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과거에 묻다

[리뷰]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간혹 논리나 인과를 벗어난 일들을 보게 됩니다. 한 해씩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현상들을 단지 우연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확신처럼 느낍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성보다 더 분명한 감정으로 믿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우연이 정말 우연이기만 할 리는 없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곳의 손길들이 얽히고 엮여 서로의 삶을 운명 짓게 되는 것 같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 그레고리우스의 여행도 그렇게 시작됩니다. 새로울 것 없는 노년의 교사인 그는 비 오는 스위스, 베른의 출근길에 높은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던 한 소녀를 구하게 됩니다. 그녀와 함께 교실로 들어섰지만, 곧 나가버리는 그녀를 뒤따라 가요.

사진=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녀는 놓쳤지만, 그녀의 빨간 코트 속에서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 한 권과 책 장 사이에 꽂힌 리스본행 기차표를 발견합니다. 책 속의 구절들은 오랜 세월 삶을 그저 흘려보내며 살아왔던 그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망설이다가 그는 이제 막 출발하는 열차에 발을 올려놓고야 맙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머물게 된 리스본의 호텔에서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의 주소를 찾아 그곳을 향합니다. 그를 맞이한 아마데우의 동생은 마치 자신의 오빠를 아직 살아있는 사람인 듯 말해요. 가정부의 귀띔으로 그가 묻힌 묘지를 찾아가는데요, 그는 혁명이 일어나던 날 지병이었던 동맥류로 죽었습니다. 그렇게 무덤 속에 묻힌 아마데우를 만나고 난 뒤 그레고리우스는 한 번 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한의 감정을 느낍니다.

계획한 대로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엄습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잃고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다.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혀 안경알이 깨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이를 계기로 안과에서 만난 마리아나와의 짧은 만남에서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에서부터 그녀의 삼촌과 아마데우의 인연까지. 그렇게 우연으로 시작된 여행의 동선은 알지 못하는 길을 따라 엮이게 됩니다.

사진=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마리아나와 그레고리우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충동적 끌림에 따라 삶의 방향을 튼 그에게 새로운 안경은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고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 곧 익숙해지는, 그리고 더 먼 곳을 향하게 하는 도구로서 기능합니다. 그에게 새로운 안경을 맞춰준 마리아나와 삼촌 주앙에게로 함께 향하거든요.

주앙은 살라자르 독재 시절의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여전히 과거와 싸우고 있는 노인입니다. 그것이 목적인 여행은 아니었을 텐데 그레고리우스는 서서히 그들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아마데우는 작가와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사람이 고통받아선 안 된다는 생각에 의사가 된 인물이었는데요, 그 신념으로 당시 비밀경찰이었던 루이즈 멘데즈의 목숨을 살려줍니다. 그 후로는 절친이었던 조지마저 아마데우를 피하지만 그는 조지를 찾아가 레지스탕스 모임에 합류하겠다고 밝힙니다. 그것은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재 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친구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테니까요.

그곳에서 만난 스테파니아는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답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가진 여자로 아마데우와 사랑에 빠져 조지의 끔찍한 질투심을 유발하게 됩니다. 조지는 곧 그녀를 죽이려고 해요. 그녀가 생포되면 외우고 있던 명단들을 다 발설할 거라며 걱정하면서요.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노인이 된 주앙도 아직 알지 못하는 그 진실을 찾아 그레고리우스는 조지를 찾아가는데요, 조지는 그의 질문마다 과거의 기억이 힘겨운 듯 이성을 잃으며 꺼져버리라고 외칩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한 번 더 찾아가 주앙의 말을 전하는데요.

조지를 만나면 내게 빚졌다고 전해주게.

그것은 비밀경찰인 멘데즈가 주앙을 찾아와 피아노 치던 그의 손을 못 쓰게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주앙은 끝까지 친구들과의 우정을 지키려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었고요. 그때야 조지는 입을 열어 말해요.

죄책감을 강요하지 말게! 스테파니아를 죽였냐고? 질문이라고 하나? 이젠 레지스탕스 얘긴 하지 않는다고! 과거를 묻고 현재를 살고 있어!

스테파니아는 살아있었어요. 스페인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레고리우스는 스페인을 거쳐 다시 자신이 머물던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요, 때마침 다리 위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찾아 왔습니다. 그제야 알게 된 소녀의 이름은 카타리나 멘데즈. 리스본 도살자의 손녀였던 것이죠. 아마데우의 책을 통해 알게 된 그 사실이 괴로워 그녀는 극단의 선택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만행 때문에 자학해선 안 돼요. (중략) 시간이 걸리겠지만 익숙해지겠죠.

마리아나가 새로운 안경을 두고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는 말을 전해줘요. 그레고리우스는 마리아나와 스페인까지 동행합니다. 그곳에서 만난 스테파니아로부터 그 뒷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는데요, 도망치던 둘을 향해 총을 겨누던 조지는 아마데우의 설득으로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게 돼요. 둘은 국경에서 큰 위기를 만나지만 한때 목숨을 구했던 멘데즈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옵니다.

세상 참 알 수 없죠? 리스본의 도살자가 날 살렸으니까요.

아마데우는 그녀와 둘만 아는 세상으로 가서 살기를 꿈꿨으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달랐어요. 그녀는 그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아마데우는 내게 끊임없이 질문했어요. 그가 알고 싶은 게 나였을까요, 인생이었을까요? 내 삶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했어요.

그녀는 아직도 그가 죽은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사인이었던 병명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를 건네주죠.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이해가, 가려진 진실이 제 자리를 찾게 됩니다.

사진=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아마데우 프라두

영화 속 인물들은 과거를 묻습니다. 피의 역사를, 배신의 기억을, 서로의 이름을, 죄책감의 감정들을 의식 밑으로 눌러둡니다. 그러나 그들과 전혀 무관하지만 그들의 충만한 삶을 동경하는, 살아온 시공간은 다르지만, 우연을 넘어선 어떤 힘으로 시공간을 넘어온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의 과거에 묻습니다. 그들조차도 밝히지 못한 진실을, 아마데우의 삶을 향한 열망을. 그리고 그 물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으로 묘하게 이어집니다.

생각해보면 그들 인생에는 활력과 강렬함이 가득했던 것 같아요. (중략) 충만한 삶이었죠. 내 인생은 뭐죠?

그런 그에게 마리아나는 여기 머무르는 건 어떠냐며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를 묻어두지 말고 과거에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향한 여행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안경처럼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더 멀리 가기 위한 시작인 거죠.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로움, 두려움, 질투심, 죄책감의 감정들을 밑으로 묻지 않고 곳곳의 손길들이 아름답게 얽히고 엮여 후회 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안에서부터 물어보는, 그 물음을 꺼내 보는, 그리하여 더 멀리 여행할 수 있기를 꿈꾸는 오늘의 서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