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북한을 생각한다

올봄, 김정은과 문재인이 판문점 파란색 도보다리 위에서 단둘이 마주 앉았을 때 세계가 삽시간에 숨을 죽였다. TV 화면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산새 지저귐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평화의 미풍이 이제 곧 불어올 거라는 예감으로 세계 민중이 다 설렜다.

그때 꽤 많은 한국인은 한반도 정세 변화의 감격을 어떻게든 실감(추체험)해보려고 평양냉면 식당으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달포가 지나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트럼프가 손을 맞잡았을 때는 싱가포르 시민들이 다 들떴다.

두 나라의 역사적인 화해의 장소를 우리가 제공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악수하며 왼손으로 단독회담장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 AFP

어느 쪽의 해법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까

그런데 지금, 그 설레는 마음들은 어느새 한풀 꺾이고,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간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미국 정부가 처음엔 비핵화에 시한을 정하자는 둥,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를 해야 한다는 둥, 북한을 사납게 다그쳤지만, 지금은 그것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므로 서두르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왜 교착 상태에 빠졌는지 우리는 어렵잖게 짚는다. 한쪽은 상대를 믿지 못하고 자기들이 양보할 때마다 상대방도 똑같이 성의를 보여줄 것을 바라는데 다른 쪽은 상대가 자기들 것을 먼저 몽땅 내놔야만 그다음에 선물을 건네주겠다는 식이라서다.

우리는 원초적인 해법이 뭔지도 안다. 뒷골목 깡패들은 은밀히 마약 거래를 할 때 한쪽의 돈 가방과 다른 쪽의 마약 가방을 서로 동시에 주고받는다.

우리는 첫 실행 조치로서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을 닫고, 미군 유해도 보내드리겠소. 당신들도 ‘종전 선언’을 해서 성의 표시를 해 주시오. 한 차례 ‘기브 앤드 테이크’가 이뤄진다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갑시다!

미국 쪽의 속내는 무엇일까. 협상 과정을 언제든 대결(진압) 과정으로 뒤엎고 싶다는 속셈이 아닐까.

북한 쪽에 ‘체제 보장’의 선물을 줘서라도 거기 있는 핵무기를 없앨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일단 협상은 시작해 보자. 하지만 선물도 주지 않고 비핵화를 달성한다면 더 좋은 일이다! 까짓거, 협상이 파투 난들 무어 대수랴!

그러니까 우리는 문재인한테 다그쳐 물어야 한다. “당신은 북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어느 쪽을 편들겠소?” 문재인이 최근 ‘북미는 자기 약속을 지키라’고 말한 데 대해 북한 신문은 쓸데없는 훈시질을 삼가라고 비난했다. 사람은 중립을 지키기가 어려워질 때, 결국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한다. 우리는 북미 가운데 누구의 해법을 편들어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6일 오후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만났다 ⓒ 청와대

왜 우리는 북한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가

최근의 흐름을 잠깐 둘러봤다. 그런데 이 글은 ‘비핵화’ 문제를 길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북한 정세를 맞아 옛 생각거리들을 되살펴 보려는 것이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설령 신통한 결과를 낳지 못한다 해도, 이 과정에서 우리 남한 민중이 좀 더 정치적 깨달음을 얻는다면 거기서 원기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북한을 ‘모처럼 생각한다’고 제목을 썼다. 그동안 우리가 북핵 문제든, 한반도의 군사 대립 현실이든 솔직히 고개 돌리고(!) 살았다는 사실부터 성찰할 필요가 있어서다. 딴 나라 사람들은 ‘코리아!’ 하면 군사 긴장이 높은 곳이라는 사실부터 떠올리고, 그래서 ‘여행 가볼 생각’도 많이들 접을 텐데, 우리 자신은 그 사실을 아주 무디게 받아들였다. 떠올려 봤자 스트레스만 받으니 원.

젊은이들은 남과 북이 ‘남남’으로 살아온 데 익숙하다. 30년 전 문익환 목사가 휴전선 철조망을 (맨발로) 밟으며 비장 처절하게 통일의 노래를 불렀던 사실 따위는 까맣게 모른다. TV가 그 엄중한 민족현실과 가시밭길의 현대사를 민중에게 (자주 자세히) 일깨워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북한의 존재’조차 잊고 살았던 청년들이 적지 않겠다.

