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애신과 연애하고 싶어라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바뀌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 횡단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홈페이지에는 주인공을 ‘노비의 아들(도망 노예)’로 미 해병대 장교가 된 ‘유진 초이(배우 이병헌)’인 것처럼 소개해 놨으나 사건을 이끌고 가는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대부 집안의 영애 고애신(배우 김태리)이다.

유진 초이뿐만 아니라 일본의 앞잡이가 된 구동매나 10년간 ‘나 몰라라’ 했던 정혼자 김희성도 고애신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부모의 뒤를 이어 남몰래 의병으로 활동해 왔다.

사진=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이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시인 김수영 생각이 났다.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한다는. 그는 비숍 여사를 알고부터 우리의 ‘거대한 뿌리’를 다시 깨달았단다. 그의 연모하는 마음에는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필자도 (유진 초이, 구동매, 김희성의 뒤를 따라) 애신을 연모하게 됐다. 애신은 비숍 여사보다 불과 10년 뒤의 사람이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꼭 내가 울게 된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의 <편지>

드라마에서는 ‘유진 초이’가 (제 삶의 기둥이 되어준 누군가에게) 부치지 않는 편지를 쓴다.

여인(애신)이 그만 헤어지자고 했을 때 저는 하마터면 그녀를 붙들 뻔했습니다. 조금만 더 함께 걷자고요.

(애신한테) 다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불꽃 속으로!

그런데 요즘의 우리는 애초 편지 쓸 생각도 하지 않는다. 누구 생각이 떠오르면 0.1초 안에 스마트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너, 싫어졌어. 그만 만나” 하는 따위의!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 하염없이 누군가를 생각하는 ‘안단테(느리게)’의 미학이 새삼스러워지는 시절이다. 우리도 유진 초이가 돼 누구에겐가 부치지 않는 편지를 쓰고만 싶다.

사진=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미스터 션샤인>은 ‘친일’과 ‘친미’를 미화한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처음에 작가는 구동매가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범 흑룡회에 가담한 것으로 그리려 했는데 불운한 과거(백정 신분)와 여주인공을 안타까이 연모한다는 것 덕분에 그런 역사의 범죄자가 매력적인 인물로 비치지 않겠냐는 따가운 비판이 일자 부랴부랴 개작했다.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둘 때는 그런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릴 적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연모가 깊다고 해서 그 옛 감정이 인생의 안락한 앞길을 보장해 주는 조직(흑룡회)에 대한 충성보다 더 강렬하기는 어렵다. 작가가 역사의 전달과 러브의 창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욕심을 냈다면 그것은 분명히 과욕이다.

유진 초이는 도망 노예의 설움이 있고, 그 무렵 미국이 대한제국의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형편은 아니므로 그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곧바로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개화기에 병원·학교와 기독교를 들여온 은혜로운 미국인에 대한 환상이 오래 퍼졌더랬고(그래서 태극기 집회엔 어김없이 성조기도 펄럭이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을 북돋웠다’는 따위의 허튼 역사서술도 난무한 마당이므로 ‘의병운동을 남몰래 돕는 미국인’이라는 이야기 설정이 ‘(결과적으로) 미국 찬양을 북돋는 것 아니냐’ 하는 따가운 눈길은 상당히 근거가 있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이 뒷배를 봐준 덕분에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했고 한일합방도 이뤄낼 수 있었다. 한국 민중이 이런 제국주의의 ‘짜고 치는’ 현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 않은 세상이므로 <미스터 션샤인>, 곧 조선인의 친구가 돼준 미국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애신은 또 어떤가. 구한말의 여성도 의병 투쟁에 단단히 한몫했다. 하지만 가족제도의 울타리에서 다소 비껴나 있는 (그래서 달콤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혼기 놓친 노처녀가 아니라 그 한복판에 있는 여성들이 그 주체가 됐다.

‘안사람 의병노래’를 지어 퍼뜨린 윤희순(1860~1935)은 시아버지, 남편과 함께 싸움터에 섰고, 영화 <암살>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1873~1933)은 의병으로 죽은 남편을 아들과 함께 따라나섰다.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한테는 사랑보다는 공동체가 더 힘이, 버팀목이 돼주는 법이다.

사진=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그러니까 고애신도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 순전히 가상(픽션)이다. 드라마에는 유진 초이와 구동매와 김희성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한 여인을 놓고 눈치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멀찍이서 이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여인(슬픈 사연 품은 호텔 여주인)이 귀엽게 질투한다.

바보 등신 쪼다. 그 계집이 뭐라고···

너무나 달콤하지 않은가? 그래서 시청률도 제법 나오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런 달콤한 러브 스토리가 나올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노비(유진 초이)와 백정(구동매)한테 명문 사대부댁 규수는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민중을 짓누르며 권세를 누려온 제 집안이 너무 부끄러웠던 양반가 자제(김희성)한테 고애신은 자기 삶의 혁명을 이뤄낸 영웅과도 같았다.

또 꽃(장식물)이 아니라 불꽃으로 살아가는 여자는 그 시절의 남자들(더구나 아랫것들)한테는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 여자와 삶을 함께한다는 것은 곧 천지개벽의 ‘새 사람’이 된다는 얘기였다. 애신바라기들한테는 다음과 같은 서정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으리라.

