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고통을 극복하는 쓰고도 달콤한 유머

[리뷰] 소설 <황야의 이리>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요즘의 필자는 생일을 핑계 삼아 가까운 도시에 훌쩍 다녀왔었습니다. 이름 모를 동네의 자그마한 커피숍에서 책 한 권과 커피 한 잔, 그리고 내 안의 여러 얼굴을 마주 봤던 그 시간이 꽤 힐링 효과를 가져다주었는데요, 하필 생일이라 청승맞아 보일 수도 있지만, 굳이 생일이라 그러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나 굳힌 결심의 목전에서 하는 모든 생각은 존재적 고민과 맞물려있고 결국 내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내 존재라는 것, 내 존재를 괴롭히는 것은 내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을 지나가고 있을 땐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그 모든 복잡함이 단순해질 때까지 깊게 들여다보는 것만이 답이거든요.

그런 이유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제 인생의 스승인데요, 생을 걸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그 결과 현실과 이상을, 부분과 전체를, 개인과 세계를 조화해 더 큰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낸 그의 글들은 하나같이 저의 불안을 잠재우고 공포를 다독입니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지음 / 민음사 출판)

<황야의 이리>는 분열된 자아의 내면을 깊게 응시하고 이러한 정신 분석을 통해 스스로를 완전히 파악하고자 하는 그의 자전적 소설인데요, 인간을 잠재적 정신병자로 보았던 프로이트의 이론을 꼭 빌려오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갈등이 응축된 한 자리가 바로 내 마음속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주인공 황야의 이리, ‘하리 힐러’를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리 힐러는 보통 사람들(시민들)과는 좀처럼 잘 섞일 수 없는 기질을 안고 있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고매한 정신, 단련된 이성을 지향하면서도 정반대의 충동적 본능, 잔인한 야성이 내재한 자아의 이중적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고 이러한 갈등 없이, 즉 정신을 상실한 세상, 몰락된 거짓의 문화에 잘 융합되어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을 진심으로 동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삶에서 내린 나름의 해답은 그 갈등의 고통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밤, 그의 전형을 묘사해 놓은 작은 책자 <황야의 이리론>을 손에 넣게 되는데요, 그 글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 운명을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훗날 크게 깨닫게 되는 진실 중 하나는 아래와 같습니다.

하리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삶은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이를테면 본능과 정신 같은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실제로 어떤 자아도 – 그것이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 해도 –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지극히 다양한 세계, 별들이 빛나는 작은 하늘, 형식과 단계와 상태들의 혼돈, 유산과 가능성의 카오스이다.

오직 죽음에서 구원을 보는 그가 자살을 결심한 것은 단순한 충동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지내던 교수의 부인이 평소 그가 무척 좋아하던 괴테를 그린 초상에서 정신이 결렬된 천박함을 보고는 화가 난 것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을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먼저였어요.

그런 그에게 희망이 되어준 한 사람이 있습니다. 헤르미네는 그와 닮은 듯 다른 여성인데요. 그의 이런 갈등을 모두 이해하면서도 그의 변화를 도모해요. 그가 그랬듯 죽음에서 구원을 보는 듯하면서도 이 삶의 한 가운데에서 사랑을 즐겨요. 그리고 그녀가 삶의 고통을 경험한 끝에 터득한 지혜를 나눠주는데요.

서툰 가락 대신 음악을, 향락 대신 기쁨을, 돈 대신 영혼을, 영업 대신 참된 일을, 장난질 대신 열정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이 아름다운 세상은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어요. (중략) (하지만) 영원이라는 게 있지요. (중략) 그건 시간과 가상의 저편에 있는 나라입니다. (중략) 황야의 이리 씨,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동경하는 거지요.

피붙이 같은 존재, 헤르미네가 소개해 준 마리아를 통해 사랑의 유희를 맛보고, 파블로를 통해 웃음과 행복을 경험한 그는 여닝이라는 폭스트롯을 추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다. 나도 한번 행복해 보았다. 내 자신의 구속에서 벗어나 환희에 빛나면서, 파블로의 형제가 되어 보았다. 어린아이가 되어보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실 세계에 쉽게 적응할 수 없는 기질적 특성들과 이러한 행복함의 사이에 놓여있던 그는 소설의 끝에 제시된 가면무도회의 마술 극장에 입장함으로써 수많은 자아의 모습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알지 못했던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또 죽음을 초월한 불멸의 존재인 모차르트와 괴테를 통해 유머의 기술과 영원의 세계 역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경험 후에도 자아를 벗어나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여전히 자아에 속박해 있는 상태였던 그는 처음 헤르미네를 만났을 때 그녀의 소원이었던, 그녀를 죽여달라는 청을 들어줍니다. 재등장한 모차르트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언제나 너무 비장해! 그러나 곧 유머를 배우게 될 걸세, 하리.

그 말은 언젠가 꿈속의 괴테가 했던 말과도 같았습니다.

진지함이란 시간을 과대평가하는 데서 생겨나는 거라네.

그리고 마술 극장을 꾸며 그를 초대했던 파블로가 했던 말과도 같았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이야. 그의 눈을 좀 들여다봐! 그는 웃을 줄을 몰라.

헤세가 작품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주제, 분열된 자아의 심적 고통을 극복하고 한 차원 높은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방안인 유머는 하리 힐러가 줄곧 그랬듯 현실을 벗어나거나 죽음을 없애고자 하는 갈망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고 죽음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는 비록 이상주의자의 눈으로는 무너지고 비틀어졌지만, 그 뒤에 숨은 정신을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서 완전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갈망할 것도 혐오할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 속에서 순간을 살고 현재를 즐기고 길가의 작은 꽃 하나하나에, 일상의 작은 가치 하나하나에 눈길이 머무는 사람의 생존법이기도 합니다. 하리 힐러의 입을 통해 헤세는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상처를 줄 수 없는 법이라고.

사진=헤르만 헤세

책을 덮고 시선을 둔 유리창 너머의 사위는 벌써 어둑했습니다. 여전히 내게 들러붙어 있는 현실의 문제들-집으로 돌아갈 길의 혼잡함, 앞으로 나아갈 길의 막막함, 묵직하게 가슴에 매인 관계의 상처들, 존재의 빈곤들-에도 웃음이 났습니다. 유머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지만 억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지금껏 했던 그 어떤 선택도 결국에는 잘살아 보리라는 결심이었을 테니 현실의 문제들도, 자아의 분열된 내면도, 하필 생일에 이런 청승도 너그러이 웃어주고 싶었던 진심이 생겨난 것이죠.

식어버린 반 잔의 커피도 맛있게 비워낼 달콤한 케이크 한 판을 조각내지 않은 채 포크로 푹 찍어 한입 가득 넣었습니다. 하얀 크림의 풍성함을 입안에 머금고 커피를 후루룩 마셨습니다. 인생의 맛처럼 쓰고 달콤했습니다. 얕고 가벼운 농담, 외면과 무지의 웃음이 아니라 진정한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본 후에도 던질 수 있는 참 유머의 맛 역시 그러리라 생각하며 쓰고도 달콤한 생일 선물을 받고 이제 막 다시 태어난 ‘서연’이었습니다.