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찬의 리얼한 대한민국] 뒤엉킨 실타래, 메갈리아와 페미니즘

운동의 언어

처음에 ‘시선강간’이야기가 나왔을 때, 논점을 잡은 것은 불쾌한 감정의 내 자아와 그 불쾌함의 원인을 제공한 자아의 의도를 일치시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이란 매우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균질화해서 행위를 특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심리란 매우 상대적이라서 남성들도 ‘예쁘게 꾸며 입은 젊은 여성이 쳐다보는 시점’과 ‘할머니들이 쳐다보는 시점’을 다르게 해석한다. 이 두 여성의 내적 의도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즉, 수용 환경과 기분에 의해서도 달라질 수 있다.

혹자는 이에 대해서 정당과 운동의 언어도 아닌데 너무 엄격하게 해석한다는고 말을 한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과 같은 맨스플레인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단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페미니즘이 가진 운신의 폭은 오히려 협소해져 버렸다 혹자가 주장한 것처럼 정제된 언어를 쓸 필요 없다는 주장과 해당 커뮤니티는 자신을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밝혔다.

미러링

 

원래 미러링이란 심리 교정 방법이다. 여기서 원칙은 교정 대상자의 행태를 교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러링이 되는 구체적 행위 역시 교정 대상자의 행태와 똑같이 재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정 대상자의 말투와 행동, 제스처, 눈빛 등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객관적인 자신의 자아를 타인을 통해 느끼는 충격 요법인 셈이다. 마치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색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최근의 페미니즘은 ‘미러링’이라는 이러한 원칙과 달리 교정 대상자를 전 남성으로 상정했다. 즉, 자신들이 경험한 남성들의 여성 혐오 행태에 대한 사례들은 개별적이고 파편화되어 있지만 단일한 인격체로서의 여성과 남성을 상정해버렸다.

그래서 자신들이 경험한 여성혐오의 모든 행태를 총합하여 남성에 재연해내었다. 대체로 그 여성혐오의 행태는 ‘일베’의 행위들이 주류였다. 당연히 재연해내는 방식도 일베의 방식을 미러링 한 셈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교정 대상자로 상정한 일반 남성들은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여성 혐오’의 행태에 대한 경험을 가질 수 있어도 그 재연 방식에서의 불일치는 정신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메갈리안
출처 메갈리안

교정 방법으로서의 미러링은 정반사를 조건으로 하지만 최근 인터넷 페미니즘의 방식은 ‘난반사’를 채택한 것이다. 모든 여성 혐오적 악행의 총합을 무차별적으로 미러링 한 셈이었다.

여성혐오

‘misogyny’의 언어적 해석은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여성혐오는 남성이 여성의 권리행사 능력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입장이 기반인 관념이다. 유전적 혹은 사회 경제적으로 남성보다 무능하거나 비합리적이라는 편견이 바로 ‘여성혐오’이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시민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된 ‘묻지마 살인’ 피해자에 대한 추모의 글을 남기고 있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시민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된 ‘묻지마 살인’ 피해자에 대한 추모의 글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여성혐오에 대한 논쟁은 ‘미러링’이라는 행위 이후에 발생했다. 사실은 이 둘 사이의 형태가 거꾸로 된 셈이었다. 여성이 남성에 대해 미러링을 해야 했다면 사실 미러링의 대상이 되는 여성 혐오 행태가 어디까지인지가 선행되었어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이미 일베를 기반으로 미러링 행태가 규정되기 시작되었는데, 여성혐오는 이 미러링 전반을 합리화하는 기제의 역할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여성혐오의 범주는 타국의 사례보다 더 확장된 개념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통계적 오해

이런 과정에서는 몇 가지 통계적 오류도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이러한 통계들은 “한국이 타국보다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라는 주장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에 강력범죄에서의 여성 비율(비율은 분모 값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여러 국가의 여성 인권과 문화적 기반을 보면 상관 혹은 인과관계를 해석하기 어렵다)이라던가 경력단절에 의한 남녀 임금 격차를 “‘동일 노동’에 대한 임금 차별”로 오해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실제로는 같은 직무에 종사하는 남녀의 임금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20대에서의 동일 연령대의 평균 임금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높다. 이유는 경력을 더 빨리 쌓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의 임금 체계가 연공서열식 임금체계인 원인이 있다.

여성 혐오가 임금 격차에서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출산과 육아의 책임에 있어서 부부가 동등하게 부과된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더 부과되어 이후 여성이 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대안의 차이

앞서 미러링의 대상을 설정하는 것과 통계로서 한국 사회의 남녀 인권 문제를 진단하는 관점의 오해는 대안적 오해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사실 페미니즘의 핵심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에서 출발한다.

즉, 사회 구성원과 가족 구성원으로서 생물학적 차이 외에는 역할적 구분이 없는 사회가 최종적 목표이다. 육아와 가사 전담도 남성이 할 수 있으며, 여성도 사회에서 자아실현과 경제적 책임을 동등하게 분담하는 것이다.