···당신 때문에 여름꽃이 한없이 발끝에 지고
당신 때문에 산맥들도 강물 곁에 쓰러져 눕고
당신 때문에 가을 빗발이 눈자위에 젖고
당신 때문에 눈발이 치고 겨울이 왔다···

-도종환의 <당신이 떠난 뒤로는>

‘인간 해방’을 동반하는 사랑은 참으로 강력하고 감미롭다! 그래도 4각 관계(‘쿠도 히나’까지 합치면 5각 관계)는 너무 심하다. 역사드라마를 허울로 삼은 (스토리가 뻔한) 상업드라마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시청자들한테 사랑받을 수는 있겠지만, 깊은 울림까지 베풀지는 못할 것 같다.

사진=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하지만 어쨌든 ‘자유연애’의 모델을 내세운 덕분에 (주인공은 픽션 같지만) 드라마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유진 초이가 애신한테 물었다.

당신이 되찾기를 바라는 나라에 백정은 있소? 노비는 있소?

그 무렵 의병들은 이에 대해 탐구심이 부족했을 것이고, 십여 년 뒤 러시아·유럽에서 사회주의 바람이 불어오고 나서야 한 발 더 내디뎠다.

단지 나라를 되찾을 뿐 아니라 새 나라 건설이, 천지개벽이 필요하다!

애신이 불꽃으로 살던 시절로부터 한 세기가 지났다. 지금의 후손들은 애신이 지켜내고자 했던 것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받아 안고 있을까. <미스터 션샤인>의 열렬한 시청자들은 이 질문에 답했으면 좋겠다. “제국주의(식민지 침략)에 맞서는 싸움이 정말 중요했다”는 역사적 깨달음이 지금의 한국 민중한테 충분한 것 같지는 않아서 건네는 말이다.

알다시피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반제국주의의 가치를 되도록 묽히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솔직히 한국 지배층 주류는 얼마 전만 해도 다음 얘기를 열심히 퍼뜨리지 않았던가.

식민지 시절에 우리는 정말 폼나게 근대화됐지요. 우리가 경제성장 이뤄낸 데는 일본의 공이 커요.

그러니까 <미스터 션샤인>이 아무리 주제의식이 허술한 드라마라 해도 어쨌든 ‘의병운동이 옳았다(있었다)’는 주제를 다뤄준 것만으로도 긍정해줄 일이다. 역사 교과서에 적힌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잔뜩 암기한다 해서 학생들의 ‘가치의식’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하는 말이다. 그 암기된 지식에는 ‘누구(유관순, 김구···)를 좋아한다’는 감성이 동반돼야 한다.

그 교훈과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익(이완용)과 구동매가 열심히 일으켜 세웠던 일본 나라가 백년 뒤인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요긴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는 별로 안 해봤을 것이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뒤로 어느덧 150년이 지났다. 일본의 근대화는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했는가?

경제통계를 내세워 ‘일본이 자본주의 강대국이 됐다’고 말하는 것은 싸구려 답에 불과하다. 그 나라에 사회 복지는 충분하며 진취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지, 정치와 도덕이 살아 있는지를 두루 살펴야 한다. 거기서 놓쳐선 안 될 기본 질문의 하나가 ‘일본이 과연 자주 국가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150년 일본의 현대사를 가리켜 ‘성공했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런 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들고 따라간 백년전의 개화파(친일파)와 지금의 뉴라이트들에게 더 모진 비판을 건네줘야 하지 않을까.

긴 얘기는 관두자. 2015년 일본의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를 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벌인 일에 대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고픈 도전이었다며 두 번 다시 (이른바) 국제질서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식민지 침략을 겪은 아시아 인민들은 외면하고 미국에 대해서만 사죄했다. 그게 진심이라면 ‘일본이 졌다’고 일본 인민한테도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자국 인민들한테는 ‘패전하지 않았다’고 교활하게 둘러댔다. 일본 인민들은 정말로 부도덕한 지배층 밑에 납작 엎드려서 70년을 살아왔다.

일본의 집권자로서 ‘대미 자립’을 어떻게든 마음에 품었던 사람은 1980년대 초의 나카소네가 마지막이었다고 한다(우치다 다쓰루의 ‘속국 민주주의론’ 참고). 그 뒤로는 일본 지배층이 ‘자립국가’를 속으로 꿈꾼 적조차 없다. 대공황의 시대에 ‘세계 3위의 경제력’이란 것은 전쟁 도발에나 쓰인다. 이게 제정신이 있는 나라인가?

베트남을 견줘 보자. 아직 약소국가이므로 미국이 쥐락펴락하는 이른바 ‘국제질서’에 베트남이 맞장 뜰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베트남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시시콜콜 간섭하지는 못한다. 베트남인들은 한때 ‘국제질서’의 허구성을 깨부수는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미국에게 용병을 대줬던 한국도 베트남 인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미국은 저희가 한번 호되게 당한 상대는 존중한다. 이 나라가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다 해도 자주성의 기풍이 있으므로 언젠가는 (강대국이 아니라) 일본보다 더 희망찬 나라로 커가지 않을까.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미국 제국주의에 덕을 본 사람들이 승승장구해 왔다. 그러니 ‘유진 초이’라는 픽션의 인물로 말미암아 ‘장밋빛 미국인 상’이 더 강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신이 내세운 자주 국가의 가치는 ‘국제질서’의 서슬에 짓눌려 시렁 위 부처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가령 우리가 자주 국가라면 ‘사드’ 같은 것, 덜컥 받아 안지 말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쓰겠지 않겠는가. 애신과 장포수들의 싸움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미스터 션샤인>이 아무리 허술한 드라마라 해도 좋다. 그 드라마가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의 소중함’을 말해 주고, 대의를 위해 제 목숨을 던지는 심지 굳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면 탈정치 탈가치의 시대에 그것만 해도 어디냐. 아직 우리 대부분은 좁쌀 같은 소시민들로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옛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등을 떠밀 날도 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