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법학자의 ‘후진적’ 메갈리아 옹호

홍성수 교수의 새 책 출간에 부쳐

지난날 인권담론 돌이켜 보며

시대와 상황이 변하면 단적으로 ‘진보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사상과 명제도 낡은 것이 되곤 한다. 그 사례를 찾아보기 위해 오랜 과거로 거슬러갈 필요는 없다. 그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먼저 일베 등의 혐오주의자들이 넷상에서 판치던 당시의 인권담론 일부를 소개해 보자.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반대에 앞장서온 인권운동가이자 변호사인 모로오카 야스코가 집필한 ‘증오하는 입’을 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혐오 발언의 정의를 소수자·약자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다.

“혐오 발언이란 인종, 민족, 국적, 성별, 성적 지향과 같은 속성을 갖는 소수자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 표현이다.”

이 책이 국내에서 번역출간 됐던 당시(2015년 7월)만 하더라도 양식 있는 시민이라면 혐오 발언의 이같은 정의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집단이 소수의 집단을 린치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에 대한 피해자 측의 감정 섞인 항변에 대해 과도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러한 사려 깊은 논의가 어떻게 사려 깊지 못한 이들에 의해 오남용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됐다.

우리가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계기는 2년 전 여름 언론 지면과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메갈리아 논란 덕분이다. 당시 많은 진보언론과 논객은 위와 같은 혐오 발언에 대한 ‘한정적 정의’를 이용해 메갈리아 류의 폭언이 혐오 발언이 아니라는 식의 변호를 일삼았다. 물론 이는 ‘역차별은 차별이 아니다’, ‘남성에 대한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백인은 피해자가 될 수 없다’ 등등 진보진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설 <1984> 식 의미조작의 한 사례다.

메갈리아 역시 ‘혐오표현’ 정의에 들어맞아

한편 이번에 출간된, 진보적 인권법학자로 잘 알려진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바로 이러한 진부한 메갈리아 옹호론과 진보진영에 만연한 의미조작을 다시 지면에 담아낸다.

말이 칼이 될 때(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출판)

특히 그는 3장 ‘혐오표현, 정치의 역할’ 중에서 ‘여성혐오도 나쁘고 남성혐오도 나쁘다’는 일부 남성(?)의 시각을 ‘양비론’이라고 규정하며, 그들이 ‘미러링’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애초에 홍 교수가 말하는 미러링이란 실제로는 여초커뮤니티에서 평소 행해지던 사이버폭력과 악플에 대한 사후정당화에 불과하다(<혐오의 미러링> 참조)).

그리고 여기서 그는 혐오표현에 대해 모로오카 야스코식 한정을 가져온다. 요약하자면 ‘혐오표현’이란 ‘힘 있는 다수’가 ‘힘없는 소수’에게 가하는 차별적·공격적 언행이다. 따라서 ‘힘없는 여성들이 행하는 남성 상대의 미러링은 혐오 발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오류를 반복해서 지적하는 일은 이제 지겨울 정도이다.

우선 우리가 앞서 인용한 모로오카 야스코의 한정적 정의(혐오표현은 소수자·약자 대상)를 빌리더라도 메갈리아의 미러링에는 혐오 발언의 요소들이 다수 포함됐다. 왜냐하면, 메갈리아에서도 어린이(좆린이, 한남유충), 장애인(장애한남, 윽엑), 성소수자(똥꼬충), 노인(느개비) 등 소수자·약자에 대한 폭언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메갈리아의 언행은 ‘다수’가 ‘소수’에게 행하는 폭력의 양상에도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 메갈리아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연대를 호소하는 여성 내부에서도 새로운 ‘소수자(명예X지, 흉내X지)’를 만들어 내며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았다.

혐오의 미러링(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출판)

한편 워마드 이전의 메갈리아는 ‘클린’했으며 일부(?)의 극단적 언어사용에 대한 진지한(?) 문제 제기가 활발하게 오갔다는 믿음은 과거 메갈리아를 실제로 관찰하지 않은 사람들의 망상에 불과하다(<혐오의 미러링> 참조). 실제로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분열하던 당시에도 ‘똥꼬충’ 등의 성소수자 비하 발언에 반발하는 세력은 소수였고 그들은 메갈리아 내부에서 ‘꿘충’이라고 불렸다. 메갈리아 주류로부터 꿘충이라 불리며 넷상의 논의에 밀려난 이들 소수파 페미니스트는 지금도 정신승리에 가까운 방식으로 메갈리아를 회상하고 있다.