뭐, 우리끼리 살면 되지 뭘 귀찮게 통일을 하려고 하냐? 걔네들 퍼 주려고? 관심 꺼!

나이 좀 잡숫고,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길 바란 사람들은 물론 그 존재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만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아니 왜 핵 개발은 하고 그래? 세습 정권이 굴러가는 것도 참 꼴사납군.

그래서 더 이상 북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소통해서 뭔가 달라질 여지가 있어야 상대를 쳐다보는데, 우리가 굳이 생각해 봤자 달라질 게 무어 있겠냐는 피로증세의 표현이다.

분단 현실에 지친 사람들은 북한이 자꾸 밉게 보였더랬다. 남쪽의 박정희(전두환)하고 북녘의 김일성(김정일)하고 혹시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닐까. 저마다 상대를 핑계 대며 자기의 독재정치를 변명하는 고스톱 게임! 그러니까 상대가 미운 짓을 할수록 우리(=지배층)의 집권 기반이 튼튼해진다!

적들아, 부디 악마처럼 계속 굴어서 우리를 도와 다오!

모처럼 ‘왜?’를 묻자

그런데 ‘모처럼’ 한반도에 싱그러운 바람이 불었으니 이제는 ‘(모처럼) 생각해 보자’고 사람들에게 권유할 수도 있겠다. 먼저 할 일은 그동안 우리가 품었던 북한에 대한 감정부터 되살피는 일이다. 그렇게 미워해도 됐던 일일까. 또 우리가 과연 북한을 옳게 비판했던가?

왜 북쪽이 ‘핵 개발’에 나섰는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안다. 자기들 나라(체제)를 보위하려고 그랬다. 가뜩이나 핵이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데 그 망할 놈의 핵을 걔네가 꼭 덧보태야 했는지, 마뜩잖기는 하지만 걔네 처지에서는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너희가 죽지 않을) 딴 길을 찾아보자’고 설득할 수는 있을망정 “쟤네, 미친놈들이야”하고 감정에 겨워 욕을 퍼부을 일이 아니었다(미국 클린턴 정부가 좀 더 진취성이 있었다면 20년 전에 북미 대결 구도를 청산할 수도 있었다).

Washington DC. USA, 8th December, 1993 President William Jefferson Clinton addresses the media after signing the North America Free Trade Agreement treaty in the Cross hallway of the White House.

그런데 북녘에 대해 대중이 품어온 혐오감을 가만 떠올려 보자면 ‘왜’를 도무지 묻지 않은 사람이 참 많은 것 같다. 그저 그놈들이 전쟁 분위기를 자꾸 띄우니까 끝없이 미웠을 뿐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해마다 미국 항공모함이 동해안에 찾아와 ‘전쟁 연습’을 벌인 사실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았다(약소국 때려잡는 데에 항공모함 한 대로 충분하다). 그것이 세상 질서이고, 거기 감히 맞서는 것은 뭔가 불온한 짓이란다! 그래서 ‘그놈들, 밉다!’는 감정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북의 정권 세습에 대해서도 그렇게들 화를 냈을까. 사우디아라비아도 정권을 세습하고 있는데(거기는 더구나 케케묵은 왕조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자식이 대를 이어 정치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부시 2대! 아베 3대!), 그에 대해서도 입을 뻥끗하지 않는다.

더 무서운 것은 자본의 세습(상속)이 아닐까. 한 사회가 금수저와 흙수저로 애초 갈라져 버린다면 민주주의가 완전히 작동을 멈춘다. 평등이 송두리째 소멸하면 자유도 절름발이가 된다. 한국의 어느 고위 공무원이 ‘민중은 개돼지’라고 버젓이 뇌까렸던 일화도 괜히 나온 것 아니다.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이나 유럽이나 사회의 역동성이 살아 있었다. 지주 계급을 타파하고(한국), 상속세를 엄하게 매겨서(유럽) ‘개천에서 용 날 기회’를 보장했다. 안타깝게도 20세기 말부터 사회 양극화의 속도가 가팔라졌다. 그러니 더 두려워할 일이 무엇인지, 균형감각을 찾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정권 세습이야 금세 바뀔 수도 있는 현상이다. 정치 여건만 뚜렷이 개선되면 북녘땅 자체에서 그 얘기가 자연스레 나온다. 김일성·김정일도 처음부터 ‘세습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다. 더 바꾸기 어려운 것은 금수저 계급의 굳어진 아성인데 사람들은 내 눈 안에 들어있는 들보를 직시할 생각은 없고 오직 남의 눈에 들어있는 티끌을 흉보기 바쁘다.

