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특집] 초대 쇼트트랙 여제, 전이경

14회 쇼트트랙 여제의 탄생

대한민국 시각으로 1994년 2월 23일 새벽.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가 열리는 하마르 올림픽 원형 경기장. 대한민국은 두 개의 금메달 획득에 도전하고 있었다. 남자 1000m에 출전하는 선수 중에는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는 김기훈 선수와 그의 후배이자 라이벌 채지훈 선수가 있었고, 또 사상 첫 금메달에 도전하는 3000m 여자 계주팀이 있었다.

채지훈 선수

김기훈과 채지훈은 나란히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내며 국민의 기대에 부응했지만, 전원 10대인 여자계주팀이 금메달을 딴 것은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그 중심에는 초대 빙상여제 전이경(당시 18세·배화여고)이 있었다. 전이경은 김소희(18·정화여고), 원혜경(15·신반포중), 김윤미(13·정신여중)와 호흡을 맞춰 숙명의 라이벌 중국 여자 대표팀을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여자 대표팀은 우승 후보가 아니었고 목표는 결승에 올라가서 동메달 정도를 따는 것이었다. 다만 선수들 개개인의 지구력이 있는 팀이니 마지막 상황에 따라 더 나은 성적도 기대해볼 정도의 실력이었다. 막상 경기를 시작해 보니 예상대로 캐나다와 중국이 매우 앞서 나가고 대한민국은 3위를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캐나다가 넘어지고 그 이후 중국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바람에 상황은 급변했다. 1번 주자로 나선 전이경 선수는 바로 앞 주자인 김윤미 선수가 중국 선수를 제치고 선두에 올라선 채로 자신을 밀어주자 그 간격을 유지하며 2번 주자인 김소희 선수에게 넘겨주었고, 김소희 선수가 그대로 골인하여 감격스러운 금메달을 안긴 것이다. 이후 20년 가까이 지속하는 한국과 중국 여자 쇼트트랙의 라이벌 관계를 예고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감격한 선수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링크를 돌았고, 관중석의 대한민국 응원단도 환호했다.

이날 전이경 선수의 활약에는 중국 팀의 숨은 도움이 있었다. 올림픽 개막을 3주 앞두고 갑작스러운 발목 부상을 당한 전이경 선수는 왼쪽 발목이 부어서 스케이트를 신지 못할 정도였다. 후보 선수 김량희가 함께 갔고 실제로 계주연습에 투입되었지만,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이경 선수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서 1번 주자를 밀어줘야 하는 김윤미 선수가 몹시 힘들어했다. 시간이 흘러도 부상은 호전되지 않아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중국 대표팀의 주치의인 한의사가 전이경 선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찾아가니 그 한의사는 전이경 선수를 침상에 누이고 발에 삼지창 모양의 침을 놔주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다음 날 바로 부기가 빠졌고, 전이경 선수는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중국 팀으로서는 경쟁팀에게 호의를 베풀어 큰 재앙으로 돌아온 셈이었지만, 한편으론 스포츠맨십이 빛난 선행이다.

이제 부상에서 회복한 전이경 선수의 활약은 계속됐다. 여자 1000m에 동갑내기이자 국내 라이벌인 김소희 선수와 함께 출전한 전이경 선수는 결승전까지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서 가까스로 올라갔다. 어렵사리 올라간 결승전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는 캐나다의 나탈리 램버트였다. 그녀는 1993년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한 31살의 노장이었다. 다른 세 명의 선수는 대한민국의 김소희, 중국의 양양 S와 장엔메이였다.

경기 초반 중국의 두 선수와 김소희 선수가 선두를 다투는 사이 캐나다의 램버트가 1위로 올라섰고, 전이경 선수는 5위에 처져 있었다. 김소희 선수가 바깥쪽으로 스퍼트하는 사이 전이경 선수가 인코스로 중국의 두 선수를 추월하며 3위로 올라섰다. 5바퀴를 남기고 램버트와 김소희, 전이경 순으로 순위 경쟁을 하다가 4바퀴를 지나면서 전이경 선수가 김소희 선수를 인코스로 추월하며 2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마지막 1바퀴를 남겨 놓고 직선주로에서 인코스로 램버트를 추월한 전이경 선수는 그대로 골인해 2관왕에 오른다. 김소희 선수는 램버트 선수에 이어 3위로 골인하며 동메달을 딴다.

2년 전 출전한 알베르빌 올림픽에서 경험과 기량 부족을 드러내며 노메달에 그쳤던 대한민국 여자 대표팀은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수확하며 대번에 세계 여자 쇼트트랙 최강의 자리에 올라서고, 전이경 선수는 초대 빙상여제의 자리에 오르며 동계올림픽의 스타로 떠오른다.