이러한 페미니즘 본래의 가치는 사실상 여성의 경제적 지위의 정당한 회복과 기회의 균등 그중에서 전통적 역할론으로 제약된 기회를 회복하는 것에 중점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어떤 사회에 가더라도 등장하는 ‘연쇄 살인마’와 전체 남성보다 극소수인 ‘범죄자’보다 집중해야 할 대상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과 성 역할에 의한 직무 배분의 불합리성, 경력 회복을 위한 정부 지원, 여성이 진출할 수 있는 직종의 다변화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노동자로서의 인권과 여성의 인권이 함께 나갈 수 있고, 남녀가 같은 가치를 위해 힘을 합칠 수도 있다.

그러나 통계적 오해에서 보듯 ‘한국 남성의 특질’로서의 여성 혐오를 입증하는 방식들은 결국 ‘한국 사회’의 억압을 강조하는 형태로만 논의와 대안이 진행될 뿐이었다.

노 브라 데이
노 브라 데이

대표적으로 ‘노브라’ 투쟁 운동에 대한 관점은 여성 내에서도 일치하지 않는 사안이다. 설리 논쟁에서 보듯 대부분은 관심이 없거나 혹은 노브라 문제를 개인의 가치관과 선호의 차이로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남성들의 시선’이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면 대안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정 자체가 남성들의 시선 억압 때문에 ‘노브라’ 투쟁이 되지 않는 사안이 되고, 결국 남성들의 시선이 무장해제되어야 비로소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남성들도 대안이 없다. 내면의 상상과 시선을 남성들도 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터넷 페미니즘 운동의 대안은 결과적으로 정치적 의제로 발전하기보다 지엽적 사건에 대한 비난으로 그치고 말았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은 불특정 남성으로부터의 성폭력 위협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 성폭력의 상당수는 직장 혹은 학교에서의 ‘면식 관계’에서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인식의 차이가 대안의 차이로 드러난 장면이 다름 아닌 부산지하철의 여성 전용칸이었다.

여성혐오에 대한 정의 없는 정의 구현

레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페미니즘의 가치가 어긋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넥슨 사의 <서든어택2>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그 게임 콘텐츠의 여성 캐릭터의 복장을 통해 여성혐오가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의로서 여성혐오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창작물은 법인격이 없는 대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넥슨
넥슨 <서든어택2>

<서든어택2>의 창작물은 현실에서 여성 아이돌을 성 상품화를 하는 문제보다 지엽적인 것이었다. 전자가 하위문화라면 후자는 주류 문화였다. 실제로 또한 전자는 성 보호를 받아야 할 법인격이 아니지만, 후자는 성 보호를 받아야 할 법인격을 지닌 실체였다. 그러나 논쟁 대부분은 ‘전자’를 향해있었다.

창작물로서 여성과 남성을 어떻게 그려내는 것은 ‘창작자’의 가치관에 달린 문제였다. 다만 그 수단에 있어서 법적 금기를 벗어나면 안 될 뿐이었다.

<서든어택2>에 대한 반응은 사실 서브컬쳐 전반을 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 웹툰과 게임 원화, 게임 캐릭터는 소아성애로도 보일 법한 아동 묘사 캐릭터가 주류이며, 언제나 캐릭터들은 남성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몸매와 의상으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사실 게임 자체로서의 <서든어택2>는 게임 선호의 문제였다. 비록 여성 캐릭터의 의상과 포즈가 비판을 받을지언정 ‘보이콧’ 운동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남성도 ‘게임으로서의 <서든어택2>는 혹평’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 보호를 해야 하는 법인격으로서의 여성혐오는 다름 아닌 한동철 PD의 ‘건전한 야동’ 발언이었고, JTBC의 <잘 먹는 소녀들>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또한, 스포츠 채널에서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들의 역할과 의상, 기상캐스터들의 역할로서의 선발 기준들이었다.

JTBC
JTBC <잘 먹는 소녀들>

또 정치권에서는 청와대 및 당 대변인으로 뽑히는 여성들의 기준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페미니즘이란 여성이 사회인으로서 ‘능력이 아닌 남성이 소비하는 역할로서의 여성’을 배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장애로서의 사회적 ‘여성혐오’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소비하는 문화적 ‘여성혐오’를 핵심 표적으로 잡았다.

전자의 경우에는 논쟁과 대안이 한국사회의 남성 기득권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당연히 기득권이 아닌 남성에게서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법인격을 가진 누군가의 피해도 없는 서브컬쳐 문화를 건드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 선호에 따른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바로 ‘아동·청소년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이 논쟁이 되었을 때, 성인용 학원물 만화와 교복을 입은 성인 배우의 포르노 소지에 대해서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여성가족부는 남녀 모두에게 지탄을 받았다. 현실에서는 각종 룸살롱 등에서 성매매가 횡행하고, 직장 내에서는 여성 직원에 대한 성희롱과 성추행,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난무했음에도 제대로 된 정책적 대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고위 공직자가 난교 파티를 하거나 성 상납을 받은 사건도 흐지부지되었다.

