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이야기 빈곤의 시대

아들 녀석이 몇 해째 초·중학생 방과후 학교에서 ‘영화창작 동아리’ 지도를 맡고 있어서 가끔 그 얘기를 물어본다. 초등학생들이 더 발랄하고, 중학생들은 오히려 자기표현을 꺼린단다. (영화) 기기를 만져보고 다루는 것은 흥미로워하는데 ‘시나리오 써보자’고 채근하면 다들 얼어붙는단다. 할 수 없이 영화 여러 편 보여주고 감상을 나누는 일이랑 자기감정을 간단하게 나타내보는 연습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어려워할까. 한두 마디로 설명해내기가 무척 버거운 질문이다.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현대 사회의 특징과 관련된 커다란 문제요, 학교 교육이 이 과제(아이들을 이야기꾼으로 키우기)를 지금부터라도 변변히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입시(출처 한국대학신문)

어쩌면 이것, 입시경쟁과 주입식 교육에 시달린 동아시아 중산층 동네에서만 벅찬 일이 아니라, 덜 시달리는 유럽 동네에서도 벅찬 일이 아닐까. 현대 인류사회를 큰 눈으로 둘러봐야 그 원인과 타개 방향도 제대로 밝혀낼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소경이 코끼리 만지듯 더듬거리는 얘기나 쪼끔 해보자.

필자가 어림짐작으로 꺼내 드는 얘기(명제)는 다음과 같다.

현대의 청소년들은 삶의 경험이 빈곤하다(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자기 이야기를 꺼내 들기를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삶의 이야기가 무엇인가. 사건과 곡절이 있고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우러날 때라야 사람은 남들에게 말문을 연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이 이야기다. 따뜻한 온실 속에 살아가고, 아무 생각 없이 누가 시키는 일에 따르기만 하는 사람은 간절한 이야기를 품지 못한다.

간절하게 겪었던 아이들과 온실 속의 아이들

지금 아이들의 모습·됨됨이를 헤아리려면 옛날 어린이들이 읊은 이야기와 견주는 것이 먼저겠다. 이오덕 선생이 옛날 옛적에 엮어낸 아이들 시집 <일하는 아이들>에서 몇 구절 옮겨온다.

새벽에 어머니하고 밥하러 나가니 꾸정물 속에 별이 반짝반짝한다. 엄마, 저거 봐, 하니 별이 자꾸 반짝거린다.

60년 전, 어느 초등 2학년의 시다.

태기야, 을자야, 성순아, 마구 날 보래. 버들강아지 먹어 보래. 안 씌워. 먹어 보래. 을자야, 니는 씨와? 나는 씹다. 경자야, 니는 안 씨와? 경자는 맛 좋다 한다.

50년 전, 같은 또래의 시다.

이 아이들은 자연과 벗하며 산다. 살갗으로 겪어내는 것이 있다(버들강아지). 생활이 있기 때문에 감수성이 싹튼다(꾸정물 속에서 별을 발견하다).

…소나기가 자꾸 짜든다. 빗물이 머리에서 낯으로 내려온다…, 담배를 심는데 구덩이를 잘못 파서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그 아이들은 일하는 고된 삶을 살았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간절한 소망을 품는다.

…내가 제비 보고 제비야, 비료 져다가 우리 집에 갔다 다오, 하니 아무 말도 안 한다.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나는 슬픈 생각이 났다.

이것도 같은 또래의 시다. 어른도 짊어지기가 힘든 비료 푸대를 짊어진 어린이. 그런 고생을 겪어본 아이는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마음씨를 품게 된다.

점심을 먹는데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내가 어머니께 쌀밥 싸 달라고 졸랐던 것이 후회된다. 청상 내 동무는 보리밥도 못 먹고 이 긴 날을 그대로 견디는데,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초등 5학년짜리의 이야기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어떠한가. 다들 대도시 콘크리트숲에 몰려들어 사느라 자연, 땅과 흙으로부터 멀어졌다(한국은 가장 심한 축이다). 해외여행의 기회들을 만끽하여 견문이 넓어졌다고는 하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눈요기는 오래 남는 실감이 아니라 하루살이 같은 앎(정보)에 불과하다.