쇼트트랙 여제의 탄생, 전이경 선수(출처 SBS)

올림픽을 통해 확실한 자신감을 얻은 전이경 선수는 이후 세계선수권 3연패를 차지하며 초대 빙상 여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또한, 1997-1998 쇼트트랙 월드컵이 최초로 열리면서 세계최초 쇼트트랙 월드컵 우승자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라이벌이 떠오른다. 바로 전이경 선수에 이어 세계선수권을 6차례 연속 제패한 중국의 양양 A였다. 1997년 나가노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전이경 선수와 공동우승을 한 양양 A 선수는 1년 후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전이경 선수와 치열한 격전을 예고한다.

올림픽 2연패와 2관왕, 전 종목 메달 획득의 위업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나가노에서 벌어진 1998년 동계올림픽. 당시 대한민국은 IMF 구제 금융으로 온 나라가 실의에 빠져있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 사이에선 올림픽 선전을 통해 국민에게 희망을 전하자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그 중심엔 역시 전이경 선수가 있었다.

당시 전이경 선수는 4년 전 릴레함메르 올림픽 때와는 달리 최상의 컨디션이었다고 한다. 2관왕은 물론이고 3관왕도 노려볼 만한 몸 상태였다.

첫 번째 벌어진 여자 계주, 세 번째 주자로 나선 전이경 선수는 네 번째 주자인 원혜경 선수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첫 번째 주자는 안상미 선수, 두 번째 주자이자 마지막 주자는 4년 전 금메달을 따는 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김윤미 선수였다. 전이경 선수가 세 번째 주자, 원혜경 선수가 네 번째 주자였다.

보통 마지막 주자는 스피드가 좋은 선수 혹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추월이 가능한 선수가 맡는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네 선수의 체격조건이 비슷하지가 않았기 때문에 순번이 안상미(스타트 빠르고 체격이 작음), 김윤미(스피드가 있고 체격이 작음), 전이경(체중이 가장 많이 나감), 원혜경(키가 가장 크고 체중이 그나마 전이경과 비슷) 순이 된 것이다. 릴레함메르 때도 전이경 선수는 가장 가벼운 선수에게 받아서 무거운 선수를 밀어주는 역할이었다, 그만큼 힘을 들여서 속도를 유지하거나 내야 하는 위치였다.

경기 막판까지 중국에 이어 2위로 달리던 대한민국 대표팀은 두 바퀴를 남겨 두고 승부수를 던진다. 첫 번째 주자인 안상미 선수가 김윤미 선수를 밀어줄 때 중국 선수의 인코스를 파고든 김윤미 선수가 선두로 올라선 것이다. 이후 김윤미 선수는 중국 선수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고 1등으로 골인해 올림픽 2연패를 이뤄냈다. 우승을 일궈낸 김윤미 선수는 두 손을 맞잡으며 감격을 표했고, 이후 코치진들에게 달려간 네 선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스승들에게 안겼다. 관중석에서는 조총련계의 재일교포들이 흔드는 인공기와 함께 응원단의 태극기가 휘날렸다.

숙적 중국 여자 대표팀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여자 대표팀. 그 중심에 있었던 전이경 선수는 취약 종목인 500m에서도 행운의 동메달을 따냈다. 500m 준결승에서 탈락해 파이널B에 출전한 전이경 선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파이널 B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파이널 A에 출전했던 선수 중 중국의 왕춘루 선수가 레이스를 포기하고, 캐나다의 이사벨 샤레스트 선수가 실격을 당하면서 파이널 B 우승자인 전이경 선수에게까지 동메달이 내려온 것이다. 역시 하늘은 전이경 선수의 노력을 저버리지 않았다. 행운의 동메달을 따낸 전이경 선수는 마지막 종목인 1000m에 대한 전의를 불태운다.

그 맞은편엔 일생일대의 라이벌 양양 A가 있었다. 역시 컨디션이 좋았던 양양 A는 준준결승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준결승에선 전이경 선수를 2위로 밀어내며 결승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그때까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중국 여자 쇼트트랙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양양 A는 굳은 마음으로 결승전에 나섰다.

여자 1000m 결승전에 진출한 선수는 한국의 전이경, 원혜경, 중국의 양양 A와 양양 S로 양 국가의 최고 실력자가 모두 나와 숙명의 라이벌전다운 대진이었다. 경기 초반 탐색전에 이어 중국의 양양 S가 선두로 나서고 원혜경 선수가 2위, 양양 A가 3위, 전이경 선수가 4위로 달렸다. 그런데 4바퀴를 남겨두고서 양양 A가 원혜경 선수를 추월해 2위로 올라서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자칫하면 중국 선수들에게 금메달과 은메달을 모두 내줄지도 모를 상황이 된 것이다. 쇼트트랙에서 같은 나라의 선수들이 레이스 중반 이후 1·2위를 차지하고서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하면 뒤의 선수들이 추월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 선수가 인코스를 막고, 다른 한 선수가 아웃 코스를 막으면 뚫고 들어가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까지 4위로 체력을 비축하고 있던 전이경 선수가 나선다. 2바퀴를 앞두고 스퍼트를 내기 시작해 마지막 바퀴의 종이 울리는 사이 곡선 주로에서 중국의 양양 S를 인코스로 제치고 2위로 올라선 전이경 선수는 마지막 바퀴에서 양양 A 선수와 동일 선상까지 올라선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인코스만을 노리고 있던 전이경 선수는 발을 내밀며 결승선을 향한다.