이처럼 메갈리아의 혐오표현은 애초부터 활동가들이 목적 의식적으로 선택한 전술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혐오표현은 그러한 전술적 의도에 의해 통제되지도 않았으며, 애초에 그것은 여초 커뮤니티 내부에서 오랫동안 자생적으로 형성돼 온 악플 문화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과거 인권운동가와 인권학자들이 혐오표현에 대해 우려했던바 그대로, 메갈리아의 혐오표현 역시 소수자·약자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으로 이어졌다. 미러링이라 불리는 혐오표현은 결국 미성년자 대상의 몰카와 성희롱을 일삼다 호주 현지에서 기소당한 ‘호주국자’의 사례와,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겨냥한 워마드 회원의 조직적인 아웃팅 공격처럼 실제 범죄와 인권침해로 이어졌다.

이 외에도 메갈리아 신드롬이 인터넷을 휩쓸고 난 이후부터 여성 악플러들이 집단을 이루어 남성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을 대상으로 조리돌림, 신상털이, 협박 등의 집단폭력을 자행한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포비아 페미니즘> 참조). 여초의 언어를 빌리자면 ‘싸패력’을 빌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패고 다니는’ 행패가 인터넷의 놀이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포비아 페미니즘(박가분 지음 / 인간사랑 출판)

성찰 능력 마비된 인권담론

이러한 실제의 피해사례를 아는지 모르는지 홍 교수는 안일하게도 ‘여성의 정치적 주체화에 기여했으니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일부 극단화되었다고 해서 미러링 전체를 싸잡아 비난해서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여기서 홍 교수가 결코 대답하지 않는, 아니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같은 여성에 대해 흉자·명자 등의 혐오표현을 동원하면서 달성되는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의문이며, 그 이전에 여성은 철저한 노예에 불과했을 뿐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이것은 전형적인 래디컬 페미니즘의 관점이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정치적 주체화를 위해 다른 누군가가 집단적인 사이버 폭력과 린치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과연 ‘진보’가 평소 내세우던 정의관에 부합하냐는 것이다.

진보진영은 이미 탈냉전 시대 이후 자신들이 낳은 전체주의적 폭력성에 대해 이와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받아왔지만, 매번 수준 낮고 실망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홍 교수의 책도 바로 그 실망스러운 대답의 연장선에 있다.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우리의 인권법학자는 과거의 적색테러를 옹호하던 서구 좌파 지식인들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홍 교수는 정말로 혐오표현의 용법을 개인이나 집단의 의도 아래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지를 스스로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홍 교수 역시 혐오표현이 지닌 전염성과 확산성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메갈리아의 자칭 미러링만큼은 무해한 저항의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에 집착하고 있다. 무엇보다 홍 교수는 현실 속의 강자 vs. 약자, 다수 vs. 소수라는 권력 구도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를 가로지른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대다수의 진보파가 섬세하게 성찰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지점이다.

홍성수 교수(출처 PD저널)

이번 책의 의의

홍성수 교수의 이번 책이 만일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현대 인권담론이 처한 교착상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데 있다. 성찰하는 사람이 인권과 정의를 입에 담더라도 인권과 정의를 입에 담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성찰하는 것은 아니다. 홍 교수는 성찰하지 않는 진보와 인권담론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미 인권담론의 기준으로 지난 메갈리아 신드롬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진지한 논의가 오갔다. 이에 대한 업데이트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도 실망스러운 일이다. 이번 저서 역시 미러링에 대한 문제 제기를 ‘남성들의 반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메갈리아 신드롬에서 파생된 실제 인권침해 사례와 피해자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한) 진지한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이것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은 오늘날 진보적 인권담론에서 일어나는 가치전도(인권의 정치적 수단화)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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