방학을 맞아 해외로 떠나는 초등학생들이 여행가방을 끌고 인천 국제공항 출국장을 지나가고 있다

예전엔 기술 공구를 손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 오감을 자연스레 익혔으나 요즘은 자동화된 생산기계 옆에서 계측기를 그저 눈으로 훑고 단추만 누른다. 오로지 시각으로 축소된 감각 활동으로는 사람이 기계 세계의 부속물이 되기 십상이다.

수작업으로 돌아가자.

구호가 나오는 판이다.

또 인류 사회는 갈수록 공동체적인 유대관계가 해체돼 가고 있다. 혼밥족 혼술족을 당연시하는 곳에서 남들과의 교류도 깊을 수 없다. SNS가 소통을 도와준다고는 하나 거기는 유아론자들의 독무가 판치는 곳이다.

옛 청소년은 삶 속에서 고생을 겪고, 제가 서 있는 동네에서 세상을 깨달을 수 있었거니와, 요즘 청소년은 조부모나 부모한테서 배우는 바도 적고(전통문화의 단절), 지역공동체와의 교감은 더더욱 없다. 그의 생활은 온통 학교(와 학원)에 포섭돼 있는데 사회적 선발·배제의 눈먼 도구가 돼 버리고 더구나 관료체제에 찌들대로 찌든 학교가 아이들에게 무슨 ‘삶의 터전’이 되어줄 리 없다. 학교와 (핵가족의 협소한) 가정과 가상의 스마트폰 세계에 갇혀 사는 아이들한테서 무슨 듬직한 감수성과 옹골찬 줏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경험의 빈곤’에 대한 경고는 사실 어제오늘 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다. 섹스 로봇 개발이라는 희한한 발상마저 나도는 21세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복마전이 으리으리하게 지어지던 19~20세기에 일찍이 천명됐다.

어떤 이는 증기기관차가 선을 보일 때부터 이미 ‘여행의 참맛은 사라졌다’고 개탄한 적 있다.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문화는 점점 스러진다. 시장경제에서 분업의 도구가 돼버린 노동자들이 극심한 ‘노동의 소외’에 시달렸는데(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줄곧 볼트 너트만 죄다가 넋이 나간 영화 <모던타임즈>의 주인공을 떠올려 보라), 그 냉혹한 분업체제를 허물지 않고서는 (파편 같은 삶을 살아가는) 노동 대중이 풍부한 문화적인 주체가 될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서사의 위기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이 주제, 곧 “경험의 빈곤과 그에 따른 이야기의 빈곤화”와 관련해 더 자세히 살펴본 벤야민(1892~1940)의 이야기를 옮긴다. 그는 자본주의 근대에 접어들어 ‘경험’의 유통가치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고 짚는다.

이를테면 테크놀로지 발달로, 할아버지가 손주한테 경험을 전수해주던 구전의 서사 형식이 움츠러 들었단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애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름발이 서사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문제적인 개인이) 삶의 서술에서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남다른 것을 극단으로 이끈 결과물의 창조다. 고독한 개인 독자들이 저마다 골방에서 이를 말 없이 읽으며 주인공의 운명에 제 감정을 이입한다.

사진=픽사베이

소설은 근대에 접어들어 사람들이 맞닥뜨린 ‘서사의 위기’에 대응하여 출현한 것이지만 그 위기를 온전히(죄다) 극복해낸 문학 형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개인 주체를 감당하는 문학 형식이지 집단주체에 어울리는 형식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르주아 개인 주체들이 사회 변화를 이끌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끼리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문화 현상이 시나브로 시들어 가고 있을까. 크게 뭉뚱그려 말하자면 ‘돈’이 판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모든 삶의 이해관계 중심에 돈이 자리 잡는다면 사람들은 매사를 돈으로 계산하고 이른바 ‘합리적 계약관계’를 맺는 일에만 몰두한다. 주변을 돌아보며 웃고 떠들 마음의 여유들이 없다.

이와 달리, 사람이 선물을 주고받으며 먹고 살아간다면 감성(고마워하는 감응 능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해질까. 서로 만날 때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푸느라 밤을 꼬박 새울 것이다. 하지만 돈독에 빠진, 화폐 물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주판알 튕기는 셈속만 잔뜩 발달한다. 또 공공영역이 움츠러들고 다들 사적·개인적 세계에 갇혀 살아가는 것도 이야기 정신을 파괴한다. 세상을 함께 바꿔내는 일로 고무돼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조가비에 저마다 갇힌 사람들이 열정을 다해 서로 소통할 리 없다.