당황한 중국의 양양 A 선수가 전이경 선수의 팔을 잡고 늘어지면서 전이경 선수는 미끄러지지만, 전이경 선수의 스케이트 날이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고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전이경 선수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한다. 결국, 양양 A 선수는 파울로 실격 처리되면서 은메달도 따지 못했고 4위로 들어왔던 원혜경 선수가 동메달을 얻었다.

전이경 선수는 릴레함메르에 이어 같은 종목에서 2관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500m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해 출전한 전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기록까지 세웠다. 지금까지 동계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전이경 선수가 유일하며, 하계 올림픽에서는 진종오 선수와 김수녕 선수가 통산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전이경 선수는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 올림픽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쇼트트랙 전설이 된 전이경 선수(출처 SBS)

쉼 없는 노력파, 끝없이 변신하고 도전

98년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종합 우승 4연패에 도전했던 전이경 선수는 라이벌 중국의 양양 A 선수에게 밀려 아쉽게도 2위에 그친다. 그리고 대표선발전 직전 웨이트 훈련 중 허리를 다친다. 원래 척추분리증이 있는 데다가 부상까지 겹쳐 운동을 계속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 나이로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고 주변의 만류가 대단했지만, 전이경 선수의 결심은 확고했다. 정상에 있을 때 은퇴하고 어릴 때부터 꿈꿔온 IOC 위원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1976년 팔삭둥이로 태어난 전이경 선수는 1.7kg의 미숙아였다. 몸이 약해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다가 건강해지기 위해 5세부터 수영, 7살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엔 쇼트트랙으로 전향했다. 그런데 얼마나 적성에 잘 맞았는지 고작 1년 만인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88년에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기록을 세운다.

전이경 선수(윗줄 왼쪽 두번째)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허리가 계속 아파 병원에 갔다가 척추분리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술 아니면 고칠 수 없고 수술을 하면 선수 생활은 힘들다는 의사의 소견도 들었다. 쇼트트랙 선수 중엔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고생하는 선수가 많다. 아무래도 계속 허리를 굽힌 채로 달려야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쨌든 다행히도 전이경 선수는 물리치료와 보강 운동으로 부상을 극복해냈다.

사실 전이경 선수는 타고난 운동선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비교하면 순발력이 좀 처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악바리 정신으로 끝없이 훈련해 본인의 약점을 극복하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은퇴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비록 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에 입후보해서 탈락했지만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의 추천을 받아 선수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2003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준회원 자격을 땄고, 2005년에는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2007년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위원회 홍보대사로 위촉돼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 소치에 밀려 실패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신해 온 전이경 선수는 2010년 5월 화촉을 밝혔고, 결혼 이후 부산에 거주하며 부산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자녀 교육 문제로 싱가포르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싱가포르 빙상협회의 요청으로 싱가포르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전이경 싱가포르 국가대표팀 감독

알다시피 여름이 계속되는 동남아인 만큼 그곳에서 동계 스포츠를 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국제규격을 갖춘 아이스링크는 단 한 곳이고, 그곳에서 훈련하기 위해서는 시간당 100만원 이상의 대관료를 내야 할 정도이다. 몇 안 되는 국가대표 선수도 대한민국의 기준으로 보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라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느새 동계 스포츠 강국이 된 우리에겐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동남아시아대회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자존심을 걸고 각 종목에서 자웅을 겨룬다. 동남아시아 대회는 이전까지는 하계종목만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동계종목이 추가되었고 메달전망이 높아 육성 종목 중의 하나로 인정받아서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종목 중 하나라고 한다. 전이경 감독은 동남아시아에서 쇼트트랙 한류를 전파하는 전도사가 된 셈이다.

전이경 싱가포르 국가대표팀 감독

전이경 감독의 도전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알 수 없다. 동남아판 ‘쿨러닝’이란 말이 나올 정도니 매우 어려운 도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지도하는 싱가포르의 샤이넨 고 선수가 평창 올림픽 여자 1500m 출전권을 획득했다고 한다. 전이경 감독은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아서 가능했지만 이번 성과가 앞으로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쇼트트랙선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줄 것을 확신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적이 없던 싱가포르로서는 국가적인 경사인 셈이다. 항상 불가능에 도전해 온 그녀. 그녀의 도전은 여전히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