2013년 북한 평양

북한을 속으로 경멸하는 사람도 무척 많다. “세습이나 하면서 백성을 어찌 저리 굶겼누? 자연도 변변히 못 돌봐서 북녘 산천이 죄다 민둥산이 돼버렸구나.” 북녘 지배층의 허술한 정치역량을 나무라는 것이야 말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정치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지도층 인사의 입에서 북한을 비웃는 얘기를 들을 때는 이렇게 되묻고 싶어진다.

걔네가 가난해진 사정을 단지 ‘소련 붕괴’의 여파와 미국의 경제봉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겠지요. 아무튼 걔네가 가난해진 덕분에 우리 살림이 넉넉해졌다는 사실은 아시나요? 사회혁명을 하겠다는 정치적 존재가 북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혁명 예방’을 위해 남한에 유달리 경제원조를 베풀었어요. 미국 자본과 일본 기술을 들여온 덕분에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지난 세기에 서유럽에 한때 사회민주주의 진보가 꽃핀 것도 (혁명을 퍼뜨릴지 모를) 소련의 존재 덕분이었고요. 양쪽이 음으로, 양으로 맺어온 관계를 잘 들여다보세요. 북한의 허물을 냉정하게 짚는 것이야 옳은 일이라 해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비뚤어진 생각이 아닐까요? 당신 얘기를 들어 보면 미국이 북한을 억지로 무너뜨리려고 덤빌 때 당신은 가만히 바라만 볼 것 같습니다. 북한의 붕괴는 다 자업자득이지 우리가 안쓰러워할 것 없다면서! ‘(흡수)통일, 대박 난다!’고 신이 났던 박근혜의 정치관과 당신 생각이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아직 토론 의제로 꺼내 들 수 없는 질문도 있다

여기까지 대화와 토론이 이어졌다 해도, 마지막 순간에 막힌다. 70년 전에 벌어진 한국전쟁에 생각이 가 닿을 때다. 인터넷에 널렸을 댓글 중의 하나를 인용한다.

동족상잔의 6·25 남침전쟁을 먼저 일으켜 수많은 죄 없는 백성들을 사망케 하고 재산상의 치명적 파괴와 학살을 저지른 전범 김일성 개새끼놈과 그 휘하의 고집 센 빨갱이 한 놈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킨 사람이라니? 이게 뭔 개똥 같은 소리인가? 우리 집안 같은 경우도 조부께서 6·25동란 당시 행방불명되어서 아버지가 두 살 되던 때부터 할머니 되시는 양반이 청상과부가 되어서 힘들게 아버지를 키우셨고 그 여파로 아버지의 인생과 나 본인의 인생까지도 악영향을 받았는데 이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한단 말인가?

6·25로 말미암아 가족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사람과는 토론이 어렵다. 먼저 비슷하게 피해를 겪은 북녘의 누군가를 불러다 마주 앉혀 놔야 한다. 그래야 두 쪽 다, 제 기억과 감정을 잠깐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타임머신을 타고 해방정국의 한반도로 날아가야 한다. 갖가지 일이 벌어질 대로 벌어진 지금이 아니라 큰 사변이 터지기 직전의 한반도가 어떤 사정이었는지, 차분히 내려다봐야 세상일에 관해 토론할 마음가짐을 비로소 갖추게 된다.

조선희가 지난해 펴낸 소설 <세 여자>를 잠깐 훑어봤다. 식민지 시절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세 여성 허정숙과 주세죽, 고명자의 일대기를 상상해 복원한 작품이다. 여성성에 눈 뜬 최초의 개인주의자 나혜석(1896~1948년) 정도만 알고 있는 우리한테 20세기의 사회변혁운동에 여성들도 얼마나 깊숙이 동참했는지 자상하게 들려준다. 날림으로 써온 현대사를 보강해주는 의의가 있다. (tvN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이어 <미스터 선샤인>에서도 여주인공(애신)을 당찬·긍정적인 여성상으로 그려냈는데 이 셋보다 한 세대 앞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셋은 한국전쟁의 의미와 결과를 제대로 평가할 자리에 있을까. 그 셋이 겪은 일(북로당, 남로당, 중도정당에 각각 참여해서 벌인 실천)을 살피기만 해도 한국전쟁의 ‘객관적 의의’를 우리가 통찰할 수 있는가?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아직 ‘종전선언’도 선포되지 못했잖은가.

