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여성 감독의 성폭행 사건폭로지난 2일 ‘2017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신인감독상’ 수상자였던 이현주 영화감독이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폭로가 나와 충격을 주었다. 지난해 12월 10일 대법원은 해당 감독에 대해 준유사강간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성폭력 교육 40시간 이수 명령을 선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한 폭로가 퍼지자 ‘여성영화인상’ 주최 측인 여성영화인 모임은 수상을 뒤늦게 취소하고, 영화감독조합도 영구제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현주 감독, 청룡영화상 신인 감독상 수상(출처 SBS)문제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기까지 영화계 내외의 각종 성폭력 공론화에 참여했던 여성계와 여성영화인단체가 이 문제에 대해 한결같이 함구했다는 것이다.연기 중 강제추행 주장으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배우 조덕제에 대해서는 2심부터 여성 및 영화 관련 단체들이 법정을 채우고 1인 시위를 하며 압력행사를 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이와 관련해 최근 미투 운동 대열에 참여한 영화계 내의 피해자는 페이스북을 통해 되려 가해자를 두둔하는 영화계의 분위기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피해자는 “기성 영화감독이자 이 일의 배경이 되었던 학교 교수는 가해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수차례 나를 불러 고소를 취하하라고 종용했다”고 전했다.
피해자 호소문(출처 페이스북)‘남성연대’ 프레임의 허구성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여성계의 침묵은 물론 피해자에 가해진 사회적 압력들이 여성계가 평소 비난해온 ‘남성연대’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상당수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남성집단의 연대가 존재하며 그 안에서 피해자와 약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구조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캐롤 페이트만 같은 여성학자는 이를 아예 ‘남성동맹’이라는 용어로 이론화한 바 있다.
관련 기사급진적 여성 연대를 다시 생각하기그러나 실제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남녀의 성차를 연구해온 많은 사회심리학자는 이러한 일방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참고 <소모되는 남자>). 남성집단은 다른 남성집단과 빈번한 갈등 관계에 놓이곤 하며 오히려 그 과정에서 집단 내 여성 참여에 호의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모되는 남자(로이 F. 바우마이스터 / 시그마북스)한편 이러한 남성연대라는 명칭은 학문의 외연을 넘어 대중적인 용어로 보급돼 여성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알탕연대’라는 속칭으로도 불린다. 남성집단이 ‘가해자를 감싸고 돌거나 가해행위에 대해 침묵·은폐로 일관’하는 행태를 보인다고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정작 자신들의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범죄행위에 대해 침묵해온 여성영화계 및 여성단체의 모습은 이러한 ‘알탕연대’가 단지 남성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화된 집단의 보편적인 속성에 가깝다는 교훈을 재확인시킨다.
‘피해사실’은 지우고 ‘승리서사’에 집착하다집단의 유불리에 맞춰 이슈별로 침묵하는 관행은 단지 여성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문화계 내 성폭력 폭로 중 일부가 허위거나 무고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문제점을 드러내고 개선하는 성찰이 우선이 되기보다는 폭로의 형식 자체에 대한 ‘승리주의적 회고담’이 만연해 있는 셈이다.
문단 내 성폭력 허위폭로 가해자의 사과문(출처 트위터)예를 들어 한 문학신문의 기사는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문학의 이름으로 행해져 온 성폭력들이 드러났다”고 전제한 다음 이같이 덧붙이고 있다.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운동 이후 죄를 지었던 문인 일부가 처벌을 받았고, 페미니즘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거나, 한국문학 내의 여성혐오에 대한 경각의 이야기가 오가는 듯했다. 그러나 탄핵정국과 장미대선을 거치며 논의들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기성문인들의 무관심과 방조는 가장 큰 장벽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기사가 전하는 이야기와 달리 실제로는 ‘성폭력 시인·소설가’로 명명된 블랙리스트가 최근까지도 트위터상에 지속해서 떠도는 등 달아올랐던 사회적 분위기를 ‘무관심’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관련 기사문단 내 성폭력으로부터 1년, 다시 연대의 불 지피는 ‘우롱센텐스’위 기사는 문학계 내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사그라든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지만 애초에 잘못된 사람을 희생양 내지는 불쏘시개로 삼아서 촉발한 담론이 지속 가능한지를 스스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또한, 위 기사의 문제점은 기사가 말하는 무려 ‘문학의 이름으로’ 행해져 온 성폭력의 관행이 대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 행사되었느냐가 불분명하다는 점도 있겠지만(기사는 슬쩍 성폭력과 무관한 문단의 편협함과 등단제도의 문제로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다) 가장 큰 문제는 애초에 과거 주목받았던 폭로 중에서 명백히 무고 피해를 낳은 거짓폭로들(박범신·박성준·박진성)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삭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선택적 침묵은 무리한 폭로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들을 되려 자신들이 내세우는 운동과 담론의 ‘트로피’로 간주하는 몰상식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몰상식한 언론인이 키우는 문제한편 이러한 몰상식한 태도는 지난 90년대 ‘100인위 사건’ 이후 오랜 여성운동의 관행이었다. 또 한편 굳이 공정하게 하자면 희생양을 통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몰상식한 관행은 언론에 의해서도 재생산된다.최근 위근우 기자가 SNS상에서 성폭력 허위 폭로 피해를 본 박진성 시인을 암시하며 “모 시인의 성적 착취와 학대, 정신적 괴롭힘이 상당히 드러난 상황에서도 침묵하고 법정에서 무혐의가 나왔다는 이유로 #문단_내_성폭력 폭로 운동과 그에 대한 동참을 분위기에 휩쓸린 무책임한 행동으로 몰아가던 사회”라고 언급했다가 당사자의 반발로 글을 삭제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이에 대해 당사자는 “도대체 어떻게 제가 하는 일이 ‘성적으로 착취하고 학대’하고 나아가 ‘정신적 괴롭힘’까지 하는 것입니까? 저는 악덕 포주입니까? 저는 언제까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이런 저열하고 더러운 언어에 시달려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항변한 바 있다.여기서 언급된 박진성 시인은 지난 2016년 10월 터진 성폭행 허위폭로 사건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한편 허위사실로 고소를 한 폭로 가해자와 시인에 대해 허위사실을 퍼뜨린 또 다른 20대 여성에게는 각각 기소유예와 벌금형이 내려진 바 있었다.
무고죄를 저지른 문학지망생과 박진성 시인의 카톡사실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위근우 기자가 도리어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담론의 전리품으로 소비하려는 저열한 욕망을 SNS상에 내비친 사건은 우리 언론 생태계와 담론적 관행의 단면을 엿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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