문화가 시들어가는 원인은 근본적인 데 있다. 동네 사랑방이 사라졌다는 것! 우리 옛 선조들은 ‘마실(마을) 간다’고 했다. 요즘 경로당이 파리를 날릴 뿐, 젊은이들의 마을은 까맣게 사라졌다! 이는 ‘두레(생산공동체)’가 소멸한 것의 결과다.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이 현대판 마을(마실)로 구실 할 수도 있을 터인데 노동조합은 근대 사회를 주름잡는 지배세력이 악착같이 억누르고 있고, 협동조합도 자본의 서슬 퍼런 위세에 눌려 변변히 커나가기 어렵다.

그럼 어쩌라는 말인가.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다고 해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갈 길은 끊겼다. 벤야민은 세상 만물에 ‘아우라(영혼의 에너지)’가 사라지고 이야기가 소멸해 가는 추세라 해서 너무 애달파하지 말라고, ‘몰락하는 것’에만 눈길을 쏟지 말라고 권한다. ‘쇠락한 시대’가 따로 있지 않다.

(좋았던 옛날이 그립다고) 옛 문화를 열심히 발굴해 문화재라는 보화를 잔뜩 쌓아 올린다 해서 우리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이야기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진짜 경험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품지 말고 우리가 맞닥뜨리는 ‘빈곤의 경험’을 두 눈 크게 떠서 직시하자고 한다. 우리가 밤톨만큼도 가진 것 없는 무산자임을 똑똑히 수긍하고서 세상을 둘러보는 것 말고 달리 돌파할 길이 없단다.

문학에서는 한 세기 전부터 ‘리얼리즘의 위기’를 말해 왔다.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전체 그림’을 그려내기가 어렵다는 아우성이다. 전체 그림을 그리지 못하니 ‘세상 전체’에 대해 이야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세상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체제로서 완강하게 굴러가는데도, 자본=종교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총체’로서 간파해내지 못한다. 세상을 그저 쪼가리 쪼가리들로 경험하고 반응한다. 시대가 그러하니 저마다 중구난방의 쪼가리 이야기에 열 올리고 ‘서사(내러티브)의 위기’는 더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지만 앞길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소망마저 덧없이 꺾이겠는가. 성서에 적힌 말마따나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몸부림치다가 깨달음을 얻을 기회가 더 크다는 복이!

구로공단 옛 모습

이오덕의 <일하는 아이들>이 자라서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이라는 책을 엮어냈다. 70년대를 공장 여공으로 살았던 10대 후반의 소녀들 이야기다. 그녀들은 배움에 목말랐다.

…시댁에 있는 언니한테 신세 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돈어른은 내가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밖에 나가 가로등 밑에서 공부할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세상의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떴다.

…나는 여기서 반감이 생긴다. 그래 하찮은 직원이 감히 사장을 찾아와 얘기하는 게 그렇게도 거북하다는 말이지? 왜 같은 인간인데… 난 울면서 그 회사를 나와버렸다.

이들이 저희가 겪은 것들을 스스로 간추려 이야기를 만들고 퍼뜨릴 것이다. 세상에 이데올로기와 미망의 안개가 아무리 짙다 해도 어떻게든 사람들의 이야기(서사)는 이어질 것이다.

너무 거창한 생각으로 치달았다.

어느 지역 몇몇 아이들이 제 삶의 이야기를 꺼내 들 줄 모른다.

개별 사례를 필자가 너무 섣부르게 일반화했는지도 모른다. 생각의 균형을 잡자. 꼭 이름난 사상가의 조언을 듣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수줍음을 우리 스스로 개선해줄 여지는 적지 않다. 평소에 우리 아이들이 무슨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지, 혹시 교실에서의 수동적인(!) 수업 활동 말고 아무런 ‘(자주적인) 생활’도 없는 것은 아닌지 찬찬히 살펴서 그들을 격려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수줍음’은 대번에 얼마쯤 개선될 것이다.

네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 보렴! 학교생활이 정말로 지겹고 집에서도 그저 쳇바퀴를 도는지, 아닌지를! 너 자신은 세상을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지 스스로 생각해본 것도 말해 보렴!

어쩌면 아이들이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아빠)는 지금의 자기 생활에 정말 만족하세요? 혹시 지겹지는 않으세요?

우리는 그에 대한 답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