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태양꽃, 나로서 살아 있다는 것의 기적

[리뷰] 한강 <내 이름은 태양꽃>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날이 좋아 산책을 자주하는 요즘인데요, 이 좋은 날을 더욱 좋게 만들고픈 욕심에 한동안 뜸했던 등산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정상까지 오르진 못해도 걷는 동안 코 끝에 맴도는 초록의 잔향과 발바닥을 밀어내는 땅의 마찰만으로도 온 몸과 정신이 새로운 기운으로 정화되는 듯한데요.

그렇게 걷다 보면 머리를 어지럽혔던 고민들의 핵심이, 겉돌고 휘말리느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 과녁의 중심이 또렷이 보인다는 이점도 있어요. 그래서 최적의 공기, 향기, 온기로 가득한 나만의 세상 속에 빠져있게 되곤 하는데요, 어제는 함께 동행한 지인의 한마디가 필자를 깨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키 작은 나무의 듬성한 잎들 사이로 말간 얼굴의 해가 그대로 빛을 내 비춘 것을 보고는

저기 좀 봐! 태양꽃이야.

했습니다. 정말이지 그 시각의 그 해는 꼭 나무에 핀 꽃처럼 찬란해서 아름다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지인이 이름 붙인 ‘태양꽃’을 생각하다 떠오른 책을 뒤적였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어른을 위한 동화 <내 이름은 태양꽃>입니다.

<내 이름은 태양꽃>(한강 지음 / 문학동네 출판)

Sunflower, 해바라기의 영어명을 직역하면 ‘태양꽃’이 됩니다. 동화 속에는 담장 아래 볼품없이 태어난 풀(나)이 등장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처음 만난 친구 담쟁이는 시원스럽게 줄기를 뻗어가며 성장하더니 어느새 담장을 훌쩍 넘어 나만 홀로 남아요.

그러나 그때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얼른 자라지 못하는 건 이슬 때문이 아니란 걸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나는 담쟁이처럼 빨리 자라는 줄기도, 힘차게 땅을 짚는 갈고리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시작부터 이렇게 불리한 조건이지만 그래도 나는 낙심하지 않아요. 담쟁이처럼은 아니더라도 그가 보여줬듯 언젠가는 이 담장을 넘어 저 해가 보내주는 빛을 받을 날이, 양지바른 꽃밭의 꽃들처럼 될 날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런데 머지않아 내게도 꽃이 핍니다. 빛깔이 없는, 해파리나 말미잘과 같은, 그래서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런 꽃이요. 바람조차 꽃을 알아보지 못해 자꾸 할퀴며 불어오자 나는 결국 심술을 내요. 내 꿀만큼은 맛있게 먹던 벌도, 나비도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데요. 심술로 인해 달콤한 맛과 향이 아닌 씁쓸한 독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껏 괴로워할 때 누군가 너만 괴로운 것은 아니라고, 봉숭아도, 장미도 숨죽여 앓고 몰래 울음을 참는다고 말해줍니다. 그 누군가는 흙 속에서 구멍을 뚫느라 애쓰고 있는 얼굴 모를 풀이에요. 그는 자신이 겪은 생을 통해 느낀 점들을 말해줘요.

상상할 수 있겠니? 땅속에서 눈을 뜨면, 잠깐 동안 보았던 세상의 기억이 얼마나 눈부시지 몰라. 세상에는 바람이 있고, 바람이 실어오는 숱한 냄새들이 있고, 온갖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이 있고, 별과 달이 있고, 검고 깊은 밤하늘이 있잖아. 그것들이 견딜 수 없게 보고 싶어지곤 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져.

그리고는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동화의 중심 메시지일 한 마디를 덧붙이는데요.

난 믿어. 네 꽃은 언젠가 색깔을 가질 수 있을 거야. (중략) 넌 더 강해져야 해. 더 씩씩하게 견뎌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해.

이 말을 계기로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아요. 그렇게 강해지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비는 몰아치고 외로움과 상처에 몸살을 앓기도 하는데요, 그러나 또 이를 계기로 늘 부러워만 했던 화려한 꽃들이 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세상을 바로 보게 됩니다. 실개미들의 성실함과 산바람의 청솔 냄새를 좋아하게 됩니다. 예전엔 미처 몰랐지만 그들에게도 슬프고 힘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요. 관심이 생긴 것이죠.

비를 맞는 꽃

그러니까 나를 강하게도 만들고 나를 보드랍게도 만든 계기가 되는 건 모두 나의 주변인물들입니다. 나보다 더 초라한, 아직 세상 밖으로 떡잎조차 드러내지 못한 흙 속의 얼굴 모를 풀과 나를 두고 담 너머 세상으로 먼저 떠난 담쟁이와 늘 부러워만 했던 화려한 꽃들을 통해 나는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조금씩 나로 성장해갑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잊지 않게 해주세요. 그 풀이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왔던 밤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세상 모든 것들을 이렇게 생생한 눈으로 사랑하는 법을, 살아 있는 동안 잊지 않게 해주세요.

어느 날 나는 돌연 몸의 변화를 느껴요. 꽃에 빛깔이 생기게 되는 순간일 텐데 왠지 나는 기쁘지가 않아요.

그 동안 나는 빛깔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히 해왔지만, 그것이 정작 무슨 색깔일지는 미처 상상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다른 꽃들을 부러워만 하고, 빨리 자라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내 꽃의 빛깔이 어떠할지, 얼른 자라 맞게 될 저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지는 상상해보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는 지난 날의 캄캄한 마음들, 어둠 속의 원망들을 후회합니다.

다음 날 아침, 나를 스친 모든 것들에게 내 꽃잎의 빛깔을 물어보지만 그들은 모두 대답을 회피하거나 도망가버려요. 그때 담장 밑, 환한 연록빛의 새싹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게 답합니다.

만일 내가 너한테 이름을 붙인다면, 태양꽃이라고 부르겠어. 이 바보 친구야. 태양처럼 샛노랗고, 태양보다 눈비신 꽃아.

그 찰나, 회오리바람 한줄기에 허공으로 솟구치는 내 샛노란 꽃잎들을 나는 꼿꼿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게 됩니다. 찬란한 꽃잎들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는 모습을, 황금빛 꽃가루가 산산이 흩어지는 모습을.

야나가와 해바라기 공원

아마도 그 찰나가 태양꽃의 생에 절정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 순간이 너무도 짧아서 안타까운. 풀은 내게 괜찮냐고 물어요. 나는 대답대신 그를 만나게 될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연습해왔던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이제 나는 비로소 아는 것이죠. 나는 언제나 나라는 것을. 내 이름은 언제나 태양꽃이라는 것을.

작가의 말에서 한강 작가는 살아있다는 것의 기적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는 정현종 시집 <나는 별 아저씨> 중 일부를 인용하는데요.

새는 울고 꽃은 핀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다.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절망을 멈추게 하는, 순간에 생생히 살아있는, 우는 새와 피는 꽃의 기적을,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의 기적을 동화는, 시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날이 좋아 산책을 하고, 좋은 날을 더욱 좋게 만들고파 등산을 하고, 그러다 태양꽃을 보고, 또 그러다 태양꽃을 읽고, 결국 이렇게 기적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의 필자 역시 아직 무엇일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나라는 것을, 내 이름은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의 기적이라는 것을, 글을 쓰고 나누는 서연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이 마음이 변치 않길, 이 깨달음을 잊지 않길, 늘 이 기적을 살길 바라는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