최근에도 이러한 서브컬쳐에 대한 페미니즘의 공격과 무관하게 남성 아이돌의 성폭행 혹은 성매매 사건과 대기업 재벌의 성매매 사건은 페미니즘 논쟁의 표적에서 벗어나 있다.

하위문화에 대한 역린

사실 <서든어택2>에 대한 메갈리아의 반응은 법인격 없는 창작물이라는 관점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필자가 판단하기로 그러한 집중도를 연예인의 성폭력 사건이나 주류 문화였던 연예 사업에서의 ‘건전한 야동’ 발언을 한 PD 퇴출, 혹은 미성년자 아이돌에 대한 성 상품화에 집중했다면 이야기는 매우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서든어택2>를 통해 넥슨 보이콧 운동은 진행되었고, 넥슨과 메갈리아의 대결 구도는 정해졌었다. 그 와중에 클라이언트로서의 넥슨과 함께 일하던 성우의 티셔츠 구매 인증을 통해 재확산되었다.

김자연 성우의 메갈리안 후원 티셔츠 인증 트윗
김자연 성우의 메갈리안 후원 티셔츠 인증 트윗

그러나 필자가 말했듯 애초에 넥슨 대 메갈리아의 구도는 페미니즘 운동으로서 큰 사건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하위문화를 건드리는 바람에 그에 반감을 품은 유저에 의해 성우가 교체되는 결과만 낳았다. 이건 사실 여성 혐오와 상관이 없고, 소비자 선호의 문제였다.

최종적으로 이 논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입장은 ‘넥슨’이었고, 해당 성우였다. 그러나 제 3자이자 만화 캐릭터에 성적 판타지를 투영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웹툰 작가들이 합류하면서 그야말로 하위문화 산업을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었다.

마치 십자군 전쟁과 같은 현 페미니즘 운동

넥슨을 보이콧 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실질적으로 달성되는 페미니즘적 가치는 없다. 결과적으로 프리랜서였던 성우는 이번 일로 더 큰 경력 흠집을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 부분에 본인의 경솔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소신과 달리 클라이언트로서의 넥슨과 함께 작업하면서 클라이언트에 대한 부정적 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직업윤리로서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단순 계약 해지로 끝날 문제였지만 제 3자들이 더 큰 시련을 안겨준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넥슨 사태와 웹툰계의 문제는 어떻게 결론이 나던 둘 다 손해를 보는 싸움이 되어가고 있다.

즉, 게임과 웹툰 산업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만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여성 혐오로부터 지켜야 할 법인격으로서의 ‘젠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작물들이기 때문이다.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실존하는 법인격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창작물을 대상으로 투영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탄생하는 것이다.

종이는 찢어버리면 그만이고, 창작물은 삭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실제 보호되어야 할 성우의 개인적 의지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이 성우의 인격은 실존하는 법인격이다.

분명 토론을 하고, 이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논쟁인가를 따져봤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문제였다. 애초에 <서든어택2>의 여성 캐릭터 문제에서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당사자성을 강조하며 ‘원천봉쇄의 오류’를 논쟁에 끌어들인다. 앞서 ‘미러링’의 범주에 대한 문제 또한 남성들은 피해의 경험이 없으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당사자성을 강조함에 따라 스스로 논리적 틀에 갇혀버렸다.

즉, 여성 그 자체만으로 페미니즘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오류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미러링에 투영되는 혐오적 발언들을 정당화해버렸다.

이건 사실 십자군 전쟁과 같았다. 예루살렘은 장소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곳이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도들이 이슬람교도를 공존 불가능하고 박멸해야 할 이교도로 여겼던 것처럼 지금의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는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남성 권력은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해왔고, 여성은 억압된 다수였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이 관계의 균형추를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기득권을 ‘한국만의 특징’으로서 비하하거나, 공감대를 여성으로만 축소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다.

또한, 실제로 남성 권력의 간접적 이득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여성혐오의 가해자로서의 공감, 교정으로서 미러링을 받아들이는 행위에 대한 공감은 개별 남성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혹자는 프랑스 영화 <억압받는 다수>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예로 든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영화와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미러링 자체가 독자와 관객이라는 장벽이 존재한다. 즉, 그 매체를 접하더라도 비현실이라는 전제를 인지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이 저지르지도 않은 가해에 대해서 현실의 미러링이 온다면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페미니즘으로서의 미러링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현재의 메갈리아라는 커뮤니티에 대한 논쟁은 미러링이라는 수단에 대한 정당성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 표현들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여성혐오’의 범주와 통계, 운동의 방향성을 확장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페미니즘은 별것이 아니다. 사회적 성 역할이 없다는 것과 법인격은 동등하다는 것, 그리고 개인적 인격의 가치도 동등하다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