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특집]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신화, 김동성

16회 전무후무한 세계선수권대회 남자부 전관왕

역대 쇼트트랙 선수 중에 김동성 선수처럼 단기간 전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선수가 또 있을까. IMF 직후 열린 1998년 나가노 올림픽 1000m 결승전에서 날 들이밀기로 딴 금메달부터 4년 후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 1500m에서 미국 안톤 오노 선수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빼앗긴 금메달로 일어난 전 국민적인 반미 감정과 세계선수권에서 분노의 질주까지. 그 4년간 김동성 선수는 대한민국 전 국민의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스포츠 스타였다.

안톤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

나가노의 영광

김동성 선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어려서부터 그는 수영, 스키 등 다양한 운동을 했는데 그중 초등학생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보고서는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를 졸라 스케이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각종 국내 대회에서 150여개의 메달을 따낸 김동성 선수는 96년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

하지만 1997년 4월 태릉 아이스링크에서 벌어진 쇼트트랙 종합 선수권 대회에서 김동성 선수가 2관왕을 차지하는 모습을 감격에 겨워 지켜보고 오솔길을 내려오던 김동성 선수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김동성 선수는 큰 타격을 받는다.

심리적인 충격도 충격이지만 당장 가세가 기울어 스케이트 장비를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동성 선수는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아버지의 영정 앞에 굳은 맹세를 했다. 그것은 바로 1년 후 열리는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바치겠다는 맹세였다.

그리고 1년 후 나가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전에 오른 김동성 선수는 아버지의 영전에서 한 약속을 지킨다. 마지막 바퀴까지 중국의 리지아준과 캐나다의 에릭 버다드 선수를 추월하지 못하고 3위에 처져 있었지만, 직선주로에서 인코스로 에릭 버다드 선수를 따돌리고, 이어 마지막 코너에서 아웃코스로 빠져나가며 중국의 리지아준과 동일 선상에 올라선 김동성 선수는 비장의 발 내밀기로 역전하는 데 성공한다.

김기훈 선수의 2연패에 이어 세 번째로 같은 종목인 1000m에서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선수단에 안겨준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또한, 1994년부터 겪고 있던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이겨내고 얻은 금메달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을뿐더러 IMF로 고통받던 국민에게 보낸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극적인 대역전승으로 국민에게 눈앞에 닥친 국난을 이겨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준 것이다.

이후 김동성 선수는 엄청난 스타덤에 올라 극성팬들에게 시달리는 처지가 됐다. 대표팀 선배였던 채지훈 선수가 겪었던 유명세를 고스란히 겪으며 아이돌 스타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의 빼어난 스케이팅 실력뿐만 아니라 잘생긴 외모와 거침없는 입담은 수많은 팬을 낳았다. 귀국 당시 몰려든 소녀팬들 때문에 경찰의 호위까지 받으며 겨우 공항을 빠져나왔고, 집으로 쇄도하는 팬레터와 전화 등으로 가족들이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김동성 선수

솔트레이크의 좌절로 국민 영웅이 되다

그로부터 4년 후 벌어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는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대회 전 맹훈련으로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든 김동성 선수는 내심 4관왕을 기대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개최국인 미국의 스타 안톤 오노와 4년 전 김동성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중국의 리지아준이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 획득을 가로막았다.

1000m 준결승에서 김동성 선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선두를 질주했으나 뒤쫓아오던 라이벌 중국 리지아준에게 반칙을 당하며 어이없게 탈락했다. 심판의 실격 판정을 기다렸지만 끝내 파울 판정은 나오지 않았고 김동성 선수는 이를 악물고 새롭게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추가된 1500m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1500m 결승에 오른 김동성 선수는 6바퀴를 남겨놓고부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 바퀴에서 2위로 올라선 미국의 안톤 오노에게도 자리를 내주지 않으며 끝까지 질주했다. 리지아준에게 당한 반칙으로 결승에도 못 올라간 1000m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레이스였다.

하지만 자국의 영웅인 안톤 오노가 2위로 들어오자 수많은 미국 관중은 거센 야유를 퍼부었고,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들고 링크를 도는 와중에 호주의 휴이시 주심이 진로방해로 그의 실격을 선언한다. 너무나 어이없는 실격이었다. 생중계로 이 광경을 지켜본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분노했고, 이 사건은 반미 감정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 ‘아무리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이라고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편파판정으로 우리의 금메달을 강탈해갈 수 있느냐’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반미감정은 최고조에 달했다.

사실상 안토 오노에게 금메달 강탈 당한 김동성 선수

같은 해 6월에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예선 2차전 대한민국과 미국의 경기에서 동점 골을 넣은 안정환 선수가 이 사건을 재현하는 골 세레모니를 하면서 뜨거웠던 여론이 조금씩 식기 시작했지만, 한동안 안톤 오노가 대한민국 입국 시 경호원을 요청할 정도로 금메달 강탈의 후유증은 오래갔다.

이어진 500m에서도 메달을 따지 못한 김동성 선수는 결국 빈손으로 귀국했고, 자타공인 쇼트트랙 최강국인 대한민국의 남자대표팀은 올림픽 출전 이후 처음으로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김동성 선수에게 쏟아진 관심과 찬사는 나가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뜨겁고 거셌다. 4년 만에 김동성 선수는 또다시 국민 영웅이 된 것이다.

다가올 세계선수권에서의 명예 회복을 위해 김동성 선수는 일체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스케이트 날을 갈았다. 그리고 마침내 4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벌어진 세계선수권에서 김동성 선수는 분노의 질주로 전 종목을 휩쓸어버렸다. 500m, 1000m, 1500m, 3000m를 모두 우승해 개인종합 136점의 만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5000m 계주까지 모두 우승하며 세계선수권대회 남자부에선 전무후무한 전관왕에 올랐다.

1980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대회가 시작한 이후 전관왕은 1983년 캐나다의 실비에 다이그리 선수가 여자부에서 우승한 것이 유일했다. 남자부의 경우 김동성 선수의 선배인 김기훈 선수가 남자 계주를 빼고서 개인 종목을 모두 우승한 것이 김동성 선수의 기록에 가장 근접한 기록이었다. 김동성 선수는 이렇게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1대100에 출연한 김동선 선수(출처 KBS)

아쉬운 선수 생활 은퇴 이후

2002년 세계선수권 우승 이후 김동성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관심과 응원을 받은 김동성 선수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선수 생활을 잠시 쉬며 재활에 힘쓴다. 하지만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는 못하고, 2005년 선수 생활을 은퇴한다. 당시 그의 무릎 연골은 닳아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은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김동성 선수, 아니 김동성 코치는 스케이트 클럽 임원들의 이권 다툼 속에 학생들을 폭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미국빙상연맹으로부터 미국에서 코치 자격 6년 정지를 받아 2012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현재 김동성 코치는 쇼트트랙 선수와 초보자를 가르치고 다양한 강연현장에서 ‘동기부여’, ‘도전정신’, ‘열정’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한때 이혼 위기까지 갔던 부인과도 관계를 회복해 함께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금 지도자로, 강연자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김동성 코치. 그는 쇼트트랙을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선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