리 추월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당시 날 내밀기를 연습한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국민성인 거 같아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도 마찬가지였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었던 게 금메달로 이어진 거 같습니다.”

김기훈은 당시 심정을 웃으며 고백한다.

“계주라는 종목이 그 나라 쇼트트랙의 수준을 보여주는 종목이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가 있는 금메달이었습니다.”

계주 5000m 마지막 주자로 나서 추격에 성공한 김기훈 선수(출처 SBS)
대한민국 쇼트트랙 비전의 기술인 날내밀기가 빛을 발한 순간(출처 SBS)
대한민국 쇼트트랙 선구자가 된 김기훈 선수(출처 SBS)

세계선수권 개인전 전 종목 석권의 신화

김기훈의 신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 미국 덴버에서 벌어진 세계선수권에서 김기훈은 사상 첫 전 종목 석권이라는 신기원을 열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 기록은 10년 후 대표팀 후배인 김동성이 계주 포함 5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었다.

더욱이 예선부터 결승까지 단 한 차례도 1등을 놓치지 않고 제일 먼저 골인하는 완벽한 레이스를 펼쳐 현지 관중들의 기립박수까지 받고, 현지 언론으로부터 ‘덴버의 연인’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이렇게 선수 생활의 최전성기에서 전 세계 그 어떤 선수도 적수가 되지 못했던 김기훈에게 또 하나의 축복과도 같은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1986년 IOC 총회에서 1992년까지 같은 해에 열리던 동계올림픽과 하계올림픽을 1994년을 기점으로 2년씩 번갈아 가며 열기로 했다. 그에 따라 1996년 열려야 했던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은 1994년에 열리는 것으로 조정됐다. 선수로서 최전성기에 있던 김기훈으로서는 다시 한번 다관왕에 도전해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악재를 딛고 올림픽 개인전 2연패 신화를 쏘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이런저런 부상 때문에 연습을 제대로 못 한 김기훈의 몸 상태는 최상이 아니었고 그간 치른 국제대회에서의 성적도 좋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랭킹에서 그의 이름이 빠질 정도였다. 오히려 세계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온 대표팀 후배 채지훈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도 많았다. 이에 김기훈의 오기가 발동했다. 물론 매스컴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만큼 부담감 없이 홀가분하게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마침내 개막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남자 1000m 예선전과 준준결승전을 순조롭게 통과한 김기훈은 준결승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인 캐나다의 마크 가그농, 대표팀 동료 이준호와 한 조가 됐다. 마크 가그농은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까지 뛰었던 캐나다의 간판스타로 1993년과 1994년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어서 2002년 솔트레이크에서야 개인전 금메달을 딸 정도로 올림픽 울럼증이 있었다. 1000m 준결승 경기에서도 마크 가그농은 레이스 중반 이후 이준호와 1, 2위를 다투다 1바퀴를 남겨 놓고 혼자 미끄러져 넘어졌다. 더불어 마크 가그농에 이어 2위로 달리던 이준호도 체력이 떨어졌는지 뒤로 쳐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준호와 영국 선수 구치의 사이로 파고든 김기훈이 1위로 골인했다. 어느 정도 운도 따르긴 했지만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고 역전에 성공한 김기훈의 막판 집중력과 지구력이 빛난 경기였다.

마침내 벌어진 1000m 결승전. 결승전에는 영국의 구치, 캐나다의 캠벨과 함께 대한민국의 채지훈과 김기훈이 함께 출전했다.

“1000m의 경우 탐색전을 벌이다 6바퀴, 7바퀴부터 속도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말대로 경기 중반까지 채지훈이 4위, 김기훈은 3위로 달리며 막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앞에서는 캐나다의 캠벨이 1위, 영국의 구치가 2위였다. 그리고 5바퀴를 남겨뒀을 때 김기훈이 아웃 코스 추월을 시도했다. 하지만 캐나다와 영국 선수들의 스피드도 만만치 않아서 쉽게 자리를 빼앗지 못하고 3위로 계속 달려야 했다.

그리고 2바퀴를 앞두고 다시금 아웃 코스로 추월을 시도할 때 캐나다의 캠벨이 영국의 구치에게 밀려 미끄러지며 쓰러졌고 그 틈을 타 김기훈은 인코스로 영국의 구치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레이스 마지막까지 그 1위를 끝까지 지킨 김기훈은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개인 종목 2연패에 성공하며 다시금 세계 정상에 올랐다.

비록 정상이 아닌 몸 상태였으나 노련미와 막판 스퍼트에 힘입어 명예 회복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나란히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한 김기훈과 채지훈은 함께 태극기를 펼쳐 들고 링크를 돌았다.

“이때는 제가 원해서 태극기를 들고 세레모니를 했거든요. 세계적으로 너는 메달권에서 벗어난 선수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내가 메달 땄다는 걸 보여주는 제스처를 많이 했어요.”

자신이 살아있음을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보여준 쇼트트랙 제왕의 질주이자 세레머니였다.

김기훈의 과거와 현재

1967년 7월 서울에서 태어난 김기훈은 경기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하지만 순발력과 스피드가 좋은 그를 눈여겨본 코치가 쇼트트랙으로 전향을 권했고 1984년 쇼트트랙으로 종목을 바꾼 그는 1985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되어 외국 세계선수권 우승자들의 경기 영상을 보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쇼트트랙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는 쇼트트랙 관련 자료나 코칭 기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나는 연구와 훈련을 통해 그만의 쇼트트랙 기술을 개발해냈다.

그가 만들어낸 기술 중에 ‘호리병 주법’과 ‘외다리 주법’이 있다. 쇼트트랙 링크의 좁은 폭에서 4명이 넘는 선수들이 시합하다 보니 선두를 한 번 뺏기면 다시 선두가 되기 쉽지 않다. 호리병 주법은 직선 주로에서 외국 선수들이 워낙 폭발적인 스피드를 가지고 있으니 추월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엉덩이로 상대의 진로를 막는 주법이다. 또한, 코너를 돌 땐 상대의 빈틈을 노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가 다시 코너 바깥쪽으로 나온다.

‘외다리 주법’은 손에 장갑을 끼고 코너를 돌 때 중심을 오른발에 싣고서 왼발을 드는 주법이다. 이 주법을 통해 코너에서도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코너를 돌 때 마찰력을 줄여주는 ‘개구리 장갑’을 처음 개발한 것도 김기훈이다. 왼쪽 장갑 끝에만 에폭시수지를 붙여 곡선에서 마찰력을 감소함으로써 속도를 줄이지 않고도 코너링을 할 수 있게 된다.

울산과학대 스포츠 지도과 교수가 된 김기훈 선수

당시엔 대한민국 선수들만 활용하던 주법과 장갑이지만 이제는 ‘외다리 주법’과 ‘호리병 주법’, ‘개구리 장갑’을 쓰지 않는 선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일반화됐다. 그야말로 단순히 올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쇼트트랙의 선구자로서 김기훈은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다.현재 김기훈은 울산과학대 스포츠 지도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스포츠 심리학과 교양과목으로 빙상 종목을 가르치고 있다. 주니어 대표팀과 국가대표팀 코치를 역임하며 여러 차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지만, 현재는 교단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스케이팅 보급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