또 그 시절의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후대의 우리가 비로소 깨닫는다. 나중에 태어난 덕분에! 이를테면 남로당 박헌영이 철석같이 믿었던 그 시절의 소련 공산당이 얼마나 허술했으며, 따라서 그가 해방 당시에 국제(미 vs. 소) 관계를 얼마나 소박하게 파악했는지 우리는 나중 사람이라서 잘 안다. 그러니 그 시절의 현대사는 (허정숙·주세죽의 눈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써야 더 핍진하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들이 여태껏 현대사의 숨겨진 사태나 미처 몰랐던 사실을 들춰내 밝히는 데에는 얼마쯤 성취가 있었지만 ‘한국전쟁’과 관련한 깊숙한 논쟁 지점들을 치열하게 따져 묻지는 못했다. 으뜸으로 떠오를 논점은 ‘누가 어떻게 잘못했냐’는 질문이겠다. 그 시절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역사적 심판!

그런데 정치적 권위를 남북이 나눠 가진 지금, 그 토론은 대다수의 합의를 선뜻 끌어내기 어렵다. 누군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남북이 평화통일로 가는 신작로를 다 닦기 전까지는 그 문제를 번듯한 토론 의제로 꺼낼 수도 없었다.

아직 우리는 현대사 교과서를 온전하게 서술할 수 없다. 지금 시중에 나도는 역사 교과서는 (아무리 개선됐다 해도) 짝퉁이다. 다행히도, 올해 들어 북미 대결이 ‘협상 국면’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우리의 현대사를 좀 더 차분한·열린 마음으로 돌아다볼 여지가 열리기는 했다만.

큰 지혜가 필요한 시절

요즘, 세상이 참으로 수상쩍다. 한반도에 한동안 타오른 전란의 불씨는 올해 사그라들었지만, 그 불씨가 어느새 페르시아만으로 번져 가서 또 타오르는 중이다(미국·이란 핵합의 파기). 그리고 미·중 무역전쟁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지금 아무도 모른다.

세계 무역이 파국을 맞은 탓에 한국의 가계 빚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면 이러저러하게 대처하는 게 좋겠어.

하는 식의 유비무환의 정치적 제안이 미리 나올 법도 한데 어디에도 꺼내 드는 사람이 없다. 이는 닥쳐야만 허둥대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무기력 상태를 말해주는 걸까.

미국 vs. 중국

어느 정치학자는 미국이 일본과 소련과 유럽의 콧대를 차례로 꺾어놨는데(1985년 미일 플라자합의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1990년 소련붕괴, 오바마 때부터 유럽연합 닦달하기), 설마 중국의 콧대를 못 꺾겠냐며 그 콧대가 꺾여야 무역전쟁이 끝난댔다. 꺾일 거란다. ‘사돈 남 말 하듯’ 세상일을 논평한다. 그게 현실주의(리얼리즘) 정치학이라는 걸까. 가치판단은 밀쳐 놓고 힘겨루기 양상만 넘겨짚기로 살피는데, 그런 학자는 지금 지구촌이 깡패가 주름잡는 뒷골목 세계와 무엇이 다른지, 설명해내지 못한다.

또, 사생결단의 쟁투가 왜 벌어졌으며(세계자본주의가 ‘축적의 위기’에 빠졌다), 지금 미국의 해결 방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나 혼자 살아남겠다’고 부르대다가 ‘세계 시장’이 쪼그라들어 다 같이 망한다)에 대해서도 깜깜 ‘모르쇠’다.

시절이 하 수상할 때는 무엇이 필요할까. 큰 지혜가 간절하다. 힘센 쪽이 힘 약한 쪽을 줄곧 겁박하는 이른바 ‘국제 질서’에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서는 한반도에 어떻게 평화를 불러올지, 또 무역전쟁에 어찌 대응할지 아무런 묘수도 떠올릴 수 없다.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간의 협상이 우리를 잠깐 설레게 했지만 파랑새 한 마리가 봄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다들 좁쌀 지혜라